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망친 백작 부인이 돌아왔다-32화 (32/232)

32.

율리안은 황제의 날카로운 태도를 모르는 척하며 태연히 말했다.

“그저 폐하께서 쥐고 있는 가장 소중한 보물이라는 정도밖에 알지 못합니다.”

“율리안! 내가 언제까지 자네의 방종한 태도를 봐줄 거라 생각하지 말게.”

익살맞게 웃는 율리안을 보고 자히드라가 버럭 소리쳤다.

그는 몽블랑 클럽의 정체를 가지고 자신이 신전과 황제 사이에서 줄타기라도 하려는 줄 생각한 모양이었다.

율리안은 빠르게 손을 내저었다.

“조금 오해가 있으신 것 같군요.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전 폐하의 편이 되고자 찾아왔습니다. 은혜를 원수로 갚을 수야 없지요.”

“자네가 내 은혜를 은혜라 여기기는 하는가.”

“그렇습니다. 그러니 이런 좋은 패를 가지고 찾아온 것 아니겠습니까.”

“좋은 패라?”

“언제까지 음지에 숨어 계실 생각이십니까. 슬슬 머리를 드러내실 때입니다.”

율리안의 자신만만한 태도에 자히드라는 잔뜩 찌푸렸던 미간을 슬그머니 풀었다.

그는 계속 말하라는 듯 율리안에게 손짓했다.

“앞서 말씀드린 바리니카라는 화가, 데본셔 백작에게 의뢰할 화가가 바로 그자입니다.”

“뭐라?”

“의뢰할 그림은 철저히 익명으로 발표될 겁니다. 그는 신전을 고발하는 그림을 그릴 테니까요.”

“자네, 지금 제정신인가? 그는 데프리아 여신의 성화로 명성을 떨친 자야. 신전의 후원을 받고 있는 데다 신전이 자랑하는 거대한 천장화도 그자의 작품인 것을!”

“최근 교황이 다섯 번째 부인을 들였다지요. 그것도 서른 살이 넘게 차이 나는 딸뻘의 여인을 말이죠.”

“그자의 추악한 짓은 신물이 날 정도로 많이 봐왔네. 이젠 놀랍지도 않아.”

“원래 그 여인은 바리니카의 약혼녀였습니다.”

자히드라는 차가운 레모네이드가 담긴 잔을 들다가 멈칫했다. 눈을 휘둥그레 뜬 그의 손에서 얼음이 달그락거렸다.

율리안이 비릿하게 웃으며 말했다.

“바리니카를 만나러 온 그녀를 보고 교황이 그만 반해버렸나 봅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열렬한 데프리아 여신의 신도였기에 영광스러운 제안이라 생각했나 보죠. 결혼식도 올리지 않았다고 들었습니다.”

자히드라는 이마를 짚고 헛웃음을 내뱉었다.

“생각보다 더 미친놈이었군. 맙소사. 그런 자가 교황이라니.”

“데프리아교의 교리에 부적합한 짓은 아니니 문제 될 건 없죠.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린 것이 아니니 남의 아내를 빼앗은 것도 아니고. 게다가 딸의 의견 따위야 아버지가 조작하면 그만이었겠죠. 강제적인 결혼이라 주장해봤자 교황이 손을 써서 모조리 기각시켰을 게 뻔합니다. 그러니 눈뜬 채로 약혼녀를 빼앗긴 바리니카가 제안에 흔쾌히 수락하지 않겠습니까. 복수를 꿈꿀 테니까요. 뭐, 원한다면 그의 약혼녀를 다시 되돌려 줄 수도 있겠군요.”

“좋네. 그럼 그 그림으로 무슨 일을 벌일 계획이지?”

“씨앗을 뿌릴 겁니다.”

“씨앗?”

“예. 불신의 씨앗이요. 바리니카의 그림에는 교황과 사제들의 악행이 날것으로 생생히 담길 것입니다. 물론 신전 주도하에 그림을 발표하는 즉시 전부 폐기될 테지만, 바리니카가 누구입니까. 제국이 낳은 최고의 예술가이지요. 그의 명성만으로도 작품을 소장할 가지가 충분하지요. 그때 복사본을 전국에 뿌릴 예정입니다.”

“흐음…….”

“공작부터 가난한 소작농까지 바리니카의 그림은 은밀히 향유될 것입니다. 모두가 가지고 싶어 할 만큼 아름다운 그림일 테니까요. 바리니카의 그림 속 세상은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신전의 진짜 모습으로 사람들의 뇌리에 남을 것입니다. 어떠십니까? 화려한 서막으로 더할 나위 없이 좋지 않습니까?”

자히드라는 말없이 턱을 매만졌다.

어느덧 만족스러운 웃음이 번지고 있는 그의 입매를 율리안은 똑똑히 확인했다.

자히드라는 짐짓 제 마음을 드러내지 않고 물었다.

“헌데 왜 데본셔 백작인가. 자네가 직접 움직인다면 더 확실히 처리할 수 있을 텐데.”

제플린의 이름이 거론되자 율리안은 떠올리기만 해도 화가 난다는 듯 티스푼으로 차를 휘휘 저었다.

그가 심드렁히 말했다.

“뭐, 백작이 예술에 조예가 깊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리고?”

율리안은 손을 멈추었다. 소용돌이치던 찻물이 서서히 속도를 줄였다.

그는 잔을 들어 얼음 한 조각을 입에 털어 넣었다.

와그작. 그의 입 안에서 얼음이 속절없이 부서졌다.

“그가 어느 편인지 확실히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 건에 대해서 자세히 아는 건 저와 폐하, 그리고 데본셔 백작이 될 것입니다. 일이 수포로 돌아간다면…….”

“셋 중 누군가가 배신한 셈이군.”

자히드라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오늘따라 율리안은 그의 가려운 데를 기가 막히게 긁어주고 있었다.

데본셔 백작가는 황제가 황태자 시절부터 신임하던 충성스러운 가문이었다.

특히 자킴 데본셔은 자히드라가 황좌에 앉기까지 많은 도움을 줬던 일등 공신이었다.

‘하지만 제플린은 조금 다르지…….’

제플린 데본셔는 표면적으로는 제 아비와 같은 길을 걷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자히드라는 제플린을 완전히 신뢰하지 않았다.

제플린은 교활한 사내였다.

그가 황명을 교묘하게 피해간 적이 몇 번 있었다는 걸 자히드라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자히드라는 제플린이 어느 순간 자신을 등지더라도 이상하지 않다고 여겼다.

그런 자신의 고뇌까지 율리안이 읽어낸 것일까.

아니다. 그것 말고도 율리안의 의도 속에 뭔가가 더 있을 것 같다는 직감이 자히드라를 스쳐 지나갔다.

그동안 갖은 물량 공세를 펼치고 편의를 봐주어도 무관심으로 일관하던 율리안이 갑자기 황권에 관심을 표하는 다른 이유가 분명 있을 것이다.

율리안은 자신이 받은 호의를 갚겠다는 허울 좋은 구실을 내세우고 있었다.

하지만 어쩐지 데본셔 백작을 저격하는 것 또한 그의 목적 중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레베카라고 했지…….’

자히드라는 레베카 데본셔를 떠올렸다.

확실히 어떤 남성이라도 사랑에 빠질 만한 빼어난 미모의 여인이긴 했다.

지나치게 유약하긴 했지만 성품도 그만하면 모자람이 없었다.

그렇기에 레베카가 성인이 되는 해에 바다 건너 왕국의 왕자도 그녀에게 구애하러 제국을 방문하곤 했다.

그 해는 레베카, 한 여자의 존재만으로도 유례없이 다사다난한 사교 시즌이었다.

자히드라는 레베카를 향한 구혼자들의 치열한 공방을 여태껏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왜 이제 와서?

레베카와 율리안이 처음 만난 건 아닐 터였다.

무엇보다 애초에 율리안이 레베카에게 관심이 있었다면, 저돌적인 그의 성격상 벌써 무슨 일이 일어나고도 남았다.

‘확실히 승전 연회에서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게 틀림없다.’

자히드라가 황비 소생의 3황자란 신분에서 이 자리까지 올라올 수 있었던 건 결코 운 때문이 아니었다.

취할 패와 버릴 패를 정확히 알아보는 것과 상대방의 욕망을 정확히 읽어내는 것.

조용히 때를 기다리는 인내심, 그리고 쓸모없는 자는 가차 없이 내치는 잔인할 정도의 냉정함이 그를 이 자리에 있게끔 했다.

그는 언제나 인자한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그의 가면 밑에는 사람을 꿰뚫는 날카로운 창과 같은 눈이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그 눈빛은 율리안을 샅샅이 훑고 있었다.

율리안은 황제의 시선을 기꺼운 마음으로 즐겼다.

‘그래, 마음껏 상상하시라. 그리고 내가 원하는 걸 내 손에 가져다주시길.’

황제와 율리안은 신전을 무너뜨린다는 목적지가 같았다.

다른 마음을 품고 있어도 가는 길만 같다면 그는 훌륭한 동행자가 될 터였다.

그리고 황제는 훗날 레베카가 공작 부인이 되었을 때 입지를 단단히 해줄 인물이기도 했다.

율리안이 빙그레 웃었다.

“설마 그런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어디까지나 가정일 뿐입니다. 데본셔 백작이 얼마나 충성스런 자인데요. 바리니카의 비밀 작업실은 폐하께서 준비해주셨으니 남은 건 그를 감시할 데본셔 백작뿐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오늘 황궁으로 불렀네. 대강의 상황은 전해두었고.”

“좋습니다. 일단, 그림이 완성되면 그때 다시 상의해보도록 하죠. 그리고 폐하께 드릴 선물이 있습니다.”

“오, 자네가 내게 선물을? 무엇인가?”

“크로아.”

율리안이 문을 향해 크게 소리쳤다.

크로아가 기다렸다는 듯 검은색 표지의 두툼한 책을 들고 들어왔다.

율리안은 크로아에게서 책을 받아들고 자히드라에게 바쳤다.

“신전의 치부책입니다. 제가 아주 어릴 때부터 차곡차곡 모아온 것이죠. 부디 즐겨 주시기 바랍니다.”

자히드라의 얼굴에 환희가 떠올랐다.

그의 저울이 한쪽으로 크게 기우는 순간이었다.

* * *

“이렇게 된 이상 돌이킬 수 없습니다. 괜찮으십니까?”

돌아가는 마차 안에서 크로아가 조심스레 율리안에게 물었다.

율리안은 미동도 없이 창밖을 보며 말했다.

“어차피 해야 할 일이었어. 오히려 왜 그동안 미뤄왔는지 모를 일이군.”

냉철한 그의 얼굴에 크로아는 더 묻지 않았다.

넓은 마차 안에 잠시 적막감이 내려앉았다.

한참 창밖을 내다보던 율리안은 성문을 발견하고 말했다.

“저곳이 이렌시아인가.”

“아, 네. 성문을 통과하면 이제 데본셔 백작령이네요.”

“그 작자가 다스리기엔 지나치게 아름다운 곳이군.”

율리안은 형형색색의 아름다운 건물이 즐비한 거리를 바라봤다.

인파가 많아 마차가 속도를 천천히 줄였다.

골목 사이로 시끌벅적한 시장이 얼핏 보였다.

율리안은 문득 호기심이 들어 마차를 돌리게 했다.

“저기 시장 쪽으로 한번 가보지. 출출했던 참이야.”

크로아는 머릿속에 커다란 물음표를 그렸다.

율리안은 궁궐에서 티 타임용 샌드위치와 케이크 반판을 먹어 치운 뒤였다.

그런데 배가 고프다고?

‘다시 사춘기가 오셨나…….’

크로아가 의아한 얼굴로 마부에게 행선지를 알려주자, 율리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시장엔 레베카가 어렸을 때부터 먹고 자란 음식들이 있겠지. 잘 찾아보고 요리사에게 일러주어야겠어.’

레베카가 기뻐할 생각을 하니 왠지 기분이 좋아졌다.

율리안은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이렌시아의 활기찬 시장 풍경을 눈에 담았다.

한창 사람 구경을 하던 그의 시선이 익숙한 뒷모습에 머물렀다.

보닛을 깊게 눌러쓴 키 큰 여자였다.

“레…… 베카?”

* * *

“그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엄마, 돈 많이 벌어와!”

마가렛은 글로리아의 품에서 해맑게 배웅하는 잭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

방 안에는 벌써부터 구휼원의 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병아리 같은 입을 종알거리고 있었다.

구휼원에는 홀로 아이를 키우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그들이 바깥에서 일할 동안 글로리아가 거의 무상으로 아이들을 돌봐주고 있었다.

리베르타 구휼원이 데본셔 백작의 소유란 걸 알고도 마가렛이 이곳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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