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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친 백작 부인이 돌아왔다-24화 (24/232)

24.

“제플린은?”

백작저의 개구멍으로 돌아온 레베카가 흙먼지를 털어내며 로버트에게 물었다.

로버트는 레베카와 약속한 그 시간에 정확히 개구멍 앞에 서 있었다.

그는 레베카의 말간 얼굴을 보자마자 한시름 놓았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백작님은 아직 안 돌아오셨습니다. 그나저나 제발 이런 무모한 짓은 이제 하지 마십시오. 수명이 반으로 줄어든 것 같습니다.”

“어쩔 수 없었어요. 워낙 중요한 사람이라 다른 사람에게 맡기기엔 불안했거든요.”

“어쨌든 빨리 방으로 돌아가세요. 조금 있으면 저녁 식사 시간입니다.”

“알았어요.”

로버트는 주위를 살피고는 레베카를 구석진 창고로 데려갔다. 창고 안에는 하녀 옷이 준비되어 있었다.

“일단 이 옷으로 갈아입고 저택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하녀장에게 들키지만 않는다면 승산이 있습니다.”

로버트는 얼굴을 쓸어내렸다.

레베카는 얼른 하녀 옷으로 갈아입고 모자를 푹 눌러써서 머리카락 색이 보이지 않게 했다.

“그 꽃은 어디다 쓰게요?”

레베카가 로버트의 한 손에 들려 있는 꽃 한 다발을 보고 물었다.

로버트가 주위를 살피면서 말했다.

“혹시나 모를 일에 대한 보험입니다. 일단 이것부터 드세요.”

로버트는 레베카에게 찻잔이 담긴 트레이를 들게 했다. 그리고 고용인들이 다니는 문을 지나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다행히 다들 저녁 식사를 준비하느라 분주했기에 둘에게 큰 관심을 쏟는 사람은 없었다.

‘이제 계단만 올라가면…….’

그때 누군가 둘의 앞을 막아섰다.

“로버트, 한동안 안 보이던데 어딜 갔었던 거지?”

싸늘한 목소리였다.

목소리의 주인공을 확인한 로버트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목까지 단추를 모조리 채운 검은색 드레스를 입은 그레이스가 조용히 두 사람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레이스를 확인한 레베카는 서둘러 얼굴을 숙였다.

그레이스는 액자가 일 밀리라도 틀어지는 것조차 용납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제플린이 가장 신임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런 그레이스가 아무리 하녀 옷을 입었다 한들 레베카를 알아차리지 못할 리 없었다.

로버트가 손에 든 꽃을 보이며 침착하게 말했다.

“아, 마님이 부탁하신 꽃이 있어 정원에 있었습니다.”

“그렇군. 그런데 이 아이는…….”

그레이스가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리며 레베카를 빠르게 훑었다.

로버트가 다급하게 그녀의 시야를 가리고는 말했다.

“마님 방에 차를 가지고 가던 중이었습니다.”

그레이스는 트레이를 꽉 쥐고 있는 레베카의 손을 잠시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동자가 잠시 동요하는가 싶더니 다시 원래대로 차갑게 내려앉았다.

“알겠네. 마님을 기다리게 해서는 안 되지.”

다행스럽게도 그레이스는 눈치를 채지 못한 것 같았다.

레베카와 로버트는 속으로 안도의 숨을 들이쉬고 계단을 올랐다.

“아, 잠깐만.”

다시 둘을 불러 세우는 목소리에 레베카는 숨을 잠시 멈추었다.

레베카 대신 로버트가 그레이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왜, 그러십니까?”

“올라가는 김에 마님께 내일 파비올라 님께서 방문하신다고 전해주게.”

“예. 알겠습니다.”

파비올라가 온다고?

레베카의 얼굴이 단번에 굳어졌다.

손이 덜덜 떨려왔다.

파비올라, 그녀의 이름만 들어도 목이 움츠러들었다.

문득 끔찍했던 과거의 기억이 떠올라 레베카는 이를 앙다물었다.

‘안 되겠어. 이혼 계획을 최대한 빨리 앞당겨야겠어.’

* * *

파비올라 데본셔. 그녀는 제플린의 어머니이자 레베카의 시어머니였다.

제플린은 원래부터 제 어미를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았다.

파비올라는 순종적인 아내였다.

가부장적인 그녀의 남편, 자킴 데본셔가 무슨 말을 하든 그녀는 고개를 조아렸다.

그녀는 자신의 순종적인 태도를 제플린에게 강요하기까지 했다.

‘아버지의 말을 잘 들어야 착한 아들이지. 백작님의 권위를 세워 드려야지 않겠니.’

제플린은 파비올라의 그런 말들을 죽도록 싫어했다. 그래도 그는 어머니에 대한 기본적인 예는 지켰다.

아버지에게 광적으로 순종하는 것만 빼면 파비올라는 아들을 끔찍이 사랑하는 어머니였다.

하지만 그 모든 건 제플린이 레베카와 결혼하겠다는 선언을 한 뒤 달라졌다.

제플린의 고백에 자킴은 길길이 날뛰었다.

‘절색의 미녀는 어딜 가나 있어! 어디서 굴러먹다 온 줄도 모르는 가문과 우리 가문을 엮는단 말이냐! 저기 포르티나 왕국에 네 마음에 찰 만큼 아름다운 왕녀가 있다. 그녀와 결혼해!’

파비올라는 평소처럼 자킴의 편을 들어 제플린을 설득하려 나섰다.

그녀에 대한 제플린의 혐오가 시작된 건 이때부터였다.

‘제가 원하는 건 모두 가질 겁니다. 그걸 방해하면 누구도 가만두지 않겠습니다. 설령 그게 어머니 아버지라 하더라도.’

자킴 데본셔 백작이 낙마 사고로 죽은 건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일이었다.

파비올라는 본능적으로 아들이 제 남편을 죽인 걸 알았다.

하지만 그리 놀라지는 않았다.

파비올라는 남편이 제플린을 훈육할 때마다 그를 바라보는 제플린의 흉흉한 눈빛을 오랫동안 보아왔다.

그녀는 언젠가 제플린이 제 아버지를 죽일 거란 걸 어렴풋이 예상하고 있었다.

그렇게 갈 곳을 잃은 파비올라의 집착과 공포의 대상이 자연스레 제플린을 향했다.

그런 파비올라에게 레베카는 제거해야 할 경쟁 상대일 뿐이었다.

레베카와 제플린은 결혼하고 몇 년간 파비올라와 백작저에서 같이 살았다.

그녀가 지내던 곳은 지금 알리시아가 지내는 방이었다.

그때 파비올라는 지독하게 레베카를 괴롭혔다.

제플린의 보복이 무서워 신체적으로는 그녀를 어찌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정신적으로 그녀를 끊임없이 몰아붙였다.

남편에게 평생을 당한 게 있었으니 파비올라는 누구를 괴롭히는 것만큼은 자신 있었다.

레베카는 싫은 소리 한번 하지 않고 파비올라의 괴롭힘을 묵묵히 당했다.

하지만 이 저택에 비밀이란 없었다.

결국 파비올라의 만행은 사냥개에 의해 제플린의 귀로 들어갔다.

그리고 제플린은 그녀를 멀리 내쫓아버렸다.

사실상 수도의 호화로운 저택으로 보낸 것뿐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레베카는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파비올라도 처음에는 발악했지만 이내 수도의 화려한 생활에 만족했다.

듣기로는 매일 밤 파티를 연다고 했다.

하지만 그녀는 가끔 이렇게 불쑥 저택을 방문하고는 했다.

물론 이유 없는 방문은 없었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알리시아가 목표겠군.’

레베카만 해도 골치가 아플 텐데 이제 알리시아까지 끼어들었으니 파비올라는 불안할 것이다.

파비올라는 두 명의 며느리가 제플린을 설득해 제 자금줄을 끊어버리기라도 할까 봐 밤잠을 설쳤다.

* * *

“레베카, 오늘은 그냥 푹 쉬어.”

제플린이 침대에 걸터앉아 부드럽게 속삭였다. 그는 어제 밤늦게 들어왔어도 피곤한 기색 하나 없었다.

“하지만 오늘 어머님이 오신다고 들었는데요.”

“아랫것들이 또 쓸데없는 말을 했나 보군. 상관없어. 네가 그 여자를 볼 이유는 없잖아.”

“그럼, 당신이 어머니를 맞이할 건가요?”

“설마. 나에게 부인이 한 명 더 있잖아. 알리시아라고.”

제플린은 마치 남을 말하듯 무미건조한 어투로 말했다.

그는 레베카의 머리카락을 들고서 제 코에 가져다댔다.

머리카락에 묻어나는 레베카의 체향이 아찔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당신이 얼른 나았으면 좋겠군. 이제 팔은 움직일 수 있지 않아?”

“아직 불편하기는 하지만요.”

레베카는 제 몸을 삼킬 듯이 탐닉하는 제플린의 눈길을 보고 다음번엔 옥상에서 뛰어내려 버릴까 고민했다.

“아, 그렇지. 당신을 위한 선물을 준비했어.”

“선물이라니요?”

“그건 가보면 알아.”

제플린은 레베카를 번쩍 들어 안고 문을 나섰다. 제 할 일을 하던 고용인들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주인 내외를 바라봤다.

그들은 하루 종일 침대에 누워 있지만 머리부터 발끝까지 흠잡을 데 없이 치장한 레베카를 눈에 담았다.

제플린의 품에서 힘없이 달랑거리는 두 팔다리를 지켜보았다.

그녀는 잘 만들어진 마리오네트 같았다.

수치스러웠다.

반항을 해볼까 생각도 해봤다.

하지만 레베카는 사냥감의 약점을 노리는 암사자처럼 조용히 그에게 안겨 있기를 택했다.

* * *

저택 입구까지 걸어 나온 제플린은 준비되어 있던 휠체어에 레베카를 앉혔다.

“어때? 편하지? 당신, 산책 좋아하잖아. 주치의가 너무 오래 누워 있는 것도 안 좋다고 하더군.”

레베카는 각종 보석으로 장식된 휠체어를 차가운 눈으로 내려다봤다.

휠체어에는 기다란 사슬이 달려 있었다. 딱 정원 반경만큼의 길이었다.

‘그러면 그렇지.’

제플린은 레베카를 휠체어에 앉혔다.

“제국에서 하나밖에 없는 수제 휠체어야. 여기에 박힌 보석들이 보여? 물론 당신보다 아름답지는 않지.”

레베카는 말없이 휠체어 밑으로 늘어진 사슬을 바라봤다. 사슬마저도 금으로 도색되어 있었다.

제플린은 레베카의 앞으로 다가와 한쪽 무릎을 꿇고 그녀와 눈높이를 맞췄다.

그러곤 황홀함이 담긴 눈으로 봄볕이 내려앉은 레베카의 얼굴을 샅샅이 훑었다.

레베카는 그런 제플린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내가 사랑했던 눈빛…….’

잠시 가슴이 선뜩하게 일렁거렸다.

이미 제플린의 손에 그녀의 마음은 산산조각 났다. 하지만 아득한 저편에 남은 파편들이 그녀를 사정없이 찌르고 있었다.

제플린은 레베카의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며 말했다.

“여기에 타기만 하면 당신은 자유야. 저택 어디든 갈 수 있다고.”

‘자유라고?’

그 한마디에 레베카는 몇 초라도 빠질 뻔했던 감상에서 빠져나왔다.

그는 변하지 않았다. 변하지도 않을 것이다.

수백 번을 회귀한다고 하더라도 그와의 끝은 파멸뿐이란 걸 순간 깨달았다.

레베카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이제 남은 감정의 찌꺼기마저 부서진 모래알처럼 허공으로 흩어졌다.

한겨울의 서리가 내린 얼굴로 레베카가 말했다.

“당신은, 정말 내가 행복해 보여?”

레베카의 푸른색 눈동자가 단단한 빙해처럼 싸늘하게 식었다.

제플린은 그런 그녀의 얼굴을 잘못 보았나 싶어 눈가를 문질렀다.

다행스럽게도 제플린이 손에서 눈을 뗐을 때 레베카는 다시 온화한 백작 부인으로 돌아와 있었다.

‘방금…….’

“백작님!”

그때 하인 한 명이 허겁지겁 뛰어왔다.

제플린은 오랜만에 가진 레베카와의 시간을 방해받아 잔뜩 짜증 난 얼굴로 되물었다.

“무슨 일이야?”

제플린의 험악한 표정을 보고 하인은 잠시 흠칫하더니 말을 이어갔다.

“파, 파비올라 부인께서 오셨습니다.”

“타이밍 한번 거지 같군. 레베카, 이만 들어가자. 마주쳐서 좋을 거 없어.”

레베카는 잠시 생각하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이런 좋은 선물을 받았는데 아내의 도리를 해야지요. 어머님을 보러 가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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