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율리안은 눈을 곱게 접으며 사근히 말했다.
“그동안 폐하께서 제게 보여 주신 호의를 곰곰이 생각해봤습니다. 그러다 보니 정작 폐하를 기쁘게 해드렸던 적이 없는 것 같더군요.”
“뭐, 로탄더스 제국의 입장에선 공의 존재 자체가 기쁨이니 그리 생각하지 말게.”
자히드라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의자에 비스듬히 앉았다. 율리안이 이렇게 저자세로 나오는 의미를 도무지 읽어낼 수가 없었다.
여태껏 단 한 번도 없었던 일이었다.
율리안은 그런 자히드라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천연덕스럽게 커피잔을 들었다.
“처음 맡는 향인데, 독특하군요.”
“봉가니에서 새로 나온 원두로 만든 커피라네. 시장에 풀기 전에 진상한 것이지. 계속 마시다 보니 향이 참 좋더군.”
“그러네요. 계속 생각나는 맛이네요.”
율리안은 계속해서 말을 빙빙 돌리기만 했다.
그의 태도에 답답함을 참지 못한 자히드라가 결국 그의 말을 재촉했다.
“그래서 이리 나를 찾아온 연유가 무엇인가? 자네는 이리 행동하는 사람이 아니지 않는가.”
“제가 폐하를 얼마나 좋아하는데 그런 섭한 말을 하십니까.”
아양? 지금 그 율리안 요하네스 공작이 내게 아양을 떤 것인가?
자히드라는 율리안의 매혹적인 미소를 경악에 찬 눈으로 바라봤다.
그는 평소처럼 깔끔한 흰색 셔츠에 그의 훌륭한 몸매를 잘 드러내는 검은색 조끼를 걸치고 있었다.
다만 평소와 다른 점은 넥타이 대신 얇은 빨간 리본을 매고 있다는 것이었다.
최근 수도에서 유행하고 있는 복장이었지만 율리안은 그런 유행을 따르는 자가 아니었다.
‘흉한 차림이라 생각했는데 율리안이 한 걸 보니 또 다르군.’
자히드라가 내심 율리안의 외모에 감탄하고 있을 즈음, 율리안은 이제 애태우는 걸 그만두고 본론을 꺼내 들었다.
“오늘 이리 폐하를 방문한 것은 드디어 제 마음이 섰다는 걸 알려드리기 위함입니다.”
“마음이 섰다?”
“예. 저는 오늘부로 신전을 등지고 폐하의 곁에 서기로 결심했습니다.”
“신전을 등지겠다고? 자네가?”
자히드라는 순간 제가 잘못 들었나 싶어 한 번 더 되물었다.
율리안은 확답이라도 하듯 더욱더 또렷한 목소리로 한 글자 한 글자씩 다시 말했다.
“그렇습니다. 데프리아 여신의 축복을 포기하겠다는 겁니다.”
“그게 무슨……. 신의 뜻을 쉽게 거스를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제가 지금 폐하라면 기뻐 날뛸 것 같은데 왜 그러시는지 모르겠군요. 뭐, 틀린 말은 아니십니다. 제가 신전을 적대한다 해도 제게 내린 축복을 거둘지 말지는 오로지 신의 영역이니까요.”
“그렇게 설득할 때는 미동도 하지 않더니, 마음을 바꾼 특별한 이유라도?”
“누군가에게 자극을 받았다고 해야 할까요…….”
율리안은 사실 신전의 세력을 무너뜨리려는 계획을 오래전부터 준비해왔었다.
준비도 거의 막바지에 이르렀지만 도무지 시작을 할 수가 없었다. 그를 붙잡는 일말의 우려 때문이었다.
‘내게서 신의 존재가 사라진다면 나는 뭐가 되지.’
그를 망설이게 하는 건 두려움이었다.
신전의 세력이 약해진다면 데프리아 여신을 향한 사람들의 인식도 바뀌게 된다.
그 여파를 자신도 피해 갈 수는 없을 터였다.
축복받는 요하네스 공작으로 누려왔던 모든 것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그를 하염없이 머뭇거리게 했다.
웃기지 않는가.
평생을 신의 그늘에서 벗어나려 발버둥 쳤는데, 막상 기회가 닥치니 손에 쥐고 있는 몇 푼의 동전이 아쉬워진 것이다.
‘겁내는 꼴 좀 보라지.’
율리안은 제 나약함이 부끄러워 견딜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이 요하네스 공작가를 위해 많은 걸 잃었다고 여겼다.
하지만 레베카가 계단에서 스스로 떨어졌다는 걸 들었을 때, 율리안은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레베카는 거침없었다. 그녀가 가진 건 제 몸 하나뿐일 텐데도 그것마저 내놓았다.
그는 자신이 지금껏 원하는 것을 위해 아무것도 희생한 적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야 자유의 몸이 된다고 말하면 이해하려나.’
레베카는 담담히 말했다. 단단하게 제련한 철 같은 미소를 지었다.
그 여린 체구가 내뿜는 기개가 대단했다.
그런 그녀 앞에서 율리안은 한없이 작아지다 유모를 잃었던 날의 소년이 되었다.
레베카를 떠올리자 다시 심장이 요동치며 통증이 찾아왔다.
이러다 어느 순간 쓰러져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그의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그래서 그는 레베카처럼 제가 가진 걸 전부 내던지기로 했다.
무언가를 버리지 않고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는 법이다.
율리안은 어느 때보다 두려웠지만 어느 때보다 살아 있음을 느꼈다.
“율리안, 뭘 그리 멍하니 있는가. 그래서 누구한테 자극을 받았다고?”
자히드라가 율리안에게 대답을 채근했다.
확실히 오늘 그는 어딘가 이상했다.
온실은 덥지도 않고 춥지도 않은 적당한 온도였다. 하지만 그는 별안간 볼을 발갛게 물들이고 있었다.
자히드라가 시종에게 찬 음료를 내어오라 시키자 곧 시종이 차가운 허브차와 레모네이드를 내왔다.
허브차를 골라든 율리안이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아직은 비밀입니다. 허나 언젠가 아실 날이 올 겁니다.”
“혹여 여인인가? 설마, 저번에 그…….”
자히드라는 일전의 승전연회에서 레베카와 춤을 추던 율리안을 떠올렸다.
자히드라가 레베카를 떠올리고 있다는 걸 알아챈 율리안이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지난번에 부탁드린 일을 완벽하게 해주셨다고 들었습니다. 감사 인사가 늦었습니다.”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만, 연유는 언제 알려줄 셈인가?”
“오늘 그걸 말씀드리려 이렇게 찾아온 것입니다. 폐하의 편에 서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자넨 언제나 내 편이 아니었나.”
능글맞은 자히드라의 웃음에 율리안은 잠시 인상을 찌푸렸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렇지요. 하지만 이제 확실히 폐하의 편이라는 걸 보여드리겠습니다.”
“어떻게?”
“신전을 무너뜨릴 계획이 있습니다.”
순간 자히드라의 인자한 눈빛이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사냥감을 발견한 매처럼 단번에 예리해졌다.
“그런 이야기라면 언제든지 환영이지.”
율리안은 소리 없이 서 있는 시종들을 곁눈질했다.
자히드라가 그의 의중을 눈치채곤 고개를 까닥였다.
그 한 번의 움직임에 유리 온실에 있던 모든 시종이 순식간에 빠져나갔다.
마지막 시종이 문을 닫고 나가자 율리안은 테이블 위에 손깍지를 올렸다.
“카디르교를 기억하십니까.”
“카디르교라면, 데프리아교 이전에 성행하던 종교 아닌가.”
“폐하께서도 이미 알고 계시듯, 카디르교는 세간에 알려진 것처럼 거짓된 종교는 아니었습니다. 당시 데프리아 교황이 민중을 선동했기에 지금까지도 그런 인식이 남아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카디르교를 다시 부흥이라도 시키겠다는 건가?”
“그럴 리가요. 그만한 힘도 없고, 그럴 이유도 없습니다. 다만…….”
“다만?”
“과거에서 교훈을 찾을 수는 있겠죠. 데프리아교는 카디르교와 똑같은 방법으로 쇠락의 길을 걷게 될 겁니다.”
자히드라의 머리가 팽팽하게 굴러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율리안이 미소를 머금었다.
“카디르교가 무너진 결정적인 이유는 지나치게 엄격한 교리 때문이었습니다. 데프리아교가 그렇게 빨리 국교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것도 카디르교에 불만을 품었던 자가 많았기 때문이었죠.”
율리안은 얼음이 띄워진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시원한 냉기와 함께 은은한 허브향이 입안에 가득 퍼졌다.
그가 한층 더 차분해진 어투로 말했다.
“지금의 데프리아교도 같은 길을 걷고 있습니다. 데프리아교는 향락을 권장해서 사람들을 끌어모았지 않습니까. 자유로운 쾌락, 좋죠. 하지만 최근의 행보를 보면 국가의 기강을 흔들 만큼 과한 면도 없잖아 있습니다.”
“그렇지. 툭하면 신전에서 끼어드는 바람에 골머리야.”
“걱정하지 마십시오. 데프리아교는 제 욕망에 못 이겨 스스로 무너져 내릴 것입니다.
“어떻게 말인가.”
“신흥종교가 필요합니다. 물론 국교를 하루아침에 바꿀 수는 없으니 새로운 데프리아교가 되겠죠.”
그의 말에 자히드라는 움찔했다. 첨예한 그의 눈빛이 음습하게 율리안을 훑었다.
율리안은 그의 시선을 잠시간 바라보다 은밀하게 한마디를 던졌다.
“우리에겐 몽블랑 클럽이 있지 않습니까?”
자히드라가 눈을 크게 떴다.
신 데프리아 결사대, 통칭 ‘몽블랑 클럽’은 그가 황태자 시절부터 계획했던 일이었다.
신전에 적대적이던 그가 신학교에 아낌없이 후원을 퍼부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유능한 인재가 많아질수록 부조리에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이 많아질 테니.
자히드라의 예상대로 신학교의 융성은 현 데프리아교에 반기를 드는 학자 배출에 큰 일조를 했다.
자히드라는 그들을 한데 모아 비밀스런 클럽을 만들었다.
처음 황제가 학자들을 모았을 때 그들은 영문을 몰라 불안감에 떨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황제의 말 한마디로 상황은 빠르게 정리되었다.
‘누구든지 자유롭게 이 몽블랑 케이크가 주는 행운의 맛을 맛봐야 하지 않겠나.’
영리한 학자들은 그의 의미를 금방 알아차렸다.
얼마간의 논의 끝에 몽블랑을 앞에 두고 맹세가 이어졌다.
그 후 몽블랑 클럽은 자히드라의 손과 발이 되어 신전을 견제하는 훌륭한 도구가 되었다.
클럽의 목표는 데프리아교의 악행을 알리고 종교 본연의 모습을 찾는 것이었다.
그들은 제국에 퍼져 있는 모든 신전에 세작을 심어두는 것부터 시작했다.
신전의 행패에 피해 본 자들을 구휼하고 그들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었다.
그 와중에 구귀족에게 눌려 기를 펴지 못하던 신흥귀족들이 은밀한 클럽의 존재를 알아차렸다.
물론 자히드라가 의도적으로 흘린 정보였다.
신흥귀족들은 새로운 세력의 발견에 기뻐했다.
그들은 곧 몽블랑 클럽에 합류하고 기꺼이 활동자금에 자금줄을 대었다.
표면적으로 드러나지는 않았으나 구귀족과 신전, 그리고 황제와 신흥귀족 간의 보이지 않는 팽팽한 대립 구도가 생겨났다.
몽블랑 클럽이 생기기 이전부터 율리안은 신전의 약점이란 약점은 모조리 캐고 다녔다.
어느 순간 율리안은 자신보다 한발 앞서거나 혹은 뒤늦게 자신과 같은 것을 찾고 있는 무리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흥미를 느낀 율리안은 곧바로 정체를 알 수 없는 무리의 뒤를 조사했다.
그는 결국 그 무리가 몽블랑 클럽이며 그 뒤에 황제가 서 있다는 사실까지 알게 되었다.
내 적군의 적은 아군이라 했던가.
그동안 얌전히 진실을 손에 쥐고 있던 율리안이 손을 활짝 펼쳤다.
“바리니카라는 화가를 알고 계십니까.”
“알다마다. 제국이 자랑하는 최고의 화가 중 한 사람이 아닌가. 그리고 말 돌리지 말게. 몽블랑 클럽에 대해 어디까지 알고 있지?”
자히드라의 얼굴에 웃음기가 싹 가셨다.
그의 말투는 모골이 송연해질 정도로 매서웠다.
항상 그의 웃는 낯만 보아 왔던 율리안은 새로운 황제의 모습에 흥미를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