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원래 레오의 미용 담당은 따로 있었지만 결혼 휴가를 낸 탓에 크로아가 레오의 털을 잘랐다.
그리고 일은 순식간에 일어났다. 크로아가 잠시 한눈을 팔다가 일을 내버린 것이다.
크로아는 레오의 머리통의 손가락 두 마디만큼의 털을 밀어버렸다. 그리고 그대로 율리안의 뒤통수에도 땜통이 생겨 버렸다.
레오는 저 혼자 놀다가 그런 걸로 크로아의 잘못을 눈감아 주었지만 율리안은 달랐다.
범인을 색출해 내겠다고 난리를 치던 걸 레오가 겨우 달랬다.
크로아는 그때의 광기 어린 율리안의 표정을 되새기고는 몸서리를 쳤다.
“그, 그것만은 제발!”
“그럼 얼른 말해. 대체 그 수수께끼의 주인이 누구야?”
크로아는 울고 싶었다.
하지만 다시 생각을 고쳤다.
제 실수까지 알고 있는 타니샤라면 레베카의 정체를 밝히는 것도 시간문제였다.
차라리 지금 밝히고 후환을 없애는 게 낫지 않을까라고 결론을 내렸다.
“좋아, 잘 들어…….”
타니샤는 흐트러진 연한 갈색 머리를 다시 고쳐 묶으며 크로아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 * *
“기어코 황제가 나를 오라고 했다고?”
“예, 백작님의 안목이 꼭 필요한 일이라고…….”
엘윈 데본셔의 말에 제플린은 이마를 짚었다.
“당신 선에서 어떻게 해결이 안 됩니까?”
“매우 중대한 일이라 제 역량으로는 부족하다고 하셨습니다.”
“하아. 빌어먹을.”
제플린은 차가운 숨을 내뱉었다.
엘윈은 그의 눈치를 살피며 앞으로 모아쥔 손에 힘을 주었다.
엘윈은 데본셔가의 주요 사업인 예술품 유통업을 맡고 있었다.
제플린이 예술품을 지정해주면 무슨 일이 있더라도 구해 오는 게 그의 일이었다.
그는 제플린의 안목만큼은 인정했다.
그가 구해온 예술품을 마음에 들지 않아 하는 고객들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이번 의뢰는 뭔가 이상했다.
황실과의 거래는 종종 있었다. 그때마다 여느 때처럼 엘윈이 나서서 물건을 구해왔다.
황제도 그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을 터인데 어쩐지 이번에는 꼭 백작이 직접 작품을 구해오기를 고집했다.
“만들어진 작품이 아니고, 고작 작품 의뢰를 하는 것뿐인데도 내가 직접 가야 한다? 그것도 작품이 완성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돌아오라고?”
“작가의 정체가 외부로 새어 나가면 곤란하다고 거듭 강조하셨습니다. 백작님이 그런 면에선 일가견이 있지 않냐며…….”
“젠장! 그럼 말을 어떻게든 돌려서 거절했어야지! 감히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
제플린은 문진을 엘윈에게 집어던졌다. 단단한 에메랄드 문진이 엘윈의 이마를 정통으로 때렸다.
엘윈은 잠시 뒤로 넘어졌다가 이마를 문지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이마가 찢어져 피가 흐르고 있었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제플린의 분노가 더 두려운 듯 보였다.
제플린이 분을 삭이지 못하고 소리쳤다.
“지금 레베카가 아프단 말이야!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또 무슨 일이 있으면 어쩌려고!”
“죄, 죄송…….”
엘윈이 손으로 피를 훔쳐내며 고개를 숙였다.
그의 손에 잔뜩 묻은 피를 보며 제플린은 인상을 찌푸렸다.
“카펫에 피 흘리기 전에 당장 꺼지세요.”
“그, 그럼 이 건은…….”
“내가 해결한다니까. 그리고 당장 나가라는 말 못 들었어?”
엘윈은 몇 번 고개를 조아리곤 문을 열고 나갔다.
그의 몰골을 본 하녀들이 득달같이 달려와서 상처를 치료했다.
그를 걱정하기보다는 하나의 예술품에 가까운 이 저택에 피 한 방울이라도 묻을까 전전긍긍하는 태도였다.
엘윈은 치를 떨었다.
엄밀히 따지자면 엘윈은 제플린의 숙부였다. 조카에게 이런 수모를 당하고서도 그는 아무런 항의도 할 수 없었다.
그의 딸 샬럿이 제플린에게 납치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쓸데없는 짓 벌이지 말라고 했잖습니까. 샬럿은 제가 잘 키우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숙부님이 할 일만 잘하시면 샬럿이 다칠 일은 없을 테니까.’
엘윈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는 엘윈이 성과를 낼 때마다 포상을 주듯 샬럿의 사진과 검열된 편지를 보내주곤 했다. 다행히 사진 속 샬럿은 괜찮아 보였다.
그래도 매일 밤 속이 타들어 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샬럿……. 대체 어디에 있니.’
그는 힘없는 발걸음을 옮겼다. 설마 이번 일로 제플린이 샬럿에게 해코지하지는 않을까 염려되었다.
“숙부님, 안녕하셨어요?”
로비에 들어섰을 때 낭랑한 목소리가 엘윈을 반겼다.
엘윈은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하고 잠시 주춤했다.
“레베카?”
“어머, 이마는 어쩌다……. 아, 그이를 만나고 오셨군요.”
엘윈은 휠체어에 앉아 있는 그녀의 모습을 쳐다봤다.
제플린이 요새 심기가 유독 불편한 이유가 이제야 이해가 갔다.
“다쳤다고 들었는데 이 정도일 줄은…….”
“괜찮아요. 불치병도 아닌데요, 뭘. 그나저나 여기까지 오신 거면 꽤 급한 일이신가 봐요?”
“아, 그게…….”
엘윈은 레베카의 상냥한 말투에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하지만 곧 사방에서 쏟아지는 따가운 눈빛에 금방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의 손이 흥건한 땀으로 금방 축축해졌다. 이곳에만 오면 벽에도 눈이 달려 자신을 지켜보는 기분이 들었다.
그에게 있어 데본셔 백작저는 악마의 소굴이나 다름없었다.
레베카는 악마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보물이었고.
엘윈은 다급하게 말을 끊었다.
“아, 아니다. 내가 실언했어. 너는 신경 쓰지 말고 얼른 쉬거라.”
그리고 도망치듯 그 자리를 뛰쳐나왔다.
그의 뒤에 대고 레베카가 소리쳤다.
“숙모님께 안부 전해주세요!”
그녀의 말에 엘윈은 잠시 뒤를 돌아봤다.
레베카가 해사하게 웃으면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
엘윈은 잠시 얼이 빠져 그 모습을 보았다.
‘저 아이가 저렇게 밝았었나…….’
엘윈이 저택을 나가고 난 뒤 레베카는 칸나를 불렀다.
레베카는 엘윈이 나간 곳으로 고갯짓을 했다.
“무슨 일인지 조사해 줘.”
칸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 * *
“황제가 의뢰를 했다고?”
“네. 은밀한 건인지 자세한 내용은 모르겠고, 백작이 꽤 오래 집을 비워야 하는 일인 것 같습니다.”
“숙부가 왔으니 아마 예술 쪽 사업일 거야. 제플린이 직접 나서야 될 만한 일이 대체 뭐가 있지?”
고뇌하는 레베카에게 칸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너무 시기적절하다고 생각되지 않으십니까?”
“그러게. 너무 운이 좋아서 환호성을 지르고 싶은 기분이야.”
“불온한 움직임이 있었는지 한번 알아볼까요?”
“아니야. 누가 했는지 짐작 가는 데가 있어.”
레베카는 며칠 전 율리안과 만났던 일을 떠올렸다.
‘그래? 그럼 제플린이 저택에 발을 붙일 수 없을 만큼 바빠질 일을 벌여주든가. 그럼 나도 마음대로 나다닐 수 있겠지.’
레베카는 농담처럼 던진 자신의 말을 듣고 율리안이 곰곰이 생각에 빠졌던 걸 기억해냈다.
그리고 그 뒤에 떠오른 결연한 표정까지.
레베카는 그가 무슨 일을 저지를 것 같다는 생각은 했지만 황제까지 끌어들일지는 몰랐다.
여하튼 율리안은 제 나이에 비해 수완이 좋은 자였다.
레베카는 싱긋 웃으며 칸나에게 말했다.
“당분간 제플린이 많이 바빠지겠지?”
“아마도 그럴 것 같습니다.”
“잘됐네. 당분간 빠져나가기 쉽겠어.”
“그나저나 오는 길에 이런 쪽지를 받았습니다. 레베카 님께 꼭 전해달라고 하더군요.”
“나에게?”
레베카는 칸나가 건네는 쪽지를 받아 펼쳤다.
<바지사장입니다. 상단 사무실이 마련되었으니 편하실 때 들러주십시오.>
밑에는 짤막하게 주소도 적혀 있었다.
“칸나, 어떻게 너를 알았을까.”
“그게…… 저도 의문입니다. 제가 레베카 님의 수족인 걸 아는 자는 로버트밖에 없습니다.”
“함정이거나 능력이 좋은 사람이거나 둘 중 하나겠네.”
“가실…… 겁니까?”
레베카가 쪽지를 가볍게 톡톡 치면서 말했다.
“흠, 가야지. 그쪽에는 다른 볼일도 있고 말이야.”
“…….”
“왜 그런 표정을 지어.”
“무섭습니다. 저는.”
“뭐가 말이야?”
“이렇게 무모하게 행동하시다가 언젠가 다시 돌아오시지 않을까 봐.”
레베카는 축 처진 칸나의 눈썹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칸나는 레베카가 계단에서 몸을 던지던 날을 회상하고 있음에 틀림없었다.
레베카는 손을 뻗어 칸나의 두 뺨을 잡아들었다.
레베카의 손안에 든 그녀의 뺨이 금세 장밋빛으로 달아올랐다.
“칸나, 걱정 마. 난 절대 죽을 생각이 없어. 아니, 그 어느 때보다 살고 싶어.”
레베카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언젠가 죽는다 하더라도, 적어도 지금은 아니야.”
칸나는 이제 조금 안심이 되는 듯 희미하게 웃었다.
그래도 불안감은 가시지 않았다.
그녀는 어쩐지 레베카가 언젠가 저만 두고 죽어버릴 것 같다는 불길한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하지만 제 불길한 예감은 좀처럼 맞아떨어지는 일이 없었으므로 칸나는 조심스럽게 레베카의 온기를 만끽했다.
* * *
점심 식사 시간에는 적막이 흘렀다. 재잘거리던 알리시아가 입을 딱 다물고 음식에만 집중했던 탓이었다.
파비올라와 대적하던 그녀의 당찬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알리시아는 어느새 얌전한 부인으로 변해 있었다.
레베카는 그 광경을 퍽 충격적인 눈으로 바라보았다.
제플린이 알리시아를 교육하기 시작한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았다.
대체 빛의 전당에 뭐가 있기에 모든 사냥개가 그곳을 두려워하고, 기고만장한 알리시아가 저렇게 얌전히 변했을까.
제플린은 식사를 다 마친 듯 냅킨으로 입가를 닦으며 말했다.
“레베카, 당분간 집을 비울 것 같으니 무슨 일 있으면 하녀장에게 이르도록 해. 그리고 알리시아, 너도 사고 칠 생각이 있거든 단념하는 게 좋을 거야.”
제플린의 말에 알리시아는 사르르 웃었다. 그녀는 조금 부풀어 오른 자신의 배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네, 백작님. 저는 제 아이를 위해서 현숙한 아내가 되기로 결심했는 걸요.”
“역시 교육한 보람이 있군. 그래, 짐승도 가르치면 쓸 만하게 될 수 있는 법이지. 레베카, 당신도 내가 없는 동안 얌전히 있을 거지?”
짐승이란 말에 알리시아의 미간이 살짝 모아졌다.
하지만 곧 아무것도 못 들었다는 듯 알리시아는 손톱만 한 디저트를 입에 넣었다.
레베카는 우아하게 포크를 드는 알리시아의 손짓을 힐끔거리며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내가 밖에서 돈을 벌어 올 동안 내 사랑스러운 부인들은 뭘 하고 놀 거지?”
지금쯤 황제가 부른 일로 속에서 분이 터지고 있을 텐데도 제플린은 침착해 보였다.
레베카는 그런 그를 마음껏 비웃어주고 싶은 마음을 꾹 숨기고 입을 열었다.
더없이 아름다운 미소를 곁들이자 제플린의 표정이 녹아내리는 게 보였다.
“오늘 해가 강하지 않으니 후원에서 그림을 그려 보려고요. 무슨 그림이 나올지 기대하셔도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