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망친 백작 부인이 돌아왔다-27화 (27/232)

27.

레베카가 한숨을 폭 내쉬고 말했다.

“하아. 어쩔 수 없지. 대신 세 시간이 지나면 바로 돌아가는 걸로 해.”

“그러지.”

“뭐, 잘됐네. 상단 일이 슬슬 궁금해지던 참이었거든.”

“아, 상단. 만들어놨어. 당신이 말했던 상단주도 구했고. 그리고 혹시 몰라서 상단주에게 당신 정체는 말하지 않았어.”

“고마워. 생각보다 세심하게 준비해 줬네.”

레베카의 칭찬에 율리안은 조금 들뜬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상단 건물은 어디에 뒀으면 좋겠어?”

“리베르타 구휼원 근처에 있는 시장. 거기면 좋겠네.”

“시장? 거기는 대부분 허름한 건물만 있을 텐데.”

“괜찮아. 그 근처에서 겸사겸사 할 일이 많아서 말이야.”

“그래. 내일 당장 마련해둘게.”

율리안은 그게 밥 먹는 일인 듯 쉽게 말했다.

레베카는 이전 생에서 작은 집 하나를 마련하기 위해 얼마나 고되게 일했는지 떠올렸다.

그것도 마가렛이 말도 안 되는 가격으로 싸게 내준 집이라 가능한 일이었다.

입 안이 쓰게 느껴졌다.

그리고 새삼 제가 뒷배로 선택한 인물이 얼마나 거물인지 느껴졌다.

레베카가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나저나 연락하는 게 어려워서 큰일이네. 편지 정도야 주고받을 수 있겠지만 꼭 내가 나서야 하는 일이 있으면 힘들어.”

“아예 밖에 나가지 못하는 건가……?”

“대부분. 특히 지금처럼 환자인 척할 때는 더더욱.”

그제야 율리안은 레베카의 몰골을 봤다.

율리안은 그녀의 다리에 붕대가 칭칭 감아져 있는 걸 보고 팽팽하게 경직돼서 물었다.

“당신, 다친 거야? 얼마나? 진작에 말했어야지! 어쩌다가, 아니 어떤 놈이…….”

“쉬잇. 흥분하지 마. 아까 말했지, 다친 척한 거라고. 그래도 아예 다치지 않은 건 아니야. 계단에서 굴렀거든. 물론 내 자의로.”

“왜 그런 짓까지 한 거야? 대체 왜!”

“그래야 자유의 몸이 된다고 말하면 이해하려나.”

레베카가 묘한 미소를 지으며 턱을 괴었다.

“아픈 인형은 회복될 때까지 내버려 둬야 하니까. 다시 재미있게 가지고 놀려면 말이야. 그리고 주인이 내버려두는 동안만큼은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지.”

나지막하게 속살대는 그녀의 말이 율리안의 가슴을 휘저었다.

그는 분노를 묻어둔 눈빛으로 물었다.

“뭘 해주면 돼.”

“응?”

“한 달 안으로 당신이 이혼하려면.”

“한 달이라. 그건 좀 힘들걸. 일단 상단으로 돈도 좀 모아야 하고. 무엇보다 악마의 발톱이 자라려면 시간이 좀 걸릴 거야.”

“그럼 두 달.”

“글쎄, 확답은 할 수 없어.”

“상관없어. 내가 당신이 이혼하는 걸 바라니까. 잊었어? 행운은 내 편이야.”

율리안의 당당한 태도에 레베카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래? 그럼 제플린이 저택에 발을 붙일 수 없을 만큼 바빠질 일을 벌여주든가. 그럼 나도 마음대로 나다닐 수 있겠지.”

레베카가 웃으며 농담조로 말하자 율리안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녀는 의아한 눈으로 무언가를 중얼거리는 율리안을 빤히 쳐다봤다. 그의 태도는 뭔가 이상했다.

이건 어디까지나 계약이었다.

그가 충실히 계약을 이행할 것이라는 건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열을 낼 필요는 없지 않은가.

어차피 계약이 끝나면 서로 다시는 보지 않을 사이였다. 그런데 그는 진심으로 그녀를 도우려고 하고 있었다.

‘역시 착하네.’

그는 분명 자신을 가엽게 여긴 게 틀림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렇게 슬픈 눈으로 자신을 바라볼 이유가 없었다.

레베카는 율리안의 그 연민이 고마워졌다.

레베카가 찬연한 달빛이 비치고 있는 그의 황금빛 눈을 바라보았다. 꼭 달과 태양이 함께 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그의 까만 머리를 쓰다듬었다.

율리안은 잠시 움찔했지만, 가만히 레베카의 손길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어쨌거나 신경 써줘서 고마워, 율리안.”

나지막하고 살가운 음성에 율리안은 눈을 크게 떴다.

순간 그의 심장께에서 저릿한 통증이 느껴졌다.

그 탓에 율리안은 제 머리를 쓰다듬는 레베카의 손을 덥석 잡았다.

레베카의 눈동자가 요동쳤다.

율리안의 눈빛이 점점 강렬해지는 게 느껴졌다. 그의 입술 또한 달큰한 숨을 내뿜으며 달싹이고 있었다.

밤과 달빛. 그리고 침실에 있는 두 남녀.

‘아, 이 분위기 위험한데.’

레베카는 당혹스러웠다.

율리안이 혈기 왕성한 청년이란 걸 잠시 잊고선 이런 추태를 벌였다.

이래서야 자신이 노골적으로 그를 유혹한 거나 다름없었다.

레베카는 서둘러 그의 손을 뿌리쳤다.

“미안. 이건 전적으로 내 잘못이야.”

율리안은 거절당한 제 손을 멀거니 바라봤다.

레베카가 빠르게 말을 이었다.

“다시는 이런 일 없을 거야. 그럼 계약 위반이니까.”

손끝 하나 건드리지 않겠다고 약속해 놓고, 이혼 서류에 사인을 하기도 전에 이런 행동을 했다니 수치스러웠다.

‘그러니까 왜 그렇게 눈을 예쁘게 떠가지곤.’

레베카는 자신이 이렇게도 외모에 약했나 하고 헛웃음을 지었다.

율리안은 계약이라는 말에 퍼뜩 이성을 찾았다.

그의 황금빛 눈이 차차 검은색으로 물들어 갔다.

율리안은 다시 굳은 말투로 돌아와 말했다.

“맞아. 우린 계약 관계였지. 그러니까 서둘러 일을 마무리했으면 좋겠군.”

율리안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갑자기 일어나서 그런지 그는 약간 휘청였다.

“뭐, 대충 이야기가 마무리된 것 같으니 이만 가보지.”

“잠깐, 아직 시간이…….”

레베카가 미처 소리치기도 전에 율리안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리고 그 자리엔…….

애옹?

레오가 뒷발을 든 채 그루밍을 하다 만 자세로 얼어 있었다.

레오는 잠시 사태 파악을 하더니 이내 불쾌한 듯 눈을 가늘게 떴다.

“벌써 세 시간이나 지난 건가……?”

레베카는 어리둥절한 눈으로 레오를 들어 올렸다.

레오는 심기 불편한 기색으로 꼬리를 부풀렸지만 그녀의 품에서 벗어나지는 않았다.

“네 주인, 아니 동반자는 정말 이상하구나.”

레오를 창문가에 내려주면서 레베카는 사라지기 전의 율리안을 떠올렸다.

‘귀가 빨개져 있었지.’

그가 도망가듯이 왜 이곳을 벗어났는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동시에 죄책감도 들었다.

‘보기보단 순진한 구석이 있었네. 하긴 아직 애였지.’

회귀하기 전 나이까지 세어 본다면 레베카는 그보다 나이가 배는 더 많았다.

양심이 찌르르 울리기는 했지만 그녀의 입가에서 웃음이 가시지 않았다.

레베카는 창문에 기대어 유려한 몸짓으로 저택을 빠져나가는 레오의 뒷모습을 잠시간 바라보았다.

* * *

“하아. 하아.”

방 안으로 들어온 율리안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연속해서 공간이동을 한 탓에 현기증이 올라왔다.

침대에 털썩 누워 팔뚝으로 얼굴을 가렸다. 온몸에서 식은땀이 흘렸다.

율리안은 셔츠를 거세게 벗어 던졌다.

생각하고 싶지 않아도 방금 있었던 일이 자동 재생하듯 반복적으로 떠올랐다.

‘그리 생각해줘서 고마워, 율리안.’

그녀의 푸른 눈 안에 비치던 얼빠진 자신의 얼굴을 상기했다.

혹시 그녀를 볼 때마다 그런 표정을 짓는 건가?

하지만 그래도 레베카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게다가 그 이유를 몰라 미쳐버릴 지경이었다.

“윽.”

다시금 아까와 같은 가슴 통증이 느껴졌다.

간질거리면서도 쿡쿡 쑤시는, 전에 없던 통증이었다.

율리안은 덜컥 겁이 났다.

역대 요하네스 공작들의 사인은 대부분이 심장마비였다.

가지고 태어난 신성력이 다하면 심장이 멈춰버린다고 했다.

그 전조 증상으로 심장 통증이 있다고 했고.

‘설마, 아니야.’

율리안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침대 옆 탁자 위엔 크로아가 매일 올려두는 약이 놓여 있었다.

매번 코웃음 치며 복용하지 않았지만 오늘은 달랐다.

율리안은 단숨에 약을 입에 털어놓고 찬물을 들이켰다. 그리고 두 손으로 탁자를 짚고선 눈을 부릅떴다.

“죽을 수 없어. 아직은.”

* * *

“바지사장? 지금 나더러 바지사장을 하라고 공작님이 그러셨단 말이야?”

타니샤 체니스터가 책상을 쾅하고 내리쳤다.

크로아는 얼른 제 몫의 커피잔을 들었다.

“왜 그렇게 열을 내고 그래. 정확히 말하면 바지사장이 아니고 상단주라고. 공작님이 황당한 요구를 하신 게 한두 번이야?”

“내가 그 황당한 요구를 왜 참았는데! 분명히 내 이름을 내건 상단을 주겠다고 약조해서 그런 거잖아!”

“네 이름을 건 건 맞지. 사업자 등록도 네 이름으로 했는걸.”

“그럼 뭐해! 누군지도 모를 망할 작자의 꼭두각시놀음을 하는 건데.”

“야, 망할 작자라니. 말조심해. 그런 말 공작님 앞에서 했다간 경을 친다.”

“오빠는 왜 맨날 공작님 편이야! 가족이 나야, 공작이야?”

“당연히…….”

“당연히?”

“너지. 공작님이 누추하신 나와 가족이라니, 말도 안 되지.”

“그냥 나가 죽어!”

타니샤는 손에 잡히는 대로 크로아에게 던져대기 시작했다.

크로아는 한두 번 있는 일이 아니었다는 듯 날아오는 물건들을 요리조리 잘 피했다.

“네 주인이 아니라 사업 고문이라고 생각해. 그리고 이거 꽤 중요한 사안이야. 그니까 공작님이 너한테 맡기셨지.”

“내가 그동안 왜 그 개고생을 했는데! 몇 년 일찍 태어났단 이유로 오빠가 집사가 된 것도 열받아 죽겠는데, 이건 또 무슨 개 같은 경우야!”

“그 입! 입! 어떤 놈이 널 데려갈까 불쌍해 죽겠다.”

“왜 불쌍해? 완전 땡 잡았지. 외모 출중하지, 능력 좋지, 돈도 많지. 오빠야말로 태어나서 연애 한번 못해본 주제에.”

“……그 이야기는 하지 말자, 우리. 내가 잘못했다.”

정곡을 찔린 크로아는 전의를 잃고 시무룩하게 고개를 떨구었다.

“됐고! 그 사람 누구야?”

“누구?”

“내 상단의 주인이라는 사람. 아무래도 직접 만나야겠어.”

“가만히 좀 있어. 그냥 시키는 대로 하지 왜 자꾸 날뛰어.”

“무슨 현상 수배범이라도 되는 거야? 왜 이렇게 쉬쉬해. 직접 만나봐야 내가 주인으로 모실지, 아니면 그대로 때려치울지 결정을 할 거 아니야.”

“때, 때려치운다고? 타니샤, 체니스터가 요하네스 공작의 명을 거역하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누군 되고 싶어서 체니스터가 된 줄 알아? 여차하면 이런 구질구질한 거 다 버릴 수 있어. 까짓거 호적 파서 평민 하면 되지 그냥. 난 평민이 되어도 황제처럼 살 거야.”

“너, 그거 부모님 앞에서 말할 수 있어?”

“어쨌든 불어, 빨리. 안 그러면 너 저번에 레오 님 털 깎다가 땜빵 낸 거 다 일러 버린다.”

헙, 하고 크로아는 제 입을 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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