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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친 백작 부인이 돌아왔다-36화 (36/232)

36.

‘누가 들어간 건가…….’

고용인이었다면 응당 자신에게 먼저 인사를 했을 터인데.

제플린은 의심스러운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방문을 여는 순간.

“제플린!”

얇은 슈미즈 차림의 레베카가 와락 안겨들었다.

레베카는 그를 방문 밖으로 내몰면서 옷장 문이 닫히는 걸 확인했다.

하늘색 드레스 자락이 비죽 튀어나왔지만 칸나가 눈치껏 그 앞에 섰다.

“레베카? 이제 걸을 수 있는 거야?”

제 발로 걸어서 안긴 레베카를 보며 제플린은 감격에 겨워 말했다.

레베카가 수줍게 웃었다.

“그렇게 보지 말아요. 화장을 막 지운 터라 별로 예쁘지 않아요.”

“당신, 무리하는 거 아니야? 언제부터 걸을 수 있던 거지?”

“얼마 안 됐어요. 당신을 놀라게 해주려고 그동안 몰래 걷는 연습을 하고 있었어요.”

“아아, 사랑스러운 레베카. 당신을 보니 오늘 하루 피로가 다 날아가는 것 같아.”

제플린은 레베카를 힘주어 안았다.

레베카는 속으로 거꾸로 숫자를 세며 그 순간을 견뎠다.

“당신은 자신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알고 있나?”

제플린은 레베카의 어깨에 파묻었던 얼굴을 뗐다. 그리고 안주머니에서 장갑을 꺼내 손에 끼웠다.

곧이어 제플린은 그녀의 얼굴을 부드럽게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그의 손은 레베카의 눈과 코를 더듬어 내려갔다.

손가락은 곧 그녀의 입술을 부드럽게 지분거리며 희롱했다.

제플린의 입술이 젖어들어 가는 걸 지켜보던 레베카는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곧이어 이어질 그의 행동에 굳어가는 얼굴을 숨길 수 없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이 다 쳐다보잖아요. 부끄러워요.”

엇갈린 시선에 제플린은 멈칫했다.

그의 눈에 당혹 어린 이채가 서렸지만, 그건 찰나의 순간이었다.

제플린의 눈꼬리가 아름다운 호선을 그렸다.

“그래. 수줍음은 여인의 미덕이지.”

또다시 제플린이 끈적하게 레베카를 바라봤다.

레베카는 이 분위기를 깨버리고자 화제를 돌렸다.

“오래 나가 있겠다고 하시더니, 일찍 돌아오셨네요.”

“부인의 말투가 내가 빨리 돌아온 걸 탐탁지 않아 하는 걸로 들리는데?”

예리하게 안색을 훑는 그의 눈빛에 레베카는 움찔했다.

예전부터 촉 하나는 기막히게 좋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당황한 티를 내지 않고 레베카는 더더욱 입매를 틀어 올리며 말했다.

“그럴 리가 있나요. 너무 기뻐서 그랬답니다.”

제플린은 그가 사랑해 마지않는 레베카의 미소를 바라봤다.

레베카는 화장기 없는 얼굴마저 그의 마음에 쏙 드는 완벽한 여자였다.

제플린은 웃음을 흘리더니 고개를 저었다.

“알고 있었어. 그저 농이야. 하지만 오래 나가 있겠다는 건 정말이야. 잠시 짐을 챙기러 왔을 뿐. 내일 아침 일찍 나가봐야 해.”

집을 비우긴 하는구나.

레베카는 안도했다.

“그러니까, 레베카…….”

제플린이 레베카의 허리를 잡아끌어 제 몸으로 바싹 붙였다.

“오늘 밤은 나와 함께하자. 지난번과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게 오늘은 내가 찾아올게.”

달짝지근한 그의 숨결에 레베카는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엣취!”

제플린이 레베카의 체향을 들이마시는 순간 갑작스레 재채기가 나왔다.

그는 잠시 어리둥절해 있다가 코를 잠시 훑었다.

“그럼, 기다리고 있어.”

제플린은 의미심장한 웃음을 남기고 방을 나갔다.

“레베카 님!”

제플린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레베카는 다리에 힘이 풀려 잠시 바닥에 주저앉았다.

칸나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레베카를 향해 득달같이 달려왔다.

레베카는 달려오는 칸나에게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난 괜찮아. 그나저나 내가 늦게 와서 걱정했지? 미안해, 칸나.”

“아닙니다. 그보다 계획하신 일이 틀어져서 어떡합니까. 이러다가 정말 백작과…….”

“칸나! 손이 왜 이래!”

칸나의 걱정 섞인 목소리를 뒤로하고 레베카가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주먹을 얼마나 세게 그러쥐고 있었는지, 칸나의 손바닥에 찍힌 손톱자국을 따라 피가 뚝뚝 떨어졌다.

칸나도 그제야 제가 손을 다친 걸 깨닫고는 황급히 레베카에게서 손을 빼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피가 묻을 수 있으니 제게 손대지 않으시는 게 좋겠습니다.”

“칸나, 너는 정말…….”

아무 일 아니라고 씨익 웃는 칸나의 표정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다정해 보였다.

레베카가 무어라 입술을 달싹거리려는 순간, 옷장 속에서 희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저기…….”

수잔의 죽어가는 목소리에 레베카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다급히 옷장 문을 열어젖혔다.

드레스에 파묻힌 수잔이 멋쩍게 웃고 있었다.

“이런, 수잔. 미안하구나. 일이 꼬이는 바람에 널 깜빡하고 말았네.”

“괜찮아요. 그나저나 일이 잘못된 건 아니지요……?”

그녀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레베카는 웃었다.

“걱정 마. 아주 잘 풀렸어.”

정말이다. 오늘은 그녀가 목표하던 것을 모두 이루었다.

‘게다가 율리안도 만났고…….’

레베카는 음식을 오물거리던 율리안의 입술을 떠올렸다.

그는 급한 성격과는 달리 게걸스럽게 음식을 먹는 편은 아니었다.

오히려 씹는 소리 한 번 내지 않고 비교적 얌전히 먹었다.

게다가 예상외로 수다스럽기까지 했다.

그는 음식 하나하나를 분석해가며 어떤 부위를 썼는지, 향신료는 또 어느 산지에서 나온 것인지 신나게 떠들어댔다.

덕분에 어색할 거라 생각했던 그와의 짧은 만찬 시간은 퍽 즐거웠다.

‘즐겁게 식사를 한 게 얼마만인지.’

눈이 마주치면 환히 웃던 율리안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그의 크고 날카로운 눈매는 가만히 있으면 앙칼진 짐승의 것처럼 매서워 보였다.

하지만 웃을 때는 그 눈매가 어찌나 예쁘게 휘어지던지, 레베카는 입 안의 음식을 씹는 것을 잠시 잊고 그를 멍하니 바라보곤 했다.

‘아. 큰일이네.’

레베카는 계속해서 떠오르는 잔상을 떨쳐버리려고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그녀는 지금 제 마음이 어떤 상태인지 명확히 알았다.

이미 한번 걸어봤던 길이었다.

다만 이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이 길의 끝이 어느 곳을 향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예전처럼 알아차리기도 전에 스며들어버리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런 비극은 한 번이면 족했다.

* * *

제플린은 불 꺼진 서재에 앉아 사념에 잠겨 있었다.

구름에 가린 달빛이 제 빛을 온전히 내지 못하고 겨우 어스름한 빛만 서재로 흘려보내고 있었다.

그 옅은 빛마저 등지고 앉은 제플린은 레베카를 생각했다.

언제나 생각하는 그녀였지만 오늘은 어딘가 결이 달랐다.

‘땀 냄새…….’

레베카가 그에게 안겨들었을 때 희미한 땀 냄새가 났다.

지금껏 레베카는 그의 앞에서 땀 냄새를 풍긴 적이 거의 없었다.

물론 냄새의 불쾌함 때문에 이렇게 생각에 잠긴 건 아니었다.

오히려 그마저도 싫지 않아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다만 의아한 점은 물기 하나 없는 그녀에게서 어째서 땀 냄새가 날까 하는 점이었다.

이 저택에서 지내는 이상 그녀가 땀을 흘릴 만한 일은 없었다.

게다가 묘하게 자신의 시선을 피하는, 부끄러워 보이지만 어쩐지 서늘해 보이는 눈길.

결정적으로 그가 멀리 나간다고 말하자 그녀의 입술을 스쳐 지나간 안도의 미소.

크게 보자면 평소와 다른 점은 하나도 없었다.

그녀를 감시하는 사냥개에게서 어떤 이상한 점도 보고 받지 못했다.

하지만 자그마한 의심의 조각들을 모았을 때 느껴지는 이 이상한 기시감이란.

그러다 제플린이 눈을 크게 떴다.

‘그래, 승전 연회 날부터였어.’

그날부터 기묘한 의문이 그의 머릿속을 헤집어놓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손톱 밑에 박힌 자그마한 가시 같던 질문이었다.

하지만 그 가시가 점점 커지더니 어느새 통증마저 느껴질 정도로 그의 일상생활을 방해하기 시작했다.

‘레베카가 나를 떠나고 싶어 한다.’

그의 의심엔 뚜렷한 근거가 없었다.

레베카는 그가 사랑을 시작했던 그때처럼 여전히 찬란한 모습으로 그의 곁에 서 있었다.

그가 공들여 만든 백작저에서 그녀가 빠져나갈 수 있을 리도 없었다.

‘그런데 왜.’

왜 자꾸 불안해지는 걸까.

레베카가 스쳐 지나가듯 했던 말 때문일지도 몰랐다.

‘당신은, 정말 내가 행복해 보여?’

처음에는 잘못 들었나 싶었지만, 곱씹어볼수록 더 선명해졌다.

레베카는 분명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녀가 행복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는 레베카를 위해 모든 걸 준비했다. 이 완벽한 저택과 그녀만을 위한 고용인들까지.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는 완벽한 자신을 남편으로 두었다.

그것만으로도 제국에서 그녀를 부러워할 여자들은 넘쳐흘렀다.

알리시아만 봐도 그랬다.

알리시아는 언제나 레베카의 모든 것을 가지고 말 것이라는 눈빛으로 그녀를 보곤 했으니까.

그래, 레베카는 모두가 부러워할 만한 행복을 가진 여자였다.

그런데 어째서…….

제플린은 마른세수를 했다. 그러고는 뭔가 결심한 듯 어둠 속에서 눈을 부릅떴다.

‘만약을 대비해서 나쁠 건 없겠지.’

이것만큼은 쓰지 않으려 했지만 오랫동안 레베카의 곁을 떠나야 했기에 그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제플린은 제 감을 항상 믿었다. 그리고 그의 감은 틀린 적이 없었다.

그가 서재 벽에 붙어 있는 검은색 술이 달린 끈을 잡아당겼다.

그 끈은 곧바로 하녀장 그레이스의 방에 연결된 종을 울릴 터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서재의 문이 소리 없이 열렸다.

그레이스가 상복을 떠올리게 하는 까만 드레스 자락을 조용히 모아 쥐고 들어왔다.

제플린이 말했다.

“예전에 만들어두었던 그것. 그것이 필요할 것 같군.”

* * *

밤 열한 시를 알리는 종이 섬뜩한 소리를 내며 울렸다.

제플린은 괘종시계를 확인하고는 방문을 나섰다.

레베카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계단을 내려가는 그의 발걸음이 가벼워지다가 이내 어느 광경을 발견하고는 멈추었다.

“백작님…….”

알리시아가 제 방문을 환히 열고서 그 앞에 서 있었다.

은은한 촛불이 어두컴컴한 복도를 겨우 밝히고 있었기에 그녀의 방에서 흘러나오는 원색적이고 화려한 불빛은 제플린을 잡아두기에 충분했다.

방 안의 조명과 달리 알리시아는 치장 따위는 하지 않은 수수한 차림으로 볼록 나온 제 배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다분히 유혹적인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보고 싶었어요.”

알리시아의 미소는 노골적으로 그를 꾀고 있었지만 어쩐지 순진하게 느껴지는 구석이 있었다.

정돈되지 않은 연보라색 머리칼이 허리춤까지 내려와 굽이쳤다.

그 사이로 손가락을 넣으면 순식간에 손가락을 옭아매어 그녀의 안으로 빨려 들어가게 할 것만 같았다.

“왜 이 시간까지 깨어 있지?”

“태동이 느껴져서요. 아마 제 아버지가 돌아온 걸 아는 것이겠죠?”

태동이란 말에 제플린은 움찔하고 떨었다. 아직 그의 발은 레베카의 방을 향해 있었다.

알리시아는 상아 조각 같은 하얀 목을 아래로 늘어뜨리고 배를 문질렀다.

그윽하고 진한 미소가 그녀의 입가에 맺혔다.

그 모습은 제플린이 생각하는 자애로운 어머니의 표상 그대로였다.

제플린은 그때 처음으로 알리시아가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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