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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친 백작 부인이 돌아왔다-26화 (26/232)

26.

“가엾은 것. 남자들이 다 그런 거 아니겠니. 우리가 이해해 줘야지 어쩌겠어. 하지만 걱정 마라. 진짜 백작 부인은 너 하나뿐이야. 그건 내가 장담하마.”

레베카는 제 손을 잡은 파비올라의 축축한 손이 불쾌해서 미간을 모았다.

하지만 이내 무해한 표정을 지었다.

“어머니가 그런 말씀을 하시니 조금 마음이 놓이네요. 그나저나 이 차는 뭔가요? 마시니까 마음이 편해지는 게, 어머니께서 가져오신 거죠?”

레베카가 차 이야기를 꺼내자 파비올라가 반색을 하며 말했다.

“그렇지? 내가 특별히 배합한 차야. 마음에 든다면 조금 챙겨줄까? 아직 많이 있단다.”

레베카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이왕이면 많이 주세요.”

* * *

방에 홀로 남은 레베카는 파비올라에게서 받은 차가 담긴 유리병을 만지작거렸다.

파비올라는 친절하게도 차향을 더 잘 내는 법까지 쪽지에 적어 주었다.

레베카는 피식 웃으며 쪽지를 보다가 고이 접었다.

그리고 유리병과 함께 서랍장에 잘 넣어두었다.

‘이걸 사용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지만…….’

온몸이 뻐근했다. 아무래도 오늘 낮에 신경을 바싹 쓴 탓이었다.

레베카는 어깨를 두드리며 침대로 향했다.

그러다 창문가에 서 있는 레오를 발견했다.

“레오!”

얼른 창문을 열어주자 레오는 기다렸다는 듯 방 안으로 들어왔다.

상단 일이 궁금하던 참이었기에 레베카는 기뻐하며 분주하게 움직였다.

“혹시 네가 올까 봐 우유를 준비해뒀는데 잘됐구나. 칸나가 그러는데, 고양이들이 좋아하는 우유라고 했어. 네 마음에 들면 좋겠는데.”

레베카는 작은 접시에 우유를 담아 들고 몸을 돌렸다. 그리고 너무 놀라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레…… 베카?”

눈이 반쯤 풀린 율리안이 레베카 앞에 서 있었다.

* * *

< 오빠! 생일 축하해. >

삐뚤빼뚤한 글씨로 쓴 생일 카드를 율리안은 한참이나 쳐다봤다.

그렇게 생일을 싫어한다고 말했건만 릴리는 지치지도 않고 매년 그의 생일을 챙겼다.

크로아가 조심스럽게 율리안에게 말했다.

“이번에도 선물을 돌려보낼까요?”

선물은 직접 그린 그림이었다.

릴리와 율리안이 고양이들과 함께 소풍을 즐기는 평화로운 한때가 그려져 있었다.

보통이라면 보지도 않고 돌려보냈겠지만, 이번에는 왠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이게 다 레베카 그 여자가 쓸데없는 희망을 준 탓이었다.

지나친 희망은 독이 되는 법이었다. 율리안은 그걸 알면서도 자꾸만 변하려는 제 마음을 통제할 수 없었다.

“됐어. 이만 나가봐.”

크로아는 속으로 좋아서 날뛰었다.

그는 율리안의 생일마다 릴리에게 오라버님이 선물을 돌려보냈다는 말을 전하는 게 고역이었다.

‘그랬구나…….’

귀여운 소녀가 눈물을 글썽이며 푹 얼굴을 숙이는 걸 보면 항상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크로아는 이 기쁜 소식을 얼른 릴리에게 전하고 싶어 빠르게 문을 나섰다.

릴리의 유모가 방 앞에서 서성이고 있다가 크로아를 잡고 물었다.

“어떻게 됐어요?”

“공작님께서 선물을 받으셨습니다!”

“아, 역시 이번에도……, 예에? 정말인가요?”

“네! 꽤 마음에 드셨나 봐요. 소중히 다시 포장까지 하시던 걸요.”

“어머, 세상에나. 릴리 아가씨가 들으면 정말 기뻐하시겠어요.”

“그러게나 말입니다. 그런데 대체 무슨 바람이 들었기에 마음을 돌리셨지?”

“이제 좀 릴리 아가씨께 미안한 마음이 드신 게 아닐까요? 생일날마다 이렇게 초상집 분위기니, 원…….”

“어쨌든 공작님 마음이 바뀌시기 전에 얼른 갑시다.”

레오는 구석에서 그들의 대화를 잠시 듣고 있다가 율리안의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술병 여러 개가 발치에서 나뒹구는 모습을 보고 한숨을 쉬었다.

“아, 레오. 어서 와. 너도 한잔할래? 아, 너 아무것도 안 먹지? 내 신성력 말고는. 미안, 이렇게 맛있는 걸 너한테도 먹여주고 싶은데 말이지.”

‘완전 맛이 갔군. 생일마다 청승 좀 그만 떨어.’

“청승이라니. 서운한데? 너는 내 마음을 이해해 줘야 할 거 아니야. 날 위로해 줘야지. 내 영혼의 짝.”

레오는 물끄러미 술주정하는 율리안을 바라봤다.

당연히 그의 마음은 이해가 됐다. 알기 싫어도 저절로 그렇게 됐다.

율리안이 자신의 운명을 깨달았을 때부터 커다란 돌덩이가 항상 가슴을 짓누르는 느낌을 받고는 했다.

그리고 그건 생일날이 되면 더 무거워졌다.

후손을 낳기 위해 태어난 아이.

그리고 그 아이들이 죽어가는 걸 영원히 지켜봐야 할 불멸의 존재.

신이란 참 잔인했다.

레오는 역대 모든 요하네스 공작이 태어났다가 죽는 모습을 전부 지켜봤다. 모두 저마다 비극적인 삶을 살다 갔다.

죽어가는 요하네스 공작을 보며 레오는 자신이 그들의 삶으로 연명하는 기생충 같다는 생각을 떨쳐낼 수 없었다.

그들이 레오를 대하는 태도도 별반 다를 게 없었다. 두려워하거나 버러지를 보듯 혐오하거나, 둘 중 하나였다.

하지만 율리안은 달랐다.

‘너도 참 불쌍한 인생이다.’

그는 제 운명을 혐오하면서도 그 죄를 레오에게 묻지 않았다.

레오의 복잡한 머릿속으로 율리안의 비틀거리는 목소리가 비집고 들어왔다.

“레오. 만약 저주가 풀린다면 나는 뭐가 되지? 내가 누리고 있는 것 중에는 내 손으로 일군 건 아무것도 없어. 신성한 요하네스 공작이 아니라면 난 뭐지?”

레오는 허탈하게 웃는 율리안을 흘깃 바라봤다. 그가 지금 느끼는 끔찍한 감정의 굴레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리고 계속해서 일렁이는 어떤 사람의 잔상도.

‘생일 선물이다. 꼬맹아.’

레오는 밤공기가 들어오는 창문으로 훌쩍 뛰어올랐다. 그리고 슬며시 방을 빠져나갔다.

* * *

“율리안! 당신이 여긴 어떻게!”

잠시 상황을 파악하려는 듯 율리안은 눈을 천천히 껌뻑거렸다.

레베카가 그의 팔을 잡았다. 율리안은 그녀의 온기에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섰다.

“레, 레베…….”

율리안이 소리를 지르려고 하자 레베카가 냉큼 손으로 그의 입을 막았다.

둘 사이엔 잠시 침묵이 흘렀다.

다행히 문밖에선 아무런 인기척도 나지 않았다.

레베카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속삭이듯 말했다.

“이 야밤에 여긴 어떻게 왔어요? 그보다도 방금 레오가 있었는데…….”

“레오가 있었다고?”

술이 확 깨버린 율리안이 잠시 무언가 생각하더니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하. 그렇게 된 거군. 레오 이 자식이…….”

“일단 조용히 있어요. 누가 오면 어떡하려고 그래요?”

“알았어. 그나저나 저건 뭐지?”

율리안은 탁자 위에 올려둔 접시를 보고 말했다.

“우유예요. 레오에게 줄까 하고 둔 건데.”

“아, 이제 좀 살 것 같군.”

레베카의 대답을 채 듣지도 않고 율리안은 접시에 담긴 우유를 꿀꺽꿀꺽 삼켰다.

요동치는 목울대를 보며 레베카는 할 말을 잃었다.

“왜? 레오가 먹을 거라며. 내가 먹는 게 곧 레오가 먹는 거야.”

“뭐, 그건 그렇다고 칠게요, 정말 여기에 어떻게 온 건가요?”

“아, 우리의 전능하신 레베카 님께선 그것까지는 모르시나 보군.”

“비꼬는 거예요, 지금?”

레베카가 눈을 치켜뜨자 율리안은 잠시 주춤했다.

그는 한숨을 내쉬며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런 거 아니야. 하, 나는 왜 자꾸 그런 식으로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

‘취한 건가?’

아니면 원래 수다스러웠던 건지 줄줄이 변명을 늘어놓는 율리안이 낯설어 레베카는 그를 빤히 쳐다봤다.

“뭐야. 그 버릇없는 꼬맹이 보듯이 하는 눈은. 하긴 당신 눈에는 내가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군.”

레베카는 살포시 율리안의 옆에 앉았다. 율리안의 덩치가 커서인지 둘이 앉으니 침대가 꽉 찼다.

“왜 그렇게 생각해요. 그냥 쳐다본 건데.”

“다들 그런 눈으로 바라보니까. 뭐, 예의범절을 모르는 건 아니야. 쓸 필요가 없다는 걸 배운 거지. 그래서 존댓말이나 그런 게 힘들어. 예의를 차리려면 미친 듯이 노력해야 해.”

‘근데 그걸 왜 이 한밤에 내 방에 들어와서 말하고 있는 걸까.’

레베카는 피곤이 몰려와서 당장이라도 그를 내쫓고 싶었다.

그러나 어쩐지 그가 외로워 보여 잠자코 그의 투정 어린 말을 들어주고 있었다.

“그러니까 요점은, 당신도 나한테 그렇게 하라는 거야.”

“네?”

“그냥 반말하라고. 어차피 부부가 될 사이인데 좀 편하게 지내야 하지 않겠어? 나는 부인에 대한 존중 이딴 거 잘 모르니까.”

“그래. 그러지, 뭐.”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레베카가 말했다.

회귀 전, 평민들과 섞여 살 때는 나이에 따라 호칭을 달리해서 썼다. 그러니 레베카는 이편이 더 편했다.

율리안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배를 잡고 웃었다.

레베카가 의아한 눈으로 그를 쳐다봤다.

“당신이 하라며. 근데 왜 그렇게 웃어? 지금이라도 존대를 할까?”

“그냥, 일반적인 반응과는 좀 많이 달라서. 보통 날뛰거나 거절하거나 그러지 않아?”

“그러길 원해?”

“아니. 당신은 역시 흥미로워.”

“자꾸 말 돌리지 말고. 대체 어떻게 이 방에 들어 온 거야? 레오는 어디 갔고?”

“우린 서로 몸을 바꿀 수가 있어.”

레베카는 소리 없이 비명을 지르며 입을 틀어막았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당신이 레오란 말이야?”

율리안은 그런 그녀의 모습이 귀여워서 자꾸만 웃음이 삐져나왔다.

그는 광대를 잠시 씰룩이다 말했다.

“그게 아니라, 서로 있는 장소를 바꿀 수 있다고. 일종의 공간이동이라고 해두지.”

“신기하네.”

“아까보다 반응이 덜 격한데. 안 놀라워? 이걸 아는 사람은 나와 레오 둘밖에 없다고.”

“세상 살다 보면 별일이 다 생기는 법이니까.”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는데, 공간이동쯤이야 놀랍지도 않았다.

표정 하나 변하지 않는 레베카를 율리안이 지그시 바라봤다.

“당신은 가끔 인생을 한 번 더 산 사람 같아.”

그의 말에 조금 찔린 레베카가 얼른 말을 돌렸다.

“공간을 마음대로 이동할 수 있다면 당장 집으로 돌아가. 여긴 너무 위험해.”

“그게 좀 곤란해.”

“왜?”

“공간이동은 신성력을 많이 잡아먹어. 회복하려면 적어도 세 시간은 기다려야 해.”

“세 시간이나?”

레베카는 곤란하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그 모습을 보던 율리안이 빙그레 웃었다. 사실 삼십 분이면 능력을 다시 쓸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다시 그 외로운 방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적어도 오늘이 지날 때까지만이라도 레베카의 일렁이는 파도 같은 눈동자를 바라보고 싶었다.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율리안은 당황스러웠다.

그에게 낯선 곳은 이곳이었다. 그것도 그가 혐오해 마지않는 데본셔 백작의 저택.

하지만 어째서인지 그는 지금 어느 때보다 더 마음이 편했다.

어두컴컴한 방 안에 달빛이 환히 비춰들었다.

율리안은 달빛에 반사되는 레베카의 하얀 얼굴을 가슴에 새길 듯이 뚫어지게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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