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다나에는 화려한 응접실에 앉아 딸기 크레페를 조그맣게 떠서 입에 넣었다.
달콤한 크림이 그녀의 입에서 사르르 녹아내렸다.
‘우리 딸들도 먹으면 좋아하겠다.’
마음 같아서는 이곳에 있는 걸 집으로 다 싸가고 싶었다.
하지만 곧 그런 염치없는 생각을 했다는 사실에 민망했다.
‘레베카 보기 부끄럽게 무슨 생각을 하는 거람. 주책이야, 다나에 오벨리아.’
“어떻게, 다과가 입에 맞으십니까?”
율리안은 다나에가 가져온 레베카의 서신을 읽으면서도 종종 다나에의 안색을 살피며 물었다.
“아, 예. 전부 다 맛있습니다. 이렇게 극진히 대우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네요.”
“무슨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레베카의 어머니시니 제 어머니도 되십니다. 그러니 편히 말씀해 주세요.”
“네에? 제가 어찌 공작님께 말을…….”
“그게 제가 더 편해서 그럽니다.”
“그럼……. 알겠네.”
율리안은 흡족하게 웃더니 다시 예리한 눈으로 서신을 읽어 내려갔다.
다나에는 그 모습을 홀린 듯이 쳐다봤다.
‘잘생겼기는 했네. 우리 레베카에게 뒤지지 않을 정도로. 하지만 얼굴이 다가 아니야. 제플린을 봐봐. 또 그 꼴을 보게 할 수는 없지.’
다나에는 정신을 차리고는 약간의 경계심을 담아 그의 손짓 하나까지 지켜봤다.
조금이라도 이상한 느낌이 든다면 레베카에게 다시 생각해보라고 할 참이었다.
‘연애하는 척을 해달라고?’
레베카가 율리안에게 보낸 서신에는 앞으로 그녀가 벌일 사업에 관한 이야기가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끝에는 어머니가 걱정하지 않게 서로 사랑해서 결혼하는 척을 해달란 부탁이 있었다.
율리안은 난감했다.
레베카가 그에게 부탁한 일 중에는 딱히 어려운 일은 없었다.
그녀가 몽푀르에 온실이 딸린 연구실이 필요하단 말을 하자마자 그는 바로 공사를 명령했다.
상단도 바로 마련하고, 상단주를 맡을 자도 고용했다.
그가 말만 하면 뭐든지 이루어졌다. 돈 쓰는 일은 누구보다 자신 있었다.
레베카의 어머니가 방문하겠다고 했을 때도 약간 당황은 했지만 별문제는 없었다.
기본 예의범절은 그도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예의를 차리지 않을 때는 예의가 불필요하단 생각이 들 때뿐이었다.
그러나 레베카의 어머니는 달랐다. 그녀는 극진하게 모셔야 할 대상이었다.
그런 당연한 일쯤이야 그렇게 힘든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연애하는 척이라니?
율리안은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연애를 해본 적이 없었다. 그 흔한 짝사랑도 해본 적이 없다.
그의 부모는 서로를 헐뜯기 바빴으니 부부간의 애정이 뭔지도 배우지 못했다.
그가 어렴풋이 아는 남녀관계라고는 침대에서 이루어지는 뜨거운 정사밖에 없었다.
그러니 사랑에 빠진 남자인 척을 하라는 레베카의 요구는 그 어떤 부탁보다 어려웠다.
하지만 못하겠다는 말은 그의 자존심상 용납하지 못했다.
크로아에게 도움을 요청해봤자 평생 놀림거리만 될 게 뻔했다.
‘그냥 말을 돌려버리자.’
결국 율리안은 연애의 ‘연’ 자도 나오지 못하게 사업 이야기만 주야장천 하기로 했다.
“대충 어떤 사안인지는 잘 알아들었습니다. 어머니께서 새로운 사업을 맡아주신다고요?”
“응? 아, 레베카가 그렇게 해달라고 하더군. 내가 과연 잘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어머니는 충분히 잘하실 거라 믿습니다. 그동안 오벨리아 가문을 이끌어 주셨지 않습니까.”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네.”
다나에가 얼굴을 조금 붉혔다.
그 모습을 보던 율리안은 일전에 구휼원에서 레베카와 나눈 대화를 떠올렸다.
‘왜 굳이 사업을 하려고 하는 거지? 빚이 많다면 내가 갚아주어도 될 텐데.’
‘빚을 갚는 건 일시적인 해결책밖에 되지 않아요. 아버지가 또다시 백작에게 손을 벌릴 수도 있고요. 저는 가장의 자리를 어머니에게 넘겨줄 겁니다. 그러기 위해선 어머니에게 재력이 필요해요.’
다나에는 빠듯한 재정으로도 오벨리아가를 지켜냈다. 그녀가 아니었더라면 오벨리아가는 진작에 망했어야 할 가문이었다.
레베카는 그 점을 높게 샀다.
다나에는 살림이나 하고 있을 위인이 아니었다. 그녀는 천성적으로 사람을 잘 파악하고 돈을 굴리는 머리가 뛰어났다.
제플린과 이혼하기 전에 그가 자신을 위협할 수 있는 모든 요인을 없애두어야 했다.
지금 제플린이 자신을 잡고 뒤흔들 수 있는 약점은 두 가지였다.
친정과 리베르타 구휼원.
레베카는 먼저 친정을 제플린의 손아귀에서 빼내기로 했다.
율리안이 빙긋 웃으며 물었다.
“그나저나 그 사업에 대해 정확히 알려주시겠습니까. 자세한 사항은 어머니께 직접 들으라고 적혀 있던데요.”
“아, 그건 내가 설명해주겠네. 일종의 임대 살롱이야.”
인자하기만 하던 다나에의 눈빛이 사업 이야기가 나오자 단번에 날카로워졌다.
율리안은 그녀의 진지한 태도에 자신도 모르게 자세를 바로잡았다.
“임대 살롱이라 하면……?”
“알다시피 지금 제국의 귀부인들은 모두 자신의 집에서 살롱을 열고 있지 않나.”
“그렇죠. 파벌의 장이기도 하고요.”
“하지만 그만큼 드는 부담도 크지. 사시사철 유행에 따라 집을 꾸며야 하고. 게다가 하인들이 남편에게 자신들의 이야기를 퍼 나를 수도 있으니 마음 놓고 사적인 이야기를 하지 못하지 않겠나.”
“그건 그렇겠네요.”
“그래서 살롱의 장소를 임대 해주는 거지. 방이나 정원을 통째로 빌려주는 거야. 물론 고객의 입맛에 맞게 꾸미는 건 우리가 하고. 고객들은 직접 꾸미는 것보다 저렴한 가격으로 살롱을 열 수 있지. 그리고 살롱 측 직원들만 드나들 수 있으니 남편에게 은밀한 이야기가 들어갈 수 없고 말이야.”
“하지만, 그렇게 하면 자신이 꾸미는 것에 무능력하다는 걸 증명하는 거 아닙니까? 귀족들은 기성품을 싫어합니다. 펜대 하나까지도 맞춤으로 주문하는 자들인데, 과연 귀족들이 그걸 좋아할까요?”
“좋아할 걸세.”
“어떻게 그리 확신하십니까?”
“내가 그런 게 있었으면 했으니까.”
다나에는 목을 가다듬고 다시 말을 이어갔다.
“모든 귀족이 돈과 시간이 많은 건 아니네. 그리고 유행이야 만들면 되지 않나. 뒤처지는 걸 싫어하는 치들이니, 유행만 한다면 사업은 성행할 거야. 그리고 특별 손님들을 위한 프라이빗 살롱도 함께 만들 예정이네. 이 정도면 되지 않겠는가.”
임대 살롱을 다나에에게 알려준 건 레베카였다.
레베카가 백작저에서 막 도망쳐 나왔을 때, 임대 살롱이 폭발적으로 유행하고 있었다.
그녀가 일했던 마가렛의 라본느 살롱도 임대 살롱이었다.
레베카에게 지금 가장 절실히 필요한 건 정보였다. 저택 내부의 사람 정도는 로버트만으로도 충분했다.
하지만 가신들과 기사들까지 로버트 혼자 모든 정보를 수집하기엔 역부족이었다.
레베카는 회귀하기 전까지 일했던 라본느 살롱에서의 일을 떠올렸다.
그녀는 주로 주방보조로 일했기에 바깥 상황에 대해서는 잘 몰랐다. 그럼에도 온갖 소문들이 귀에 들어왔다.
평민인 마가렛이 만든 살롱이라 주로 부유한 평민들이 출입했기에 쓸 만한 정보들은 많이 없었다.
하지만 요하네스 공작이 직접 운영하는 살롱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그의 이름만으로도 사교계에 지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킬 것이었다.
문제는 레베카가 이전 생에서부터 사교계에 잘 출입하지 않았던 탓에 그 생태계를 잘 모른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다나에를 불렀다. 젊었을 적에 다나에는 사교계를 주름잡던 귀족 영애 중 하나였다.
게다가 그녀에겐 사업가 기질까지 있었다.
그러니 이 일에 완벽한 적임자였다.
다나에는 레베카가 임대 살롱에 대한 운을 떼자마자 바로 사업안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열정적인 다나에의 모습에 레베카는 그녀를 율리안에게 보냈다.
자신보다는 다나에 본인이 율리안을 더 잘 설득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예상은 맞아떨어졌다.
다나에의 사업안을 잠자코 듣고 있던 율리안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거리며 그녀의 말을 경청하고 있었다.
다나에는 여태껏 그가 봤던 어느 사업가보다도 꼼꼼하고 진취적이었다.
율리안은 레베카의 혜안에 감탄하고 있는 중이었다.
확실히 다나에라면 가장, 아니 한 가문의 수장이 되기에도 충분했다.
율리안은 반짝이는 다나에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문득 레베카가 다나에를 참 많이 닮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어머니가 떠올랐다.
만약 요하네스가의 가주가 아버지가 아니라 어머니였다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이 들었다.
그럼 진작에 저주가 풀렸을지도 몰랐다.
총명했던 어머니는 자신이 태어나고 얼마 되지 않아 스스로 공작가의 저주에 대해 알아냈다.
그리고 아들의 저주를 풀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사실을 감추기에만 급급해 어머니를 가둬두었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아무도 만나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그는 줄곧 레베카가 신경이 쓰였다. 장식품처럼 제플린 손에 들린 그녀를 보면 어머니가 생각났다.
하지만 율리안 점점 확실하게 깨닫는 중이었다. 레베카는 어머니와 달랐다.
레베카는 스스로 문을 깨부수고 나오는 사람이었다.
“그럼 이렇게 사업을 진행하는 걸로 알고 이만 일어나야겠네.”
다나에가 시계를 확인하고는 서둘러 일어났다. 이야기가 길어진 탓에 생각보다 시간을 많이 지체했다.
율리안이 일어나 다나에를 배웅했다.
성을 나서기 전, 다나에가 율리안에게 물었다.
“그나저나 자넨 우리 레베카의 어디가 마음에 들었나.”
올 것이 왔구나.
율리안은 당황한 티를 내지 않으려고 눈에 바짝 힘을 주었다. 다나에는 속이기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그는 머릿속으로 온갖 로맨틱해 보이는 말을 굴려보다가 결국 솔직해지기로 했다.
맞지 않는 옷을 입은 듯한 말을 하는 것보다 오히려 그 편이 덜 의심스러울 것 같았다.
율리안은 목소리를 최대한 가다듬어 말했다.
“멋있어서요.”
“멋있다고?”
“예. 레베카는, 제가 태어나서 본 여자 중 가장 멋있는 눈빛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여느 구혼자들이 그랬듯 레베카의 외모를 찬양할 거라 생각했던 다나에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나 이내 율리안의 눈에서 진실을 찾고 다나에는 활짝 웃었다.
“그럼,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어머님.”
율리안은 다나에를 태운 마차가 출발할 때까지 극진하게 배웅했다.
공작저에 들어갈 때처럼 작은 마차에는 하녀가 함께했다.
“이건 선물입니다.”
하녀가 바구니를 내밀었다. 바구니 안에는 다나에가 응접실에서 손을 자주 댔던 디저트들이 한가득 담겨 있었다.
하녀가 재빠르게 말을 덧붙였다.
“요하네스 공작가는 예로부터 손님을 빈손으로 보내지 않습니다.”
율리안이 직접 주면 다나에가 부담스러워할 것까지 예상하고 이렇게 하녀의 손에 들려 보낸 것 같았다.
다나에는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어쩐지 그와 함께라면 레베카도 행복할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