22.
확실히 그는 지금 악마의 발톱 연구에 매진하고 있었다. 다행히 제때 찾아온 모양이다.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레베카는 과거 유스타프의 인터뷰가 실린 신문을 읽은 적이 있었다.
그는 인터뷰에서 수많은 가문에서 고용 제의가 들어왔지만 거절했다는 것과 그 때문에 생고생을 해서 지금은 약간 후회한다고 밝혔다.
그리고 그는 몽푀르에서 난 봄 감자를 가장 좋아한다고도 말했다.
‘그때 사진에서 봤던 연구소는 이렇게 허름하진 않았는데. 악마의 발톱으로 돈을 꽤 많이 벌었나 보네.’
레베카는 떠오르는 기억을 정리하며 명민한 눈빛으로 유스타프를 관찰했다.
“할 말이 있으면 빨리 말해. 나도 빨리 거절하고 연구하러 가야 하니까.”
“악마의 발톱에 관심이 많으신가 봐요.”
느닷없는 그녀의 말에 유스타프는 잠시 경계 어린 눈빛을 보냈다.
레베카는 유스타프가 널브려 놓은 책들을 향해 눈짓했다. 그러자 그는 곧바로 눈을 반짝였다.
“오, 여기 있는 책들만 보고도 아나 보네? 식물에 관심이 있어?”
레베카는 약간의 호감을 표하는 유스타프를 보고 미소 지었다.
그리고 자신의 옆으로 드리워진 싱그러운 잎 하나를 매만지며 말했다.
“아예 없다고는 할 수 없죠. 그나저나 안타깝네요. 이런 귀한 식물들이 이렇게 방치되어 있다는 게.”
“방치라니! 내가 얼마나 정성껏……!”
“여기 보니 얼룩덜룩한 반점들이 보이네요. 온도가 맞지 않는 거 아니겠어요?”
“이제 전략을 바꿨나 보지? 전문가를 보내서 나를 책망하는 걸로?”
“유감스럽게도, 저는 당신이 말하는 그 백작과는 전혀 관계가 없어요.”
“그럼 어느 높으신 나리인데.”
“아주 높으신 분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죠.”
“그게 무슨 말이야.”
“어차피 당신에게 그런 건 아무 상관 없잖아요. 제가 뭘 줄 수 있을지가 더 궁금할 텐데?”
“그건 그렇지만 내가 원하는 걸 맞춰줄 사람은 아무도 없어.”
“일단 커다란 온실을 지어드릴게요.”
“흥. 그 정도는 웬만한 사람들은 다 제안했던 거야.”
“몽푀르에 지어드릴 건데, 그래도 다른 사람들과 똑같나요?”
“몽푀르에……?”
유스타프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세를 고쳐 잡았다.
요하네스 공작령에 위치한 몽푀르는 유명한 항구도시였다.
그랬기에 전 세계에서 들어오는 물품들을 누구보다 빠르게 받아 볼 수 있었다.
외국에서만 볼 수 있는 희귀한 식물들을 공수하기 위한 최적의 장소였다.
게다가 비옥한 땅까지 인접해 있어 농사를 하거나 식물을 키우는 사람에겐 꿈과 같은 곳이었다.
하지만 그만큼 땅값이 비쌌다.
사람들은 요하네스 공작령에 살면 여신의 축복을 배로 받을 수 있다고 여겼다.
이런 사람들의 인식은 몽푀르 지역의 각종 이점과 더불어 땅값을 천정부지로 치솟게 했다.
유스타프의 격렬한 반응을 잠자코 지켜보다 레베카가 말했다.
“네. 그리고 당신이 무슨 연구를 하든지 상관하지 않을게요. 식인 식물을 키우든 흡혈 식물을 키우든 마음대로 하세요.”
유스타프는 순간 혹해서 눈을 반짝였지만 금세 의심의 눈길을 보냈다.
“그렇게까지 해준다고? 대체 조건이 뭐야?”
“목이 마르네요. 일단, 차 한 잔 주실 수 있을까요?”
“아, 내가 손님을 앞에 두고 경황이 없었군. 자, 잠시만 기다려봐.”
유스타프가 허둥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부엌으로 향했다.
그가 사라진 틈을 타 레베카는 테이블 위의 문서들을 샅샅이 살폈다.
그의 연구가 어디까지 진행됐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레베카는 그중에서 가장 손때가 많이 탄 노트 하나를 집어 들었다.
<마른 악마의 발톱을 독이 든 물에 넣었을 때 부글부글 끓은 뒤 물이 정화되는 걸 목격했다. 결과로 미뤄보아 이 식물을 사람이 섭취했을 경우…….>
레베카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는 일찌감치 악마의 발톱의 효능을 발견했다.
다만 연구하는 데 드는 돈 때문에 그렇게 시간이 오래 걸렸으리라고 레베카는 짐작했다.
그리고 또 다른 한 가지 걸림돌도 있었을 테고.
“자, 마셔. 시원한 허브차야.”
레베카는 유스타프가 건넨 차를 마셨다.
지금껏 그녀가 먹어 본 차 중에서 가장 맛있는 차였다.
과연, 모든 식물에 있어서는 전문가란 말이지.
레베카는 허브향을 음미하다가 입을 열었다.
“실험체가 필요하시죠?”
“푸흡.”
유스타프는 마시던 차를 내뿜었다.
“그, 그걸 어떻게?”
“자리를 비우신 동안 노트들을 좀 읽었어요. 아, 무례를 용서하세요. 펼쳐져 있기에 봤던 것뿐입니다.”
“그래서?”
“이론이 흥미롭더군요. 제가…… 아니 제 고용주께서 관심을 가지실 만한 이론이에요. 그럼 이렇게 하죠. 조건을 물으셨죠? 조건은 간단해요. 제 고용주 밑에서 악마의 발톱을 연구하세요. 실험체와 악마의 발톱 씨앗을 제공해 드리죠.”
“싫어.”
“이유는요?”
“그렇게 해서 내가 연구에 성공하면 공을 죄다 그 높으신 나으리께서 가져가려고 하는 거 아니야? 그런 식으로 버려진 동료들을 수도 없이 봐 왔어.”
“아아, 그런 거라면 걱정 마세요. 제 고용주는 원래도 명망이 있으신 분이라 그런 사사로운 명예 따위엔 관심이 없거든요. 음, 지적 호기심이 풍부하신 분이라고 해두죠.”
“사사로운 명예라니! 이게 발표되면 얼마나…….”
“큰 반향을 일으키겠죠. 떼돈도 벌 거고요. 거의 만병통치약이니까요. 어떻게 이런 걸 발견하셨는지 대단하시네요.”
유스타프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리고 얼굴을 붉히고는 흥분을 가라앉혔다.
그동안 학계에서 미치광이, 또라이란 소리는 많이 들어봤어도 이런 식의 칭찬은 처음이었다.
“내 이론의 진가를 알아본 건 당신이 처음이야.”
‘생각보다 단순하네.’
레베카는 벌겋게 달아오른 목덜미를 벅벅 긁는 그를 보며 미소 지었다.
유스타프는 불현듯 떠오른 걱정에 다시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런데 실험체를 구해주겠다니, 혹시 당신의 고용주가 어둠의 경로에 종사하는 사람은 아니겠지? 난 높은 자리까지 올라갈 거라 불법은 곤란해.”
‘명예욕까지 있네.’
여러모로 속이 훤히 내보이는 사내였다.
하지만 레베카는 제 속내를 잘 숨기는 영악한 사람보다는 그게 더 낫다고 생각했다.
레베카는 긴 설명 대신 품속에서 펜던트를 하나 꺼내 들었다.
“이거면 답이 되었으려나요.”
황금빛 펜던트를 받아든 유스타프는 숨을 삼켰다.
펜던트에는 주사위를 발밑에 두고 있는 고양이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길가의 코흘리개도 아는 요하네스 공작의 문장이었다.
혹시나 곤란한 일이 생긴다면 쓰라고 일전의 만남에서 율리안이 레베카에게 주었던 물건이었다.
‘생각보다 반응이 격하구나.’
유스타프는 떨리는 손으로 펜던트의 이곳저곳을 살피다가 조심스럽게 레베카에게 내밀었다.
펜던트는 식물 이외에는 문외한이 그가 봐도 섬세한 작품이었다. 모조품일 리가 없었다.
‘이게 웬 횡재냐.’
악마의 발톱 연구에는 돈이 미친 듯이 들었다.
씨앗은 구경도 못하고, 말린 잎을 구하는 것만 해도 힘들었다.
부유한 상인이었던 부모가 남겨준 유산도 거의 다 써버린 상태였다.
때문에 그는 부업이라도 해야 하나 한참 고민에 빠져 있는 상태였다.
사실 그도 여러 귀족의 제안에 몇 번 혹했던 적은 있었다.
하지만 귀족들 대부분은 자신들의 명령에 따를 것을 조건으로 내걸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걸리는 점은 자신이 음지에서 자라는 특이한 식물들을 좋아한다는 점이었다.
그중에서는 마물의 땅에서 나는 식물도 있었다.
고지식한 귀족 고용주가 그걸 용납할 리가 없었다.
그런데, 연구에 아무런 간섭도 하지 않는 데다가 유일한 조건이 악마의 발톱을 키우는 거라니.
그로선 이보다 더 구미가 당기는 제안은 없었다.
유스타프는 침을 꿀꺽 삼키고 허겁지겁 펜을 찾아 들었다. 그리고 한층 공손해진 태도로 조심스럽게 말했다.
“사인은 어디에 하면 됩니까?”
* * *
다나에를 실은 공작가의 마차는 부드럽지만 빠르게 나아갔다.
그녀는 마석을 단 마차는 처음 타봤다.
제국에서 딱 다섯 대밖에 없다는 이 호화스러운 마차는 한 시간 거리를 십 분 만에 달리는 연금술의 집합체였다.
‘그런데 이런 마차를 소유한 요하네스 공작과 재혼을 한다고?’
다나에는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레베카가 아무리 뛰어난 외모를 가지고 있다 한들 그 아이는 저택 밖으로 나간 적이 거의 없었다.
그리고 요하네스 공작은 레베카보다 세 살이나 어렸다. 그런 아쉬울 것 없는 사람이 어째서 레베카를?
다나에가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마차는 어느새 공작가에 다다랐다.
거대한 고양이가 그려진 철문이 그녀를 반기듯 서서히 열렸다.
“지금부터는 이 마차로 갈아타셔야 합니다. 고양이님들이 놀랄 수도 있어서요.”
하인이 자그마한 흰색 마차까지 다나에를 정중하게 모셨다.
흰색 마차는 방금까지 타고 온 마석 마차보다는 작았지만 티 테이블까지 준비되어 있어 그에 못지않게 고급스러워 보였다.
“저택까지는 꽤 시간이 걸리니 차 한잔이라도 하시겠습니까?”
마차 안에 타고 있던 하녀가 다나에를 극진하게 대우했다.
다나에는 얼떨떨하게 차를 받아들었다.
마차는 저택까지 이어진 흰 자갈길을 천천히 달리기 시작했다.
흰 자갈길 좌우로는 울창한 숲이 이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 숲 사이로 각양각색의 고양이들이 뛰어놀고 있었다.
중간중간 전담 하인들이 고양이에게 먹이를 주거나 장난감을 흔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역시 데프리아 여신의 가호를 받는 가문답구나. 이곳이 고양이의 천국이라더니 틀린 말이 아니었어.’
“오시느라 쌓인 여정의 피곤을 잠시나마 풀어드리겠습니다.”
하녀가 다나에의 발을 조심스럽게 주무르기 시작했다.
처음에 질색하던 다나에는 곧 그녀의 시원한 손길에 편안한 마음으로 푹신한 의자에 등을 기대었다.
‘이렇게 쉬어본 지가 얼마 만인지.’
변변한 고용인들 없이 넓은 저택을 관리하느라 그동안 다나에는 쉴 틈 없이 살아왔다.
가끔 정말 살림이 궁할 때는 눈이 침침할 때까지 삯바느질을 하기도 했었다.
물론 대외적으로 알릴 수는 없었으니 하녀가 대신 내다 팔아줬었고.
‘우리 딸 덕에 호강하네.’
다나에는 문득 원래 자신은 이런 호강을 누리고 살았었다는 사실이 떠올라 씁쓸하게 웃었다.
그렇게 다나에가 오랜만의 휴식을 만끽할 무렵 마차가 멈추었다.
“어서 오십시오. 오벨리아 부인.”
마차에서 내린 다나에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수많은 고용인이 성 앞에 나란히 서서 그녀를 향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에 서 있는 훤칠하게 생긴 청년이 곱게 눈웃음을 지으며 그녀를 반겼다.
“처음 뵙겠습니다. 율리안 요하네스라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