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망친 백작 부인이 돌아왔다-25화 (25/232)

25.

‘네 배 속에 있는 작은 비밀을 잘 지켜야지. 네 유일한 재산이잖니.’

알리시아는 손톱을 잘근잘근 씹어대며 레베카가 했던 말을 떠올리고 있었다.

‘대체 뭘 알고 그러는 거지? 설마…….’

불안감이 스멀스멀 올라왔지만 알리시아는 애써 떨쳐냈다.

‘말도 안 돼. 그 여자가 알 리가 없어.’

알리시아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화장대에 앞에 앉아 얼굴을 이리저리 살폈다.

‘피부가 푸석해졌어.’

빛의 전당에 갔다 온 뒤로 매일 밤 악몽을 꾸는 탓이었다. 알리시아는 두 번 다시 그곳에 가고 싶지 않았다.

아이만 가지면 모든 게 잘될 거라 생각했다.

레베카의 그 자리도, 제플린의 애정도 전부 제 것이 되리라 여겼다.

하지만 뜻대로 되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레베카는 여전히 제 자리를 지키고 있었고, 어쩐지 제플린은 점점 더 레베카에게 집착하는 것 같았다.

알리시아는 초조해졌다. 이러다간 아이를 낳고 나면 아이만 빼앗기고 쫓겨날까 두려웠다.

그러면 다시 그 진흙탕 같은 생활로 돌아가야 했다.

그럴 바엔 죽고 말 테다.

그녀는 입술을 앙다물었다.

“치장을 도와드리겠습니다.”

하녀들이 달려들어 알리시아를 꾸미기 시작했다.

“잠깐.”

하녀 한 명이 장미꽃이 그려진 화장수를 들자 알리시아가 그녀를 저지했다. 그리고 백조가 새겨진 화장수를 가리켰다.

“이걸로 해. 이게 레베카가 바르는 거 맞지?”

알리시아의 말에 하녀가 잠시 멈칫했다.

하녀의 얼굴 위로 복잡한 표정이 떠올랐으나 그건 찰나의 순간일 뿐이었다.

하녀는 다시 원래의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와 알리시아가 가리킨 화장수를 그녀의 얼굴에 바르기 시작했다.

알리시아는 거울 속에서 점점 더 화려하게 변해가는 제 모습을 빤히 바라보았다.

태어나서 지금만큼이나 자신이 낯설게 보였던 적은 없었다.

하지만 싫지 않았다.

알리시아는 더더욱 원래의 제 모습을 버리고 싶은 욕망에 시달렸다.

그녀는 틀어 올린 연보라색 머리칼을 차갑게 바라봤다.

‘나한테도 금발이 어울리려나…….’

* * *

칸나가 레베카의 휠체어를 밀고 라벤더 정원으로 향했다.

정원에는 이미 알리시아와 파비올라가 도착해 있었다.

“차가 따뜻하지 않구나. 다시 따라주겠니?”

파비올라는 방금 따른 찻잔의 차를 바닥에 다 쏟아버리고 알리시아의 앞으로 내밀었다.

알리시아는 매섭게 눈을 치켜뜨고 파비올라의 찻잔에 차를 다시 부었다.

“아! 이번에는 너무 뜨겁잖니!”

“그러세요?”

짜악-

알리시아가 코웃음을 치더니 찻물을 가지고 왔던 하녀의 뺨을 내리쳤다. 하녀의 뺨이 붉게 물들었다.

파비올라가 깜짝 놀라 알리시아에게 소리쳤다.

“너! 이게 무슨 짓이야!”

“계속해서 물 온도가 너무 뜨겁다, 차갑다, 차향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하셨잖아요. 그럼 차와 물을 가져온 이 아이 잘못이 아니겠어요? 주인을 잘못 모셨는데 벌을 받아야지요.”

“어떻게 배 속에 귀한 씨를 품고 그런 악독한 짓을 해! 역시 근본이 천하니 행동도 천하구나.”

파비올라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알리시아도 그에 질세라 턱을 치켜들었다.

“예. 그럼 어머님은 얼마나 잘나신 혈통이시기에 그 귀하신 아드님의 인사 한번 받지 못하세요? 참 변한 게 없네요, 당신은.”

이전에 레베카의 하녀였을 때부터 알리시아는 파비올라의 만행을 쭉 지켜봐 왔다.

그러니 제가 파비올라에게 무슨 짓을 한들 제플린이 파비올라의 편을 들어주지 않을 것도 알고 있었다.

레베카는 그 상황을 잠시 흥미롭게 쳐다봤다. 파비올라가 제플린을 제외한 다른 이에게 당하는 것을 처음 본 탓이었다.

하지만 말싸움이 길어질 것 같자 끼어들기로 했다.

“어머님, 안녕하셨어요.”

우아한 목소리에 파비올라와 알리시아가 고개를 돌렸다.

파비올라는 레베카의 속눈썹 하나하나까지 샅샅이 훑어내렸다.

혹여나 레베카의 뽀얀 얼굴 위에 주름이 생기지는 않았는가 하고 찾는 눈빛이었다.

그리고 알리시아는 레베카가 앉아 있는 호화로운 휠체어를 말없이 노려보았다.

탐색이 끝났는지 파비올라가 얼굴에 만연한 미소를 띠며 양팔을 활짝 벌렸다.

“어머, 레베카, 다쳤다더니 정말이구나.”

“네. 하지만 괜찮아요. 큰 상처는 아니니까요. 그나저나 무슨 일이세요. 아까 언성이 높아지던데.”

“아, 아무것도 아니란다. 그저 예의를 가르쳐 주고 있을 뿐이지.”

“그런가요? 알리시아, 어머님께 함부로 굴지 않는 게 좋겠어요. 어찌 됐든 저희 남편의 어머니시니까요.”

레베카는 짐짓 파비올라의 편을 드는 척했다.

알리시아는 레베카를 잠시 흘겨보다가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파비올라가 레베카의 휠체어를 호기심 어린 눈으로 힐긋거렸다.

“그건 처음 보는 형태의 휠체어구나. 예쁘기도 하지. 어디서 났니?”

“그이가 줬어요. 제플린은 뭐든지 아름다워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잖아요.”

그 말에 파비올라는 잠시 움찔했다.

문득 죽은 남편이 스쳐 지나갔다. 그녀의 입꼬리가 뻣뻣하게 굳었다.

제플린은 제 아버지를 지독히도 싫어했지만 그만큼 닮은 구석 또한 많았다.

파비올라는 낯빛을 다시 고치고 미소를 머금었다. 그리고 알리시아를 향해 물었다.

“그래. 그나저나 알리시아, 너 교양 공부는 하고 있는 거니? 사교계에 나가려면 배워야 할 게 꽤 많을 텐데. 어디 가서 우리 아들 이름에 먹칠이라도 하면 안 되잖니.”

레베카는 멈칫하고 파비올라를 바라보았다.

원래라면 레베카의 자그마한 말 한마디까지 꼬투리를 잡아서 따져들 차례였다.

그런데 오늘 파비올라는 딱히 그녀에게 별 관심이 없다는 듯이 굴고 있었다.

‘아, 목적이 바뀌었지.’

레베카는 알리시아의 배를 예의주시하고 있는 파비올라의 시선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녀는 오늘 확인을 하러 온 것이었다.

제플린의 사랑이 레베카와 알리시아 중 누구에게 더 기울었는지.

제플린이 알리시아에게 관심을 더 쏟는다면 그녀의 기를 죽일 셈이었다.

그래서 아들이 저를 버리도록 감히 조언할 수 없게 잘근잘근 밟아줄 요량이었다.

‘아무리 아들이 너를 좋아해도 친부모를 버리겠어? 레베카, 나는 친구가 아주 많아. 내가 그들한테 나쁜 평판을 살짝 흘리기만 해도 너는 삽시간에 사교계에서 매장될 거야. 남한테 보이는 걸 중시하는 내 아들이 그런 너를 가만히 두겠니? 그러니까 허튼 수작 하지 마. 만만하게 보지 말라고.’

레베카는 과거 그녀가 자신에게 했던 말을 떠올리며 알리시아에게 쉼 없이 휘두르는 파비올라의 날카로운 혀를 노려봤다.

‘어머, 바닥에 케이크가 떨어졌네. 내가 직접 구워 온 건데, 이렇게 떨어트리면 어떡하니. 부모 공경을 이따위로 하다니 레베카, 너 정말 버릇이 없구나. 뭐해? 떨어진 걸 핥아먹지 않고.’

그리고 제플린에게 물려줬을 그녀의 우아한 금발 머리를 바라봤다.

그녀의 물빛 눈동자는 어떻게 하면 알리시아를 더 괴롭힐까 궁리하며 쉴 새 없이 굴러가고 있었다.

하지만 알리시아는 그리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제 교양은 제가 챙기니 참견하지 마세요. 어머니야말로 교양을 챙기시는 게 어떠세요? 밤마다 여는 파티가 아주 문란하다고 소문이 났더라고요. 평민인 제 귀에도 들어올 만큼.”

“무, 문란?”

“네. 젊은 남자들만 초대된다면서요? 그것도 가난하고 아름다운 미색의 귀족 청년들만요. 과연 그 고상한 문 뒤에서 무슨 일을 벌이시는 걸까요? 돈다발을 흔들면서 뭘 하실지 상상이 가는데. 저도 한번 초대해 주세요. 평민인 제 교양에도 아주 딱 맞을 파티일 것 같아서요.”

“너, 너!”

파비올라가 손을 부들거렸다.

레베카는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걸 막으려고 차를 한 모금 홀짝였다.

‘이 맛은…….’

차 끝에 살짝 특이한 향이 감돌았다. 씁쓸하면서도 이국적인 향이었다.

레베카는 자신이 차를 마시는 걸 슬쩍 곁눈질하는 파비올라를 발견하고 얼굴을 굳혔다.

파비올라는 화를 가라앉히고 입가에 다시 미소를 띠었다.

“이번 한 번만 넘어가도록 하지. 이렇게 좋은 날 서로 얼굴 붉혀서 좋을 건 없으니까. 알리시아, 너도 한 모금 하려무나.”

파비올라의 말에 하녀가 알리시아의 찻잔에 차를 부었다.

보아하니 파비올라가 여태껏 괴롭힌 탓에 아직 입을 축이지도 못한 모양이었다.

알리시아가 찻잔에 손을 대는 걸 보고 레베카는 다급하게 식탁보를 당겼다.

“꺄악!”

뜨거운 찻물이 알리시아의 드레스에 그대로 엎어졌다. 손을 데었는지 알리시아는 빨갛게 부어오른 손등을 부여잡았다.

“세상에! 알리시아, 미안해요!”

“레베카! 일부러 그러신 거죠?!”

“제가 왜 그런 짓을 하겠어요. 그나저나 화상은 흉터가 오래간대요. 얼른 가보세요.”

흉터란 말에 알리시아는 하얗게 질렸다. 그러더니 하녀를 대동해 서둘러 자리를 떴다.

알리시아가 저택으로 사라진 뒤 파비올라는 레베카를 의구스럽게 쳐다봤다.

그러자 레베카가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예상하신 대로예요.”

“내가 뭘 예상했다는 거니?”

“알리시아가 얄미워서 차를 쏟았어요.”

파비올라가 눈을 크게 떴다.

“네, 네가 지금 질투를 했다는 말이니?”

레베카는 길게 한숨을 내쉬고는 처량하게 눈을 파르르 떨었다.

“하아. 맞아요. 알리시아는 저보다 예쁘고, 아이까지 가지고 있잖아요. 제플린이 알리시아를 더 사랑하는 거면 저 어떡하죠?”

파비올라는 어안이 벙벙했다.

제가 갖은 수를 써서 들볶아도 레베카는 감정을 드러내는 일 없이 당하고만 있는 아이였다.

언제나 가녀린 한 떨기 장미꽃처럼 고개만 주억거렸다. 그러면 파비올라는 더욱더 약이 올랐다.

저를 악독한 시어머니처럼 보이게 하는 레베카의 행동이 가증스러웠다.

파비올라는 제플린이 그런 레베카의 가식적인 눈빛에 넘어가 자신을 내쫓았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사랑해 마지않는 아들이 자신에게 이렇게 대할 이유는 없지 않는가.

폭력적이던 남편과 달리 자신은 제플린에게 사랑을 쏟으며 키웠다고 그녀는 자부했다.

하지만 레베카가 지금 그 가식적인 가면을 던져버리고 질투심을 뿜어내고 있었다.

연적에게 뜨거운 차를 쏟다니, 눈앞에서 보고도 파비올라는 믿지 못했다.

‘뭘 꾸미고 있는 게 아닐까?’

파비올라는 잠시 스쳐가듯이 레베카의 의중을 의심했다.

하지만 곧 젖어드는 레베카의 눈망울을 보고는 작은 의심마저 거두어 들었다.

‘그래, 꼴에 저도 여자니까 남편이 다른 여자를 들인 것에 화가 날 수밖에 없겠지.’

파비올라는 처음으로 레베카가 가엾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킴도 수많은 정부를 두었지만 그렇다고 정식으로 두 번째 부인을 들인 적은 없었다.

‘따져보니 나보다 더 불쌍한 인생이구나.’

그리고 레베카에게 동정심이 피어올랐다.

파비올라는 그 감정이 마음에 들어 다정히 레베카의 손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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