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레베카는 마가렛이 만든 살롱의 시작과 번성까지 모든 과정을 지켜봐 왔다.
그녀는 누구보다 열성적인 사업가이자 천재적인 파티셰였고, 동시에 훌륭한 어머니였다.
그녀에게 입은 은혜가 없다고 해도 마가렛은 사업에 꼭 필요한 인재였다.
레베카는 옛 생각에 잠겨 먹먹한 눈으로 마가렛을 바라봤다.
마가렛은 그걸 다른 의미로 받아들였는지 수치심에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저를…… 동정하시는군요.”
“그건 오해가…….”
“거짓말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당신이 얼마나 훌륭한 성녀 같은 존재인지 사람들에게 귀에 피딱지가 앉도록 들어 왔으니까요. 하지만 저는 그런 알량한 동정은 필요 없습니다. 제 앞길은 제가 알아서 해요. 당신의 적선이 필요할 만큼 불쌍한 사람 아닙니다.”
마가렛은 이 자리가 불쾌해 미치겠다는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문을 향해 손가락을 뻗었다.
“그럼 이제 할 이야기는 없는 걸로 알고 돌아가 주시면 좋겠네요.”
레베카는 철옹성 같은 마가렛의 태도에 잠시 할 말을 잃었다가 이내 고개를 떨구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니, 좀 부끄럽네요.”
“예?”
레베카가 얼굴을 들었다. 그녀의 눈에 깊은 슬픔이 묻어났다.
“마가렛, 저는 누군가를 동정할 만큼의 기력이 없어요. 전 제 삶이 너무 벅차고 외롭고 또 견디기 힘들어 다른 이를 돌아볼 수 없는 사람이에요.”
“…….”
“전 철저하게 이기적인 사람입니다. 당신을 찾아온 것도 제게 이득을 주는 사람이라 판단했기 때문이에요. 다른 의도는 없어요. 그리고 구휼원 식구들을 구해줬던 제 행동 또한 별반 다르지 않아요.”
레베카가 처음 타인에게 도움을 손길을 내민 건 다분히 충동적인 일이었다.
데본셔 백작 부인이 된 레베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저택에 가만히 앉아 있는 것밖에 없었다.
누구도 그녀를 필요로 하지 않았고, 누구도 그녀에게 할 일을 주지 않았다.
레베카는 화려한 방 안에 앉아 어릴 적 꿈꾸었던 수많은 꿈이 무너져 내리는 걸 묵묵히 지켜봤다.
그러던 어느 날 드레스를 맞추러 가는 길에 어린 거지에게 적선을 한 적이 있었다.
마침 주머니에 돈이 있었고, 그가 의상실 근처에서 구걸하고 있었기에 일어난 우연이었다.
‘감사합니다! 부인은 제 생명의 은인이세요!’
레베카는 그 한마디에 잠시나마 숨이 트였다. 속이 뻥하고 뚫리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이어진 묘한 희열감이 그녀를 가득 채웠다.
누군가가 나를 필요로 한다. 내 도움을 기뻐한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그게 시작이었다.
그 뒤로 레베카는 우울감이 도질 때마다 마치 중독된 것처럼 누군가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기 시작했다.
고맙다는 한마디가 주는 쾌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위선을 잘 알았다. 그렇기에 단 한 번도 자신이 선하다 생각한 적이 없었다.
그들에게 베푼 호의는 어디까지나 제 욕구를 충족시키고자 하는 행동이었다. 어디까지나 자신만을 위한 일방적인 행동이었다.
그러니 이기적인 자신의 행동에 동정이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았다.
자신은 성녀도, 그렇다고 악녀도 아니었다.
자신은 그저 욕심 많은 한 명의 인간일 뿐이었다.
“그러니 부디 제 손을 잡아주세요. 마가렛, 저는 그 누구보다 당신이 필요해요. 같이, 우리 같이해요.”
마가렛은 다분히 당황스러운 얼굴로 레베카가 내미는 손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레베카 님은 천사라니까! 보통 사람이 아니야!’
맹목적이다시피 한 구휼원 사람들의 레베카 찬양은 진절머리가 났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마가렛은 레베카에 대한 악감정을 더욱더 착실히 키워나갔다.
그녀도 부유한 귀족이었던 때가 있었다.
그때 자신이 가난한 이들에게 적선을 베풀 때마다 어떤 생각을 했는지 되새겼다.
우리에 갇힌 불쌍한 동물들에게 먹이를 던져 주는 호의,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동정이었다.
여느 귀족들이 그렇듯 레베카도 다르지 않을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도 성녀 취급을 받다니 우스웠다.
마가렛은 레베카가 그런 제 이미지를 즐기고 있다고 확신했다.
하지만 지금 눈앞의 레베카는 그녀의 예상과 달리 민낯을 훤히 드러내고 있었다.
귀족으로서 품위 따위엔 관심 없다는 듯 모든 걸 내려놓고 마가렛에게 애원하고 있었다.
혼란스러웠다. 그녀가 알던 세상이 차츰 무너지고 있었다.
마가렛은 말없이 레베카가 내민 손을 테이블로 내리게 했다.
“생각을…… 조금만 생각할 시간을 주세요.”
레베카의 눈이 커졌다가 이내 반달 모양으로 휘었다.
단단한 마가렛의 마음이 조금이라도 흔들렸다는 게 기뻤다.
이전 생에서 마가렛은 레베카에게 우상과도 같은 존재였다.
마가렛은 가문이 몰락했음에도 온전히 제 힘으로 아이를 키워내고, 사업을 일으켰다. 후엔 작위까지 되찾았다.
마가렛의 밑에서 일하면서 레베카는 그녀처럼 되고 싶었다.
어떻게 하면 그녀처럼 끊임없이 생명력을 분출할 수 있을까.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태풍이 몰아쳐도 꺾이지 않는 커다란 고목 같은 그녀의 앞에서 레베카는 자신이 쓸려나가는 잡초보다 못하다고 생각했다.
그런 마가렛이 제 편에 서주기만 한다면, 레베카는 그 무엇보다 든든한 뒷배를 얻은 기분이 들 것 같았다.
레베카는 마가렛의 손이 스쳐 지나간 제 손을 망연히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칸나 편으로 답을 보내주세요. 장담하건대, 제 손을 잡은 일을 후회하지 않을 겁니다.”
* * *
“필요 없다고 그랬는데…….”
레베카는 빵이 가득 들어찬 종이봉투를 들고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손님을 빈손으로 돌려보낼 수 없다며 베른이 억지로 떠안긴 탓이었다.
이걸 들고 그대로 백작저로 돌아갔다간 성가신 일이 벌어질 게 분명했다.
백작저는 외부 음식에 엄격했다. 그렇다고 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다.
레베카는 망연히 봉투 안의 빵을 내려다보았다.
잠시 예전 생각이 떠올라 레베카는 잠시 회한에 잠겼다.
베른은 여전히 따뜻한 빵집 주인이었다.
그는 이전 생에 레베카가 손님으로 방문할 때마다 빵 몇 개를 덤으로 주고는 했었다.
‘오랜만에 먹어보는 샌드위치, 맛있었지.’
문득 허기가 찾아왔다.
그러고 보니 점심 식사를 거의 먹지 못했던 것 같다. 샌드위치도 긴장해서 겨우 맛만 본 셈이었고.
레베카는 봉투 안에서 크림빵을 꺼내 들었다.
길거리에서 무언가를 먹는다는 사실에 잠시 머뭇거렸지만 지금의 그녀는 귀부인 레베카가 아니었다.
옷차림이 주는 해방감이 이리도 달콤하다니.
죄책감 없이 빵 한입을 베어 물자 달짝지근하고 부드러운 크림이 혀 안에 배어들었다.
절로 웃음이 나는 맛이었다.
길을 걸으면서 음식을 먹다니 수치스러운 일이었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시간이 금이었던 이전 생에선 식사를 이런 식으로 해결하던 적이 많았었다.
“수잔!”
크림빵을 두 입쯤 먹었을까. 누군가가 레베카의 손목을 확 낚아챘다.
그 탓에 바닥에 빵이 떨어졌다.
레베카는 망연자실하게 사내의 발에 짓밟히는 빵의 최후를 바라봤다.
크림이 주욱 밖으로 튀어나왔다.
그녀는 매서운 눈을 치켜떠 감히 제 팔을 잡은 사내를 노려보았다.
어느 것 하나 잘난 곳 없는 사내가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는 레베카의 냉혹한 눈빛에 흠칫 몸을 떨다가 손에 힘을 주었다.
손목이 시큰거려 와서 레베카는 눈살을 찌푸렸다.
사내는 눈을 부릅뜨고 레베카의 어깨를 잡았다.
“대체 왜 내 고백을 받아주지 않는 거야! 분명 너도 좋다고 했잖아. 물론 말은 하지 않았지만 항상 내게 웃어주었잖아.”
아아, 그 한마디로 레베카는 순식간에 상황을 정리했다.
수잔이 시장에 갔을 때 곤란하게 하는 사내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충고를 해주기는 했었다.
최근 들어 그녀를 쫓아다니는 사내라고 했던가.
그런데 얄팍한 사랑인가 보다. 변장한 얼굴도 알아보지 못하다니.
레베카는 매몰차게 손을 쳐냈다.
“계속 따라오면 치안대에 넘길 거야.”
“하. 내가 그런 거 따위를 무서워할 것 같아? 우리 형이 치안대장인 거 잊었어? 그만 튕기고 이제 내 품으로 와, 수잔.”
“꺼져. 너 따위랑 말도 섞고 싶지 않아.”
“뭐라고?!”
사내가 레베카를 골목 안으로 밀쳤다. 그 탓에 빵 봉투가 처참하게 찢어져 바닥에 나뒹굴었다.
‘내 빵…….’
레베카는 분노한 얼굴을 쳐들었다.
사내는 순간 움찔했지만 이내 씩씩거리며 주먹을 쥐었다.
“그, 그렇게 노려보면 어쩔 건데! 역시 말로 해서는 안 되겠어.”
어쩜 이렇게 변한 게 없을까, 사람들은.
레베카는 머리를 고정하고 있던 기다란 핀을 빼내어 손에 살포시 쥐었다. 그리고 사내의 급소를 노려보았다.
이전 생에서 혼자 애를 데리고 살면서 이런 일은 달마다 한두 번 꼴로 있었다.
완력으로는 당연히 상대가 안 되니 레베카는 많은 힘을 들이지 않고 상대방을 제압하는 기술을 배웠다.
‘이것도 마가렛이 가르쳐 준 거였지…….’
사내가 달려들었다.
레베카가 날카로운 핀을 꺼내 드는 순간 남자가 외마디 비명을 내며 기절했다.
누군가가 그의 얼굴을 가격했다.
“괜찮아?”
율리안이었다. 그는 단 한 번의 일격으로 사내를 기절시켰다.
사내의 코에서 난 피가 그의 왼쪽 손에 묻어 뚝뚝 떨어졌다.
그는 피가 레베카에게 묻을세라 피 묻은 손을 뒤로 숨기고는 반쯤 서서 얼어 있는 그녀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레베카의 몰골을 보고 잔뜩 미간을 구겼다.
“또 이런 터무니없는 짓을…….”
레베카는 이곳과 전혀 어울리지 않게 말끔하게 차려입은 율리안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아래위로 훑어봤다.
“율리안? 여긴 대체 어떻게…….”
“지나가던 길에 네가 보이기에.”
“나를 알아봤다고?”
골목 밖이 소란스러웠다. 누군가가 신고를 한 것 같았다.
율리안은 대답 없이 레베카에게 제 팔을 내밀었다.
“일단 보는 눈이 많으니 내 마차로 가지.”
“괜찮아. 빨리 돌아가 봐야 해.”
“그 꼴을 하고 말이야?”
율리안이 품에서 손거울을 꺼내 레베카의 얼굴을 비췄다. 거울에 손때가 묻은 걸 보니 항상 들고 다니는 듯했다.
레베카는 떨떠름하게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바라봤다.
“아…….”
확실히 백작저에 그대로 돌아갈 만한 몰골은 아니었다.
보닛이 벗겨진 탓에 머리가 헝클어져 있었고, 주근깨 화장도 많이 지워져 있었다.
레베카는 군말 없이 율리안의 팔을 잡았다.
팔뚝에 무게감이 전해져 오자 율리안의 입가에 미미한 웃음이 번졌다.
이어서 그는 쓰러져 있는 사내를 발로 툭툭 치고 있는 크로아에게 말했다.
“그거 처리해.”
“예, 예. 분부대로 해야죠…….”
크로아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