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타니샤의 당당한 걸음걸이, 일부러 멀리 있는 직원을 불러 자신이 이곳의 주인이라는 걸 확인시켜 주었던 것.
그리고 의자를 내주면서도 굳이 공작을 들먹이며 이곳은 당신의 능력으로 얻은 자리가 아니라고 속삭이는 오만한 눈빛.
레베카는 처음 타니샤를 본 순간부터 지금까지의 그녀의 행적을 하나하나 따져보았다.
그리고 빠르게 그녀의 욕망을 읽어 내렸다.
폭풍전야처럼 둘 사이에는 잠시간 침묵이 흘렀다.
집요한 타니샤의 시선에 레베카는 계획했던 바를 접어버렸다. 그리고 새로운 계획을 이행하기 시작했다.
“전 어디까지나 동업자 위치를 고수할 겁니다. 상단주를 맡을 만큼 그릇이 크지도 않고요. 그 자리는 오로지 당신의 몫입니다. 전 율리안의 안목을 믿거든요.”
레베카는 타니샤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맞은편에 있는 손님용 의자에 털썩 앉았다.
그리고 그녀를 보고 빙글빙글 웃기만 했다.
‘오로지 당신의 몫…….’
타니샤는 어쩐지 김이 새서 엉거주춤하게 의자를 꺼내고는 앉았다.
공작이 이곳을 맡겼을 때부터 타니샤는 상단주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치열한 공방을 예상했다.
그래서 레베카의 정체를 파악한 뒤로 갖은 경우의 수를 생각하며 계획을 짰다.
타니샤는 어릴 때부터 영특했던 탓에 공작가의 골치 아픈 뒤치다꺼리를 도맡아 왔다.
다혈질인 공작은 매일같이 사고를 쳐댔고 그녀는 하루가 멀다하고 바쁘게 살았다.
하지만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떨어지는 봉급은 같았고 그마저도 부모님 손에 들어가기 일쑤였다.
‘체니스터가 요하네스가를 섬기는 건 당연한 일이야. 돈 따위를 바라다니 당치도 않다! 그리고 이 돈은 네가 결혼할 때까지 우리가 묵혀 두마.’
‘거짓말.’
전대 공작이 죽고 나서 일자리를 잃은 부모님은 크로아와 타니샤의 수입에 의존하고 있었다.
그들은 꽤 사치스러웠기에 타니샤는 부모에게 맡긴 돈을 결국 되돌려 받지 못할 거란 걸 알고 있었다.
크로아도 타니샤와 마찬가지로 부모에게 돈을 대고 있었지만 그는 아무런 불만도 없어 보였다.
하지만 타니샤는 달랐다.
타니샤는 허구한 날 파티 비용을 요구하는 부모에게 일이라도 해보라고 간청했지만 돌아오는 건 싸늘한 거절뿐이었다.
‘우린 요하네스 공작가를 섬기던 사람들이다. 그런 급이 안 맞는 하찮은 귀족들을 상대할 수는 없는 일 아니겠니?’
‘우리 집은 고작 남작이잖아요!’
타니샤는 속으로 비명을 질렀지만 속에 든 말을 입 밖으로 차마 꺼내기는 힘들었다. 자존심 강한 그녀의 부모가 상처받는 것 또한 싫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타니샤가 오랫동안 품고 왔던 소원은 독립이었다.
타니샤 상회는 그녀의 꿈의 시작점이었다.
벌써 독립자금을 모을 금고까지 만들어뒀다.
돈이 모이면 초기자금을 공작에게 갚아 버리고 공작저를 나올 생각이었다.
때문에 타니샤는 이 상단을 절대 레베카에게 넘길 수 없었다.
그녀가 조사한바, 레베카는 그저 유약한 귀부인일 뿐이었다.
그런 레베카가 상단을 원한다는 건 무슨 의미겠는가.
‘바람난 남편과 이혼하려고 돈을 모으려는 게 분명해.’
그리고 그녀는 그 수단으로 그 악명 높은 요하네스 공작을 이용하고 있었다.
대체 공작을 무슨 수로 구워삶았는지는 몰라도, 레베카는 소문과 달리 범상치 않은 인물이라고 타니샤는 결론지었다.
그렇기에 더더욱 준비에 열을 가했다. 밤새도록 협상을 할 수 있을 만큼 철저하게 준비했다.
만반의 준비를 하고 타니샤는 레베카에게 서신을 보냈다. 제 딴에는 도전장을 보내는 격이었다.
타니샤는 레베카도 자신보다 더하면 더했지, 다르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값비싼 보석들로 잔뜩 치장하고 와서 그녀의 기를 죽일 것이라 예상했지만 의외로 레베카는 시장 사람들과 별반 다를 바 없는 차림새로 나타났다.
그것도 모자라 그녀는 상단주 자리를 원치 않는다고 딱 잘라 말했다.
그러니 타니샤가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정리하지 못하고 레베카의 물음에 제 소개만 겨우겨우 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우리 상단주님의 성함을 알고 싶은데요?”
타니샤는 레베카의 말에 떠듬거리며 대답했다.
제가 들어도 멍청한 말투였다.
“타, 타니샤 체니스터입니다…….”
체니스터란 말에 레베카는 움찔했다. 그러고 보니 전체적인 이목구비가 크로아와 얼핏 닮은 것 같기도 했다.
크로아가 이전 생에서 제 영특한 여동생 이야기도 자주 했었기에 레베카는 타니샤가 크로아의 여동생이란 걸 짐작했다.
레베카는 원래 자신이 상단주가 되기로 했던 계획을 저버려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크로아의 여동생의 꿈을 짓밟을 수는 없는 일이니.
레베카는 약간 얼이 나간 타니샤의 어깨 너머로 시계를 확인했다.
다음 목적지까지 들르려면 시간이 빠듯했다.
“시간이 별로 없으니 간단히 용건만 말씀드리죠. 제가 원하는 건 돈뿐입니다. 6 대 4 정도로 하죠.”
돈 이야기가 나오자 타니샤는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렸다.
“누가 6인가요?”
“그쪽이 6이에요. 저는 도움될 정보만 제공해 드리고, 고생은 상단주님께서 하실 테니까요. 정 마음에 안 드시면 7까진 올려드릴 의향이 있어요.”
짜릿했다. 타니샤는 여태껏 흥정한 적은 많아도 제 주머니로 고스란히 들어오던 적은 없었다.
게다가 이 상단의 수입은 온전히 레베카의 것이라고 율리안이 귀에 못이 박히도록 말했다.
때문에 타니샤는 율리안 몰래 레베카와 수수료를 흥정할 계획을 짰었다.
어떻게 보면 공작을 속이는 일이었지만 그동안의 공로를 인정해 이 정도 횡령은 율리안이 눈감아 주리란 걸 타니샤는 알고 있었다.
순간 7까지 올려볼까 하는 욕심이 고개를 들었지만 타니샤는 그만두었다.
아무리 레베카가 허락한 일이라도 욕심을 부렸다간 후에 율리안이 이 사실을 알게 됐을 때의 후환이 두려웠다.
“좋아요. 그나저나 어떤 고급 정보인지 궁금하네요.”
타니샤의 승낙에 레베카는 미미하게 웃었다. 그러곤 책상 한쪽에 쌓여 있던 종이를 들어 깃펜으로 무언가를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사각거리는 소리가 방 안을 가득 메웠을 즈음 레베카는 적는 것을 멈추었다.
“앞으로 가격이 치솟을 상품의 목록이에요. 제 정체까지 알아내신 분이니 어렵지 않게 큰돈을 만질 수 있을 거라 믿어요.”
타니샤는 의심이 가득한 눈빛으로 레베카가 내미는 목록을 받아들었다.
유리아 왕국산 푸른색 다기, 카리바나 왕국산 후추, 봉가니산 원두, 타마라 무당벌레…….
모두 현재 크게 가치가 없는 상품들이었다.
“예지력이라도 있으세요……? 그렇지 않고서야 이 상품들이 가격이 오를 걸 어떻게 아시나요?”
예지력이라고 할 수 있을까. 사실 이전 생에 이맘때쯤 크게 유행하던 사치품들을 적었을 뿐이었다.
세간에 유행하던 대부분의 상품은 누구보다 발 빠르게 데본셔 백작가에 들어오고는 했다. 때문에 레베카는 유행의 흐름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세세한 걸 설명하기엔 시간이 촉박했다.
레베카는 초조하게 시계를 확인하며 말했다.
“시간이 없어서 자세한 이야기는 못하겠지만 속는 셈 치고 믿어보세요. 아, 그리고 타바라 무당벌레는 반드시 독점해야 합니다. 이곳을 통해서만 살 수 있도록요. 곧 웃돈을 주고서라도 사겠다는 사람이 있을 겁니다. 그때까지 많이 키워두세요.”
치사한 수였지만 어쩔 수 없었다. 다나에가 맡은 살롱이 막대한 수입을 보장하긴 했지만 개업하려면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 긴 시간 동안 제플린에게 매여 있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때문에 최대한 빨리 오벨리아가가 제플린에게 진 빚을 갚으려면 이전 생의 기억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레베카는 폭풍우 치듯이 타니샤에게 기억을 쏟아냈다.
“그리고 여기 이 광산에는 질 좋은 철이 매장되어 있어요. 얼마 후에 카리바나 왕국에서 내전이 있을 거예요. 카리바나 왕국은 철이 부족한 곳이니 다량을 수입하려 할 겁니다. 그러니 광산을 확보하면 높은 수익을 낼 수 있을 테죠. 그리고 원두는 아돌프라는 상인에게 구입하도록…….”
타니샤는 레베카의 말을 행여나 놓칠세라 빠르게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얼마나 말을 했을까.
드디어 기억을 소진한 레베카가 찬물을 벌컥 들이켰다.
“하아. 이게 끝이에요. 할 수 있겠어요?”
“해야죠. 아니, 반드시 해낼 겁니다.”
타니샤의 눈이 반짝반짝거렸다.
분명 레베카는 데프리아 여신의 뜻을 받은 성녀임이 틀림없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미래의 일을 마치 보고 온 것마냥 줄줄이 말할 수 있겠는가.
보통 사람 같았으면 터무니없는 헛소리라 여길 수도 있었겠지만 레베카는 율리안이 보증한 사람이었다.
율리안을 썩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타니샤도 그의 사람 보는 눈만큼은 인정하는 바였다.
율리안이 구린 구석이 있다고 한 사람은 반드시 칼을 품고 있었다.
득이 되리라 한 사람은 반드시 큰 이득을 가져다주었고.
그렇기에 타니샤는 한 치의 의심마저 지워버리고 레베카의 말을 받아 적은 노트를 소중히 품에 안았다.
“차라도 더 드시고 가시지…….”
어느새 타니샤는 레베카를 향한 적대적인 눈빛을 모두 거두고 문을 나서는 레베카를 아쉬운 듯 잡았다.
레베카는 그런 그녀가 귀여워서 저도 모르게 웃었다.
“다음에, 제가 자유의 몸이 된다면 그때 서로를 좀 더 알아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죠.”
“자유의…… 몸?”
레베카는 순간 아차 싶었지만 타니샤는 이미 그 단어의 의미를 깨달은 듯 그녀를 더는 잡지 않았다.
레베카는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다나에 오벨리아라는 부인이 찾아올 거예요. 그때 수입을 나눠주시면 됩니다. 현명한 분이니 막히는 부분이 있다면 그분과 의논해도 좋을 거라 생각해요.”
“알겠습니다. 그럼 보고는 어떻게 할까요?”
“율리안에게 해주세요. 그럼 저도 다 알 수 있으니까요.”
최근 들어 둘 사이의 전령 고양이 역할을 하는 레오를 떠올리고 한 말이었다.
하지만 타니샤는 조금 다른 의미로 받아들였는지 얼굴을 조금 붉히고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보다 둘 사이에 뭔가 있는가 본데?’
레베카는 그런 그녀에게 호의가 가득 담긴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다음 목적지로 발을 옮겼다.
갓 구운 빵 냄새가 유혹적인 곳이었다.
* * *
“자네가 이리 찾아주니 놀라울 따름이군.”
오랜만에 잠시간의 여유가 생겨 티타임을 즐기려던 자히드라 황제는 율리안이 자신을 찾아왔다는 말에 깜짝 놀랐다.
언제나 호출하는 것은 자신이었지 율리안이 알현을 청하는 건 처음이었다.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그의 묘하게 예의 바른 태도에 자히드라는 잠시 할 말을 잃고 율리안을 멍하니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