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아이를 아무런 대가 없이 봐주는 곳은 많지 않았다.
마가렛이 일을 나가 있는 동안 혼자 집에 남겨지는 일이 많았던 잭은 몽유병을 앓을 만큼 정서가 불안정했다.
하지만 이곳에 온 이후로 잭은 눈에 띄게 밝아졌다.
어느 귀족가의 유모 출신이라던 글로리아는 아이들에게 기초적인 교육도 해주었다.
잭을 생각한다면 제 이름을 숨기는 한이 있어도 그녀는 이곳을 떠날 수 없었다.
“얼른 와, 마가렛! 오늘 단체 주문이 들어왔어!”
마가렛이 가게 문을 열자마자 베른이 밀가루 반죽을 하면서 크게 소리쳤다.
마가렛은 헐레벌떡 앞치마를 입고 주방으로 들어갔다.
뜨거운 오븐 열기에 땀이 식을 줄 몰랐다.
남작가 영애였을 때는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을 하고 있지만 그래도 마가렛은 즐거웠다.
빵은 정직했다. 굽는 사람의 재력이나 출신 배경 따윈 상관없었다.
정성을 들여 정량의 재료들을 넣고, 제 시간에 구워내기만 하면 언제나 훌륭한 결과가 나왔다.
가끔 손목이 아리긴 했지만 괜찮았다. 손님이 맛있다고 칭찬할 때면 통증쯤이야 금세 가셨다.
오늘도 빵집의 아침은 정신이 없었다.
점심시간이 훌쩍 넘어서야 마가렛은 겨우 카운터의 작은 의자에 앉아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닦을 수 있었다.
“수고했어. 여기 점심! 마누라가 싸준 특제 샌드위치야!”
“아, 감사합니다.”
베른이 주방에서 팔뚝만큼 커다란 샌드위치를 불쑥 내밀었다.
베른은 항상 마가렛이 제빵 일을 하기엔 너무 말랐다고 혀를 찼다.
그렇게 잔소리를 해대면서도 그는 매일 점심과 저녁을 푸짐하게 챙겨줬다.
가끔 구휼원 식구들을 위해 남은 빵을 싸주기도 했다.
마가렛은 샌드위치 사이에 끼어 있는 두툼한 햄과 신선한 채소를 바라봤다.
고소한 빵 냄새에 없었던 입맛도 돌아오는 기분이 들었다.
막 한입을 하려는데 딸랑하는 맑은 종소리와 함께 가게 문이 열렸다.
하필 이럴 때…….
하지만 마가렛은 불평하지 않았다. 오히려 입가에 미소를 가득 머금고 일어났다.
“어서 오…….”
손님의 등 뒤로 오후의 환한 햇살이 쏟아져 들어왔다.
마가렛은 눈을 크게 떴다.
그녀는 어딘가 낯이 익었다. 변장을 했다지만 마가렛은 단번에 손님의 정체를 알아봤다.
꿈에서도 죽이고 싶었던 그 사람의 얼굴과 똑 닮은 사람.
레베카 데본셔.
“안녕하세요, 마가렛.”
레베카가 보닛을 벗어 손에 들고 말했다.
그녀의 시선이 카운터 위에 올려져 있는 샌드위치를 향했다.
“아직 점심 식사 전이라면 저와 함께하시겠어요?”
“그, 그게 무슨…….”
마가렛이 머뭇거리자 베른이 얼른 주방문을 열고 튀어나왔다.
“당연히 되지요! 저기 뒤뜰에 의자와 테이블이 있으니 거기서 먹으면 딱이겠네!”
“네? 하지만 베른…….”
“마가렛, 네 친구가 찾아온 건 처음 아니냐! 극진히 모셔야지! 사양 말고!”
베른이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그는 뭔가 단단히 오해를 한 것 같았다.
하지만 베른이 신나게 재촉하는 바람에 마가렛은 그의 손에 이끌려 뒤뜰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
“정말 아기자기하게 예쁜 곳이네요.”
마가렛은 레베카의 말을 칭찬으로 들어야 할지 아니면 비꼬는 말로 들어야 할지 잠시 고민했다.
귀족이 제 속내를 바로 내보이는 경우는 거의 없었으니까.
마가렛은 베른의 아내가 직접 만들었다던 테이블을 관찰하는 레베카를 흘깃 쳐다보았다.
딱히 음흉한 속내를 숨기고 있는 것 같진 않았다.
오히려 순수하게 감탄하는 것처럼 보였다.
은은히 퍼지는 그녀의 미소를 지켜보던 마가렛은 불쾌함이 가득 찬 목소리로 말했다.
“레베카 님, 대체 왜 저를 찾아오셨는지는 모르지만, 이곳은 엄연히 제 직장입니다. 이렇게 약속도 없이 불쑥 찾아오시면 곤란합니다.
“아, 죄송해요. 저택에서 빠져나오려면 이 방법밖에 없는지라. 그리고 미리 약속을 잡으면 저를 만나주지 않을 거라 생각했거든요.”
레베카는 딱딱하게 굳어 있는 마가렛의 얼굴을 살폈다.
그녀가 자신에게 이렇게 냉담한 태도를 보일 거라 예상은 했지만 막상 직접 겪어보니 조금 서글펐다.
하지만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니었다.
레베카는 칸나 덕분에 이전 생에서도 알지 못했던 마가렛의 과거를 알게 되었다.
마가렛 베넷의 과거는 제플린의 비틀어진 탐욕으로 난도질당해 있었다.
데본셔 백작저의 빛의 전당에 있는 데프리아 여신상은, 사실 마가렛의 집안에 대대로 내려오는 가보였다.
일찌감치 여신상의 가치를 알아본 제플린은 많은 돈을 주고 매수하려 했지만, 그녀의 아버지 기디안 남작은 가보를 내어 주지 않았다.
기디안 남작은 소소한 행복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었다.
단출한 식구들이 먹고살 만큼의 재산만 있다면 큰 욕심을 부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와 달리 제플린은 가지고 싶은 걸 기어코 가져야 하는 이였다.
그는 언제나 끝없는 자신의 욕망을 채울 방법을 찾았다.
기디안 남작은 그런 제플린의 욕망을 과소평가했고, 이는 곧장 비극으로 이어졌다.
제플린의 사냥개는 고요한 밤을 틈타 기디안 남작저에 불을 질렀다.
거대한 불길은 기디안 남작가의 평화로운 한때를 집어삼켰다.
잔인한 화마 속에서 살아남은 기디안가의 사람은, 일주일 전 과부가 된 외동딸 마가렛뿐이었다.
그녀의 남편 래드번 베넷은 천애 고아였다.
때문에 사고로 남편을 잃은 마가렛에게 남은 건 친정 식구들밖에 없었다.
제플린은 그런 그녀의 모든 것을 앗아갔다.
마가렛은 임신한 몸으로 무너져가는 집안을 살리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다.
하지만 귀하게만 컸던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결국 여신상을 포함한 가문의 전 재산이 경매에 넘어갔다.
그리고 제플린은 기다렸다는 듯 여신상을 낙찰받았다.
여신상을 살펴보러 왔던 제플린에게 마가렛은 분노하며 달려들었다.
‘당신이지! 당신이 이렇게 만든 거지? 그깟 조각상 하나 가지자고 우리 아버지를 죽였어?’
‘하! 어이가 없군. 증거도 없이 나를 몰아붙이다니 배짱 한번 두둑하군. 당신 집안에 일어난 비극은 유감이지만, 수습하지 못한 당신 탓이란 생각은 안 해봤어? 그렇게 억울하면 신전에나 달려가 봐. 혹시 알아, 여신께서 자비로운 행운이라도 내려 주실지.’
제플린은 기어오른 벌레를 짓밟듯 마가렛을 매몰차게 밀쳤다.
그때 제플린이 보인 차가운 눈빛을 마가렛은 아직까지도 잊지 못했다.
마가렛은 떠오르는 옛 기억을 더듬거리며 차갑게 레베카를 노려보았다.
그녀가 제플린과 다른 사람이란 건 잘 알고 있었다. 리베르타 식구들을 구해준 은인이라는 사실도.
하지만 제플린을 닮은 레베카의 얼굴을 보면 울분이 터져 나왔다.
그녀는 파렴치한 인간 말종과 살을 맞대고 사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마가렛은 레베카가 제플린과 똑같이 싫었다.
레베카와 마주 앉아 있는 이 순간이 마치 가시방석에 앉아 있는 것처럼 끔찍했다.
문득 화가 치밀어 올랐다.
겨우 회복했는데, 데본셔는 또다시 자신을 괴롭히려 찾아왔다.
마가렛은 치맛자락을 꾹 움켜쥐었다.
얼른 여기서 벗어나 신성한 노동의 현장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레베카는 앞에 놓인 제 몫의 샌드위치를 조금 베어 물었다.
“으음, 빵이 참 맛있어요. 이것도 마가렛이 만든 건가요?”
레베카는 가증스럽게도 아무것도 모른 척 해맑게 웃었다.
“본론만 이야기해주시겠어요? 저희가 그런 소소한 담소를 나눌 만한 사이는 아니지 않나요?”
순간 내뱉은 쌀쌀한 어투에 마가렛은 스스로 움찔했다. 어찌 됐든 자신은 레베카에게 굽실거려야 할 처지였다.
레베카가 제플린에게 한마디 언질만 줘도 자신과 잭은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품은 데본셔를 향한 분노는 그까짓 염려 따위로 쉬이 사라질 것이 아니었다.
불 속에서 죽어가던 아버지와 한순간에 빼앗긴 삶…….
마가렛은 레베카의 푸른 눈이 깜빡거릴 때마다 몸서리쳤다.
레베카는 적대적인 마가렛의 태도에도 입가의 미소를 거두지 않고 말했다.
“마가렛이 절 싫어하는 이유를 충분히 이해해요. 제플린 때문이죠?”
마가렛은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찬물이 든 컵을 만지작거렸다. 차가운 얼음에 분노를 묻어 둘 수 있을까 싶어서였다.
레베카는 마가렛의 손에 묻어나는 물기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컵을 쥔 그녀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
레베카의 가슴 한편이 시큰거려 왔다.
제플린 대신 제가 무릎을 꿇고 빌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그녀는 요동치는 감정을 고요히 가라앉혔다.
“마가렛 가문의 일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군요. 어떤 걸로도 보상할 수 없는 일이란 걸 알아요.”
“그래서 지금 사과나 하자고 찾아오신 겁니까?”
“그럴 리가요. 그건 제플린의 잘못이잖아요. 엄밀히 말하자면 전 마가렛의 존재도 잘 몰랐을 때였는걸요. 하지만 저와 제플린이 부부인 이상 마가렛은 똑같이 저를 미워하시겠죠.”
“네. 잘 알고 계시는군요. 구휼원에 몸을 의탁하고 있는 주제에 뻔뻔하다고 생각하실지는 모르겠지만요. 레베카 님, 저는 구휼원에 있는 동안 치즈 한 조각도 거저 받은 적이 없습니다. 매달 집세 가격만큼 구휼원에 기부도 하고 있고요.”
“진정하세요. 마가렛. 절 미워하는 걸 따지러 온 게 아니에요. 무리한 부탁이겠지만 부디 지금 이 자리에선 레베카 데본셔가 아닌, 레베카라는 사람으로 봐주시면 안 될까요? 전 당신께 일자리를 제안하러 왔어요.”
“일자리를……?”
“네. 당장 일을 시작하라는 건 아닙니다. 적어도 몇 달 후의 일이에요. 제가 사업을 하나 할까 하는데 그곳의 파티셰가 되어주세요.”
마가렛은 놀라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저는 일개 동네 제빵사입니다. 귀족들의 고급 디저트류 따위는 만들 줄 모릅니다.”
“만드는 법이야 배우면 되죠. 제 제안을 수락하신다면 충분한 교육을 받게 해드릴 겁니다. 마가렛이라면 금방 배울 거라고 생각해요.”
마가렛의 얼음장 같던 표정이 잠시 흔들렸다.
레베카는 말을 이어갔다.
“아, 보수는 전 수익의 절반입니다. 일종의 동업을 제안하는 겁니다. 당신은 그만큼 받을 자격이 있어요.”
“예에?”
마가렛은 하마터면 찻잔을 엎지를 뻔했다.
수익의 절반이라니.
그 돈이 있다면 잃어버린 작위를 되찾고, 잭을 좋은 아카데미에 보낼 수 있을 텐데…….
잭의 미래를 그리자 어미로서 순간 욕심이 들었다.
하지만 마가렛은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아무리 돈이 좋아도 제플린과 사업 파트너가 될 수 는 없는 일이다.
그런 마가렛의 생각을 읽었는지 레베카는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머뭇거리시는 게 당연해요. 덧붙이자면, 이 사업은 데본셔 백작과 무관합니다. 제플린은 제가 사업을 계획하는지도 몰라요. 그러니 이런 차림으로 몰래 나왔지요. 더 자세히 말씀드리고 싶지만, 지금은 어느 마음씨 좋은 투자자께서 도와주셨다고 말씀드릴 수밖에는 없군요.”
“하지만 왜 제게 그런 제안을 하시는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실력 좋은 파티셰들은 널리고 널렸어요. 그렇다고 레베카 님과 제가 특별한 관계가 있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아니다. 레베카는 마가렛을 잘 알았다.
가장 힘들 때 일자리를 마련해 준 것도 그녀였고, 친정을 찾아갈 수 없었던 레베카의 산후조리를 도와줬던 것도 마가렛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