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제플린을 입구까지 배웅한 레베카는 휠체어를 틀었다. 그리고 싸늘하게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알리시아와 눈을 마주쳤다.
“무슨 할 말이라도?”
레베카가 빙그레 웃자 알리시아는 잠시 눈썹을 슬쩍 올리더니 입술을 달싹였다.
“알리시아 님, 방으로 들어가셔야 할 시간입니다.”
그때 하녀가 득달같이 달려와 알리시아의 말을 막았다.
아마도 레베카에게 함부로 말을 붙이지 못하게 하라는 명이라도 있었던 모양이다.
알리시아는 분한 듯 하녀를 노려보다 이내 연분홍 드레스를 휘날리며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성질이 죽지는 않았네. 다행이다.’
레베카는 그 모습을 보고 왠지 안심됐다.
알리시아가 걱정되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녀가 자신과 같은 전철을 밟는 건 싫었다.
“준비됐습니다.”
커다란 바구니를 들고 스쳐 지나가던 하녀 한 명이 레베카에게 빠르게 속삭였다.
하녀는 레베카와 말을 섞은 적이 없는 것처럼 유유히 제자리로 돌아가고 있었다.
레베카는 금발 머리를 곱게 땋아 올린 그녀의 뒷모습을 보고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 * *
아무리 제플린이라 하더라도 저택의 모든 고용인의 약점을 잡고 협박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때문에 제플린의 사냥개들은 전체 고용인 수에 비해 소수였다. 나머지 자질구레한 일을 수행하는 사람은 돈으로 충성을 맹세했다.
사냥개가 아닌 고용인 중 일부는 그레이스의 눈과 귀가 되었다.
그레이스는 그들에게서 레베카와 알리시아의 일과를 전해 듣거나 저택 안과 밖에서 떠도는 소문들을 수집했다.
그리고 중요한 정보를 골라서 제플린에게 보고했다.
그중에서도 수잔은 밖의 소문을 수집하는 사람이었다.
특유의 친화력으로 다른 저택의 고용인이나 시장의 상인과 친해진 수잔은 각종 가십을 퍼다 날랐다.
대부분은 쓸모없는 이야기였지만 간혹 시장 가격변화를 예측한다거나 고용인밖에 알 수 없는 내밀한 이야기를 가져오기도 했다.
그런 그녀의 능력도 중요했지만 수잔이 레베카의 눈을 사로잡은 건 그녀의 외모 때문이었다.
수잔은 금발의 푸른 눈이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흔치 않게 레베카와 신장이 비슷했다.
레베카는 그녀가 혼자 있을 때를 노려 그녀에게 다가갔다.
“키가 참 크구나. 거의 나만 하겠어.”
“마, 마님!”
저택에서 일한 지는 수년이 되었지만 처음으로 레베카와 말을 섞었기에 수잔은 깜짝 놀라며 들고 있던 수건을 떨어트렸다.
“수잔이라고 했나?”
“제, 제 이름을 아세요?”
“그럼, 나를 위해서 항상 고된 일을 해주는 걸 알고 있단다.”
수잔은 항상 동경해 마지않던 아름다운 마님이 말을 걸어 준 것만으로도 황홀할 지경이었다. 그런데 자신의 이름까지 안다니.
그녀의 심장이 콩콩 뛰었다.
수잔은 주변을 살펴봤다. 잘 준비가 막 끝난 어두컴컴한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누군가 붙들고 자랑이라도 하고 싶었던 그녀는 그 사실에 조금 시무룩해졌다.
고개를 조아리고 있던 수잔의 눈에 레베카의 구두가 눈에 들어왔다.
금으로 만든 정교한 나비 장식이 올려져 있는 새빨간 구두였다.
수잔의 존재를 알아차린 때부터 레베카는 그녀를 쭉 지켜봐 왔다.
수잔은 알리시아나 레베카의 물건들을 그 어느 하녀보다 탐욕스럽게 바라보곤 했었다.
제플린이 주는 것은 모두가 최상급이니 어린 하녀가 눈길을 주지 않는 게 더 이상했다.
레베카는 수잔의 일렁이는 욕망을 알아채고는 빙그레 웃었다.
“이 구두가 가지고 싶니?”
“예? 아, 아니요. 제가 어찌…….”
“나보단 네게 더 잘 어울릴 것 같구나. 네게 줄게.”
“네?!”
수잔은 화들짝 놀라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레베카는 검지를 치켜들어 입가에 가져다댔다.
“쉬이. 이건 우리 둘만의 비밀이란다. 대신 거저는 안 돼.”
“그, 그럼……?”
수잔은 어느새 레베카에게 홀려 입을 반쯤 벌리고 있었다.
레베카가 고혹적으로 웃었다.
“나와 게임을 하나 하지 않으련?”
* * *
“정말 성공할까요, 마님? 나중에 백작님이 아시기라도 하는 날엔…….”
수잔은 칸나가 자신을 치장하는 동안에도 불안한 듯 계속해서 손톱을 뜯고 있었다.
레베카는 다시금 입가로 가져가려는 수잔의 손을 저지하고 말했다.
“흠, 손에는 장갑을 끼는 게 좋겠다. 혹시라도 들킬지 모르니까. 그이는 며칠 동안 집에 들어오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말아. 세상에나, 이것 보렴. 타고난 귀족영애라고 해도 믿겠어.”
레베카는 수잔이 더 걱정할 틈을 주지 않으려는 듯 서둘러 거울 앞에 그녀를 들이밀었다.
“이게 저예요?”
수잔은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 색과 비슷한 하늘색 드레스엔 섬세한 분홍 장미 자수가 장식되어 있었다.
그리고 평소 콤플렉스이던 그녀의 주근깨를 칸나가 완벽하게 감추어주었다.
축 처진 눈꼬리도 레베카처럼 치켜 올라가게 그렸다.
가까이서 자세히 보지 않는 이상 수잔은 얼핏 보면 레베카와 흡사했다.
“세상에나, 신이시여! 제가 마님이 되었어요! 헉! 아, 그게 아니라……. 죄, 죄송합니다. 제가 실언을!”
들떠서 소리치던 수잔은 칸나의 매서운 눈치에 벌벌 떨며 고개를 숙였다.
레베카가 그런 그녀를 상냥하게 다독였다.
“잊었어? 이 게임은 네가 얼마나 레베카 데본셔와 똑같이 되느냐에 달렸어. 물론 네가 입을 열 일은 별로 없을 거야.”
“네…….”
“걱정하지 마려무나. 몇 시간 후면 돌아올 거니까. 너는 이 놀이를 즐기면서 휠체어에 앉아 그림을 그리면 돼.”
“하지만요, 마님. 저는 그림을 그릴 줄 모르는데요!”
“그건 칸나가 지도해 줄 테니 아무 문제 없어.”
레베카는 수잔의 손을 잡았다.
수잔은 구름같이 부드러운 레베카의 손에 넋을 잃었다. 제 거친 손과 너무나도 대비되는 감촉이었다.
“고마워. 너무 답답했거든. 남편이 없는 지금이 기회야. 잠시 백작 부인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이 되고 싶었어.”
수잔은 레베카를 이해할 수 없었다. 이 좋은 호사가 왜 답답하단 말인가.
그러나 호소력 짙은 그녀의 눈빛이 수잔의 마음을 움직였다.
수잔은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잠시 뚫어지게 바라봤다. 황홀한 이채가 그녀의 눈에서 가시지 않았다.
그런 수잔을 지켜보는 칸나와 레베카는 회심의 미소를 주고받았다.
수잔은 결심이 완전히 선 듯 레베카와 맞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하겠어요. 마님은 마음 푹 놓고 다녀오세요.”
* * *
레베카는 보닛을 눌러쓰고 수잔의 뒤뚱거리는 걸음걸이를 흉내 내며 대문 앞에 다다랐다.
문지기들은 냉기 어린 눈빛으로 레베카가 내미는 통행증을 받아들었다.
“나가 봐.”
레베카가 열린 대문을 빠져나가자 그들은 기계처럼 문을 닫았다.
그 흔한 안부 인사도 건네지 않는 그들은 꼭 영혼이 빠져나간 사람처럼 보였다.
‘그래서 나는 더 좋지만.’
두 번째 일탈이었다.
로버트가 병가를 낸 탓에 지난번과 같은 수법을 쓸 수 없었다. 그래서 며칠 밤을 고민하다 꾸며낸 일이었다.
처음만큼의 두근거림은 없었지만 그래도 설레지 않은 건 아니었다.
자유의 공기를 들이마시자니 문득 율리안이 떠올랐다.
요하네스 공작령은 백작저가 있는 도시와 맞닿아 있었다.
이대로 마차를 탄다면 그에게 충분히 갈 수도 있는 거리였다.
하지만 레베카는 제가 이런 고민을 한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새 정이라도 든 거야? 레베카, 주제넘은 생각 하지 마.’
그렇게 레베카는 율리안을 마음에서 꾸역꾸역 밀어내었다. 그리고 처음보다 한결 무거워진 발걸음을 옮겨 시장으로 향했다.
* * *
시장은 팽배한 삶의 활기로 넘쳐나고 있었다. 사방에서 사람들의 고함과 웃음소리가 함께 들려왔다.
레베카는 잠시 아찔했으나 오랜만에 맞는 이 분위기가 반가워 시간이 촉박한데도 한참을 서성거렸다.
“어머, 수잔! 오늘은 뭘 사러 왔니?”
하지만 그것도 레베카를 수잔으로 알아보는 사람들 때문에 금방 그만두어야 했다.
수잔은 정말이지 엄청난 마당발이었다. 가는 골목마다 상인들이 그녀에게 말을 걸어왔다.
레베카는 되도록 보닛으로 얼굴을 완전히 가리고는 일전에 레오가 가져다준 주소로 향했다.
<타니샤 상회>
건물은 지나치게 호화롭지도 그렇다고 허름하지도 않았다.
레베카는 고개를 들어 평범한 건물의 단조로운 문을 두들겼다.
“들어오세요.”
타니샤가 낭랑한 목소리로 문을 벌컥 열었다. 그리고 평민 옷차림의 레베카를 올려다보고는 잠시 얼어붙었다.
그녀의 눈빛은 옷차림과 다르게 위엄과 기품이 흘러넘쳐 타니샤는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어……, 여긴 무슨 일로?”
“상단주를 뵈러 왔는데요.”
“제가 상단주인데 누구시죠?”
“절 찾는다 하시기에.”
레베카의 말에 타니샤의 눈이 흔들렸다. 레베카의 차림에 퍽 놀란 모양이다.
앳된 타니샤의 외양에 당황한 건 레베카도 마찬가지였다.
유능한 상단주를 구했다고 해서 연륜 깊은 노신사를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눈앞의 타니샤는 옴폭 들어간 보조개를 가진 자그마한 체구의 어린 아가씨였다.
그래도 그녀의 크고 둥근 갈색 눈에 총기가 넘쳐흘렀기에 레베카는 자신이 맞게 찾아왔음을 직감했다.
“그럼 혹시 당신이 그 레베…….”
타니샤는 레베카의 이름을 말하려다 제 입을 급하게 틀어막았다. 그러고는 서둘러 레베카를 안으로 들였다.
‘역시 내 정체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네.’
분명 율리안은 상단주에게 그녀의 정체를 발설하지 않았다고 했었다.
하지만 이미 알고 있는 걸 보니 정보력이나 추리력이 상당한 사람임이 확실했다.
레베카는 속으로 감탄을 하며 무심한 눈으로 건물 내부를 훑어봤다. 물건들이 난잡하게 얽혀 있었다.
“아직 정리 중이라 완벽하지는 않아요.”
타니샤가 조금 민망해하며 얼른 말을 덧붙였다.
전체적으로 평범해 보이는 구조였지만 내밀히 들여다보면 상당히 공들인 티가 났다.
타니샤는 이곳에 꽤 애착이 있어 보였다.
레베카는 친절하게 웃고 있었지만 경계 어린 눈빛을 보내는 타니샤를 찬찬히 관찰했다.
“거기, 내 방으로 다과 좀 올려 보내.”
타니샤는 멀리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검은 머리의 청년을 불렀다.
그는 다과 담당이 아닌 듯 어리둥절해 보였지만 타니샤의 굳은 눈매에 곧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정리하던 서류를 잠시 구석에 두고 자그마한 부엌으로 사라졌다.
직원의 동태를 흘깃 보던 타니샤는 레베카를 이층으로 데리고 갔다.
이층에는 책장이 빽빽하게 들어찬 방이 있었다.
타니샤는 커다란 책상 앞으로 갔다.
상단주의 자리인 듯 고풍스런 명패가 책상 위에 올려져 있었다.
타니샤는 상단주 몫의 의자를 내어주며 말했다.
“공작님의 명이니 이곳에 앉으셔야죠.”
타니샤의 손에 육중한 소리를 내며 거대한 가죽 의자가 움직였다.
레베카는 의자를 잠시 물끄러미 쳐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