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망친 백작 부인이 돌아왔다-35화 (35/232)

35.

“…….”

“…….”

레베카가 마차에서 변장을 고치는 동안 널따란 마차 안에는 침묵이 감돌았다.

‘혹시 몰라 화장 도구를 가져오기 잘했지.’

레베카는 아까부터 아무 말 없이 자신을 바라보기만 하는 율리안이 조금 불편했다.

율리안은 그녀와 눈이 마주치면 짐짓 딴청을 피웠다.

하지만 레베카가 다시 시선을 거두면 그는 다시 레베카를 쳐다봤다.

“할 말이라도 있는 거야?”

“아니.”

“답답하게 쳐다보지만 말고 할 말 있으면 하시지요. 공작님?”

“아무것도 아니야. 하던 거 계속해.”

율리안은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레베카의 의문스러운 눈초리가 잠시 그의 얼굴에 머물렀다.

율리안은 그런 레베카에게 하고 싶은 말을 차마 입 밖으로 내밀 수 없었다.

‘내가 왜 이러지…….’

처음엔 그저 조용히 뒤만 따를 생각이었다.

대체 저 여자의 머릿속에 뭐가 들었는가 싶어서.

그녀의 첫 번째 행보는 예상대로 타니샤 상회였다.

레베카를 안으로 들이면서 타니샤는 숨어 있는 율리안과 크로아 쪽을 노려봤다.

기척을 숨겼는데도 알아차린 것 같았다.

저를 바지사장으로 앉혀서 난리를 쳤다고 하던데, 율리안은 은근슬쩍 걱정이 들었다.

타니샤의 공격적인 말투에 레베카가 상처라도 받지 않을까 했다.

하지만 그건 쓸데없는 기우였다.

다시 상회의 문이 열렸을 때, 타니샤는 여태껏 율리안에게도 보여준 적 없는 완벽한 충신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타니샤의 꼬리가 세차게 흔들리는 환영을 본 것 같기도 했다.

레베카는 그런 타니샤를 귀엽다는 듯 보고 있었고.

“쟤, 쟤가 저런 표정을 지을 리가 없는데? 대체 뭔 수를 쓰신 거랍니까?”

제 여동생의 포악한 성질을 누구보다 잘 아는 크로아는 그 광경을 입을 떡 벌리고 바라봤다.

놀란 건 율리안도 마찬가지였다.

레베카의 과거에 대한 조사는 이미 끝냈다.

수행원들이 올린 보고서에 적힌 내용은 율리안이 지금까지 레베카에 대해 알고 있는 것과 별반 다를 것 없었다.

무엇이 그녀를 변하게 했을까. 아니면 원래 저런 모습이었을까.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그가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레베카는 어느덧 두 번째 행선지로 향했다.

그녀가 향한 곳은, 낡은 간판이 흔들리고 있는 빵집이었다.

‘좋아하는 곳인가?’

율리안은 빵집 이름을 잘 기억해 두었다.

그리고 나중에 가게로 들어가 그녀가 뭘 사 갔는지 파악할 계획이었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레베카가 빵 봉투를 한아름 안고 가게에서 나왔다.

레베카의 발걸음이 무척이나 가벼워 보여 율리안도 덩달아 피식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그녀가 베어 무는 크림빵을 정신없이 쳐다보고 있는데 문득 불길한 기운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 사달이 난 거고.

아직도 그때 생각만 하면 열이 뻗쳤다.

율리안은 그 사내가 레베카의 손목을 잡아챘을 때부터 이미 머릿속에서 그를 찢어발기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곧바로 끼어들지 않고 머뭇거렸다.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사내와 대치하는 레베카를 보고 있자니 제가 나서는 게 주제 넘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대로 나서서 자신이 미행했노라고 밝히는 것도 창피했다.

생각해 보면, 몰래 뒤를 밟은 건 그 사내나 자신이나 같았다.

게다가 그녀를 따라다닌 이유를 뭐라 설명할 것인가. 자신도 그 정확한 이유를 알 수 없는데.

하지만 그자가 레베카를 밀치자 그런 이성 따위는 마비되고 몸이 먼저 나갔다.

사내를 때려눕힌 순간 레베카가 야무지게 쥐고 있던 기다란 머리핀을 발견하고 아차 싶었다.

요새 호신용으로 끝이 뾰족한 머리핀을 이용하는 여인들이 늘고 있다고 들었다.

아마 레베카는 사내를 제압할 참이었던 것 같았다.

‘실수했다.’

레베카가 자신을 바라보는 눈에는 여전히 살기가 남아 있었다.

제가 나서지 않았어도 레베카는 그 치를 이기고도 남았으리라고 율리안은 직감했다.

그 사실이 당황스럽고 웃기면서도 레베카를 한 번 더 생각하게 했다.

저 여자가 대체 뭐기에 길 잃은 강아지마냥 끙끙거리게 되는 걸까.

그리고 자신을 발견하고 부드럽게 휘어지는 푸른 눈을 마주한 순간부터 연이어 드는 생각 또한 그를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칭찬받고 싶다.’

제플린을 붙들기 위해 자신이 황제에게 어떤 제안을 했는지, 그 사내를 후환 없이 어떻게 처리하게 했는지, 그동안 레베카가 자신에게 맡긴 일들을 얼마나 훌륭하게 해냈는지.

모두 털어놓고 싶었다.

그래서 지난밤처럼 그녀가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고맙다고 말하기를 그는 내심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게 통증과도 같던 그 간질거리는 기분을 한 번 더 느껴보고 싶었다.

아픈데, 너무나 아픈데도 레베카와 함께 찾아오는 심장통이 싫지 않았다.

그 사실을 인정하기가 어려워 율리안은 헛웃음을 내뱉었다.

‘이래선 개새끼나 다름없군.’

그건 고양이를 섬기는 요하네스 가문에 있어 크나큰 모욕이었다.

* * *

“고마워. 덕분에 살았어.”

치장을 다 마친 레베카가 거울을 돌려주며 말했다.

그 말에 율리안의 눈빛이 일렁였으나 곧 실망감에 가득 찬 얼굴로 시선을 떨구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 구석이라도 있는 건가?’

레베카는 원래도 정상은 아니었지만 오늘따라 더 이상하게 구는 율리안에게 적응하기 힘들었다.

그때 마차 밖에서 크로아의 음성이 들려왔다.

“공작님, 말씀하신 것들을 가져왔습니다.”

“아, 들이도록.”

율리안의 대답에 마차의 문이 활짝 열리더니 마부와 크로아가 여러 가지 음식을 커다란 책상 위에 가지런히 정리하기 시작했다.

레베카는 눈을 크게 뜨고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율리안의 마차는 겉보기엔 보통 귀족들이 타고 다니는 마차와 별반 다를 바 없어 보였다.

오히려 평균적인 마차보다 투박한 장식에 크기도 작은 편이었다.

하지만 문을 열면 외양과 전혀 다른 공간이 펼쳐졌다.

마차 서너 대는 합쳐 놓은 만큼의 공간이었다.

푹신한 의자는 율리안 같은 체구의 남성도 편히 누울 수 있을 만큼 넓었고, 가운데에는 넓은 테이블이 있었다.

쿠션에 놓인 자수부터 짐을 두는 상자까지, 마차 안은 한눈에도 고급품임을 알 수 있는 물건들로만 채워져 있었다.

그러나 장인의 손길이 깃든 테이블 위에 차려지는 음식 행렬은 의외의 것들이었다.

“이건…… 시장에서 파는 음식이네.”

레베카의 부모는 서민 음식이나 귀족 음식을 가리지 않았다.

덕분에 레베카는 어릴 때부터 향토색이 짙은 음식들을 자주 접했다.

하지만 백작 부인이 되고 나서는 제플린이 서민 음식을 싫어했기에 입에도 댈 수 없었다.

레베카는 오랜만에 보는 추억의 음식이 반가워 눈을 빛냈다.

그녀가 관심을 보이자 율리안이 싱긋 웃었다.

“이곳 음식이 어떨지 궁금해 사 온 것인데, 이렇게 된 거 당신도 들지 그래. 혼자 먹으면 맛없어. 양이 많기도 하고.”

레베카는 잠시 고민했지만 거절했다.

“아쉽게도 얼른 돌아가 봐야 해. 다음에 같이 먹도록 해.”

“그래도 한입이라도…….”

꼬르륵-

누구의 배에서 난 건지 명확한 소리가 들려왔다.

레베카의 얼굴이 화르륵 달아올랐다.

이럴 때 소리가 날 게 뭐람.

율리안이 쿡쿡 웃으며 닭고기와 채소가 번갈아 끼워진 꼬치 하나를 내밀었다.

“당신 배는 그렇게 생각 안 하는 것 같은데? 이거 하나만 먹고 가. 이게 냄새가 제일 좋은 것 같아.”

레베카는 짓궂게 웃는 율리안을 한 번 흘겨보고는 그가 내미는 닭꼬치를 받아들었다.

윤기가 차르르 흐르는 양념에 푹 절인 닭고기에선 익숙한 향이 났다.

냄새를 한번 들이켜자 숨길 수 없는 식욕이 치밀어 올랐다.

“그럼 한 입만…….”

그리고 레베카는 잠시 이성을 잃었다.

테이블 위에 올려진 수십 개의 요리를 한입씩 맛보고서야 레베카는 수저를 놓았다.

그리고 머쓱해진 얼굴로 입가를 닦았다.

‘아는 맛이 무섭다더니…….’

배가 불러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그렇게 많이 먹지도 않았는데 벌써 이 정도로 힘들다니.

오랫동안 백작가의 식단에 길든 탓이었다.

그 모습을 율리안이 심각하게 바라보았다.

“혹시, 백작이 밥을 굶기기라도 하는 건가? 고작 그 정도 먹어놓고 배가 부르다고?”

“굶긴 적은 없어. 뭐, 죽지 않을 만큼만 먹기는 해. 이런 가녀린 허리를 유지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

그 말에 율리안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허리 안에 장기가 다 들어가 있다는 사실도 놀라울 뿐인데. 대체 그걸 유지하려는 이유가 뭐야.”

“장기라니…… 당신은 정말 말에 거침이 없네. 뭐, 아름다움의 기준이야 사람마다 다른 거니까. 그나저나 이제 정말 가 봐야겠어.”

“태워다줄게.”

“됐어. 이런 마차에서 내리는 걸 들키기라도 했다간 계획이 다 틀어져 버려.”

“그럼, 중간에 다른 마차를 타고 가. 바로 탈 수 있게 인적이 드문 곳에 내려 줄게. 이럴 때 내 능력 좀 써.”

“그렇게까지 해준다면야 사양하지 않을게.”

사실 레베카도 마석으로 움직인다는 마차를 한 번쯤 타보고 싶었다.

다나에가 어찌나 감탄을 쏟아냈던지 내심 궁금했던 참이었다.

레베카가 조그맣게 고개를 끄덕이자 곧 마차가 출발했다.

율리안은 호기심으로 가득 찬 눈을 반짝이는 레베카를 흐뭇하게 바라봤다.

그는 크로아에게 마차를 천천히 몰아 달라고 조그맣게 속삭였다.

크로아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봤다.

율리안은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들떠 있는 레베카를 내내 훔쳐봤다.

* * *

“드레스가 안 맞는 건 아니겠지.”

마차에서 내린 레베카는 불어난 배를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부터는 빨리 움직여야 했다. 이미 칸나와 약속한 시간이 지난 지 오래였다.

방 안에선 수잔이 발을 동동 구르고 있을 터였다.

그러니 최대한 빨리 정원을 가로질러서 방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동안 누군가와 정면으로 마주치거나 대화를 해서도 안 됐다.

레베카가 최단 경로를 가늠하고 있을 때, 금으로 장식한 흰색 마차가 굉음을 내며 그녀의 곁을 지났다.

마차를 알아본 레베카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제플린이 돌아왔다.

* * *

“레베카는?”

“마님은 방에서 쉬고 계십니다. 오셨다고 아뢸까요?”

“아니, 됐다. 내가 직접 올라가지.”

저택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제플린은 레베카를 찾았다. 아무래도 오늘 이후로 한 달 정도는 집으로 돌아오지 못할 것 같았다.

‘그대는 내게 충성한다고 하지 않았나.’

제플린은 이를 아득 깨물었다. 대체 누가 무슨 수를 썼기에 황제가 그토록 자신을 고집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건 그렇고, 신전을 모욕하는 그림이라니…….’

무모한 도박이었다.

이를 신전에게 들키는 날엔 황제가 꼬리를 자르고 자신에게 다 덮어씌울 거라는 걸 그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그렇다고 겁이 난 건 아니었다.

은밀히 일을 진행하는 건 자신이 있었으나, 어쩐지 영 꺼림칙한 기분이 들었다.

탁-

생각에 잠겨 계단을 오르던 제플린은 문이 닫히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레베카의 방에서 나는 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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