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망친 백작 부인이 돌아왔다-37화 (37/232)

37.

“아이에게 아버지의 목소리를 들려주시겠어요?”

알리시아가 얼굴을 들었다.

그녀의 보라색 눈동자가 자수정처럼 반짝였다.

‘당신의 아이를 가졌어요. 최고의 것을 낳아줄게요. 그러니 당신도 내게 최고의 것만 주세요.’

제플린이 알리시아를 품었던 건 다분히 충동적인 일이었다.

제플린은 그녀를 변방의 어느 시골 마을에서 만났다.

그가 찾던 화가가 그 마을에 지낸다는 소식이 들려와 확인차 방문한 마을이었다.

그가 마을과 전혀 어울리지 않은 휘황찬란한 마차에서 내리자, 우물물을 긷던 알리시아는 물통을 내던졌다.

그리고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제플린의 시선을 피하지 않는 그녀에게선 부끄러움이나 수줍음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알리시아는 여느 여인들이 그를 바라볼 때와 다를 바 없이 욕망이 들끓는 얼굴로 제플린을 집어삼킬 듯 응시하고 있었다.

알리시아는 머뭇거리지 않고 그에게 당돌하게 다가왔다.

그녀에게선 반드시 그를 가질 거라는 어떤 포부까지 느껴졌다.

제플린은 그런 알리시아의 저돌적인 태도에 잠시 신선함은 느꼈지만 지속적인 관심으로 이어지진 않았다.

알리시아는 이런 작은 마을에서 썩기엔 자못 아까운 미모이긴 했으나 그의 관심을 끌 만큼은 아니었다.

게다가 그는 당장이라도 일을 끝마치고 레베카에게 돌아가고 싶어 안달이 난 참이었다.

시골 여자 따위가 눈에 들어올 리 없었다.

하지만 알리시아는 끈질겼다.

그녀는 제플린이 마을에 묵는 짧은 기간 동안 매일같이 제플린의 숙소를 찾아왔다.

그리고 결국 마을 축제에선 그와 함께 춤을 추기까지 했다.

화가를 찾아다니는 지루한 여정 동안 알리시아는 그에게 자그마한 웃음을 선사했다.

없는 것보다 나았기에 제플린은 그녀를 잠시 제 곁에 두었다.

하지만 그게 끝이었다.

그는 알리시아를 저택으로 데려가지도, 정인의 어떠한 약조도 주지 않았다.

제플린에게 알리시아는 잠시간의 유흥, 그뿐이었다.

그러니 레베카가 알리시아를 저택으로 데리고 왔을 때 그가 깜짝 놀란 건 당연한 일이었다.

처음엔 헛웃음이 나왔다가, 나중에는 호기심이 일었다.

‘당신은 제가 아름답지 않나요?’

그래, 그저 호기심이었다.

레베카에게만 바쳤던 그의 마음을 다른 여자에게 주면 또 어떤 형태가 될까 싶어서.

그렇게 그는 알리시아를 안았고, 그가 그토록 바라던 아이가 생겼다.

제플린은 저 어린 생명이 레베카의 태중에서 자랐으면 좋았을 걸 하고 부풀어 오르는 그녀의 배를 볼 때마다 아쉬워했다.

그래서 알리시아가 꼴 보기 싫어졌다.

레베카와 자신 사이의 아이를 그녀가 앗아간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의 알리시아는 썩 보기 좋았다.

어쩌면 저 여자 사이에 태어난 아이도 사랑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제플린은 그의 명령에 따라 한껏 치장하고 그를 기다리고 있을 레베카를 떠올렸다.

불과 몇 시간 전만 해도 레베카를 안고 싶어 요동치던 욕구가 무슨 일이지 차분히 가라앉아 있었다.

그리고 욕정은 어느새 제 핏줄을 품고서 성녀인 척 서 있는 알리시아를 향하고 있었다.

낮에 레베카가 제 입맞춤을 거절했기 때문일까.

그를 계속해서 찔러대던 기시감 때문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레베카가 자신을 기다릴 거란 걸 확인하고 싶었던 걸까.

밤새 눈물을 흘리며 후회 속에서 저를 기다릴 레베카를 보고 싶었던 걸지도 모른다.

그래서 절대 그녀가 자신을 떠나지 않을 거란 걸 확실하게 하려던 걸지도.

웃긴 일이다.

그녀는 원래 제 것인데 이런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그에겐 모순적인 일이었다.

하지만 그의 발걸음은 결국 알리시아에게로 틀어졌다.

자신에게로 다가오는 제플린을 본 알리시아는 벅찬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정말 먹히잖아?’

레베카는 자신 때문에 화상을 입은 알리시아가 걱정된다는 핑계로 그녀를 찾아왔다.

알리시아는 레베카가 또 어떤 말로 제 속을 긁을까 잔뜩 경계했다.

하지만 찬찬히 알리시아를 살펴보다 내뱉은 레베카의 말은 뜻밖의 것이었다.

‘내 것을 가지고 싶지? 그럼 더 적극적으로 쟁취해. 나는 호적수를 반기는 편이니.’

‘뭐라고요?’

‘흠, 너는 좀 지나치게 치장하는 면이 있는 것 같아. 그것도 네 얼굴에 어울리는 편이긴 하지만 가끔은 힘을 빼는 게 어때? 사내는 새로운 것을 항상 찾아다니는 법이니.’

‘…….’

‘그리고 네가 가진 걸 적극적으로 활용해. 내게는 없고, 네게는 있는 것. 그게 뭐겠어?’

헛소리라 생각했다. 또 무슨 간계를 꾸미고 있다고 여기고 그저 넘기려고 했다.

하지만 어쩐지 계속해서 레베카의 충고가 생각이 났다.

그리고 오늘 밤 제플린이 레베카의 방을 찾을 것이란 걸 들었다.

알리시아는 속는 셈 치고 레베카의 조언대로 움직여 보기로 했다.

그런데 정말로 제플린이 레베카를 등지고 자신에게 올 줄이야.

기뻤지만 레베카가 자신에게 왜 이런 수를 가르쳐 줬는지 이유를 몰라 조금 꺼림칙한 기분이 들었다.

“뭐해, 알리시아. 들어가지 않고.”

하지만 그 의문은 곧 알리시아의 관심 밖으로 밀려났다.

제플린이 평소보다 유독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기 때문이었다.

알리시아는 그것이 꿈결 같아 눈을 몽롱하게 떴다.

두 번째 부인의 자리에 있더라도 어쨌든 눈앞의 찬란한 남자는 제 남편이었다.

세월이 조금 흘렀어도 제플린은 우물가에서 처음 봤을 때와 다름없는 모습이었다.

그는 알리시아가 어릴 적부터 꿈꾸었던, 그녀를 시궁창에서 건져줄 백마 탄 왕자님이었다.

실상 그가 야수라 하더라도 상관없었다.

왕자는 왕자였다. 왕자와 결혼한 여인은 고귀한 왕비가 될 수 있었다.

알리시아는 그걸 원했다.

시골뜨기 알리시아가 아닌, 누구나 감히 올려다볼 수도 없고 건드릴 수도 없는 고고한 백작 부인.

그렇게 될 날을 꿈꾸며 알리시아는 간드러지게 웃었다.

그리고 제플린을 침실로 끌어들였다.

그날 밤, 데본셔 백작의 두 명의 부인은 모두 원하는 것을 얻었다.

“말씀하신 대로 백작이 알리시아의 방에 들어갔습니다.”

“그래? 잘 되었구나.”

레베카는 저택 가득 울려 퍼지는 알리시아의 환희에 찬 신음을 들었다.

그 소리를 음악 삼아 레베카는 저를 옥죄고 있던 옷가지들을 하나씩 벗기 시작했다.

답답하게 얼굴을 덮고 있던 화장도 지웠다.

붉은 립스틱까지 그녀의 얼굴에서 사라지자 레베카는 웃음을 터뜨렸다.

“푸하하.”

일이 어찌 이리도 쉬울까.

어쩜 이리도 멍청한 인간들이었는가.

레베카는 참지 못하고 더 크게 웃었다. 아예 배를 잡고 웃었다.

이제 한 달간 그를 볼 일은 없을 테지.

그리고 마침내 그가 돌아왔을 땐 그가 알고 있던 세상은 무너지기 시작한 뒤일 것이었다.

* * *

다음 날 새벽부터 백작저의 하인들은 분주하게 움직였다. 큼지막한 짐마차 두 대에 한 달 치 짐이 실렸다.

알리시아는 아직 졸린 눈을 하고서 떠나는 제플린을 배웅하러 나왔다.

레베카는 평소처럼 머리부터 발끝까지 흐트러진 부분 없이 치장한 채 계단을 타고 천천히 내려왔다.

제플린은 미소를 머금고 레베카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이 부어 있었다. 화장으로 가렸지만 확연하게 보일 정도로 빨갰다.

제플린은 새벽에 레베카가 얼음을 찾느라고 하녀들을 들쑤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아침에 칸나가 그에게 넌지시 일러주었다.

‘밤새 백작님을 찾으시며 우셨습니다.’

그럼 그렇지. 예리한 제 감이 틀릴 때도 있는 법이다.

그럼에도 그는 계획한 바를 그만둘 생각은 없었다.

“그럼, 조심히 다녀오셔야 해요.”

알리시아가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제플린의 손을 꼭 잡고서 그를 올려다봤다.

레베카도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작별 인사를 건넸다.

자신의 두 부인을 찬찬히 번갈아 보던 제플린이 그레이스를 향해 고갯짓하며 말했다.

“아, 가기 전에 부인들에게 줄 것이 있는데…….”

철컥-

제플린의 고갯짓에 그레이스가 레베카와 알리시아의 손목에 무언가를 채웠다.

알리시아는 손목을 휘감은 것의 정체를 확인하고는 경악에 차서 고개를 쳐들었다.

“배, 백작님. 이, 이건……”

수갑이었다.

단단한 철로 만든 수갑을 부드러운 검은 벨벳 천으로 감싼 뒤 은실로 고풍스러운 문양을 새겨놓은 것이었다.

양손의 수갑은 기다란 은사슬로 이어져 있어 여느 수갑에 비해 양손을 비교적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모양새였다.

하지만 속박한다는 의미는 변함이 없었다.

제플린이 한쪽 입매를 비뚜름하게 올리며 말했다.

“아무래도 무슨 일이 생길까 걱정돼서 말이지.”

“저희가 도망이라도 갈 것 같다는 말씀이신가요?”

알리시아가 도끼눈을 쳐들고 말했다.

레베카는 그저 아무 말 없이 제플린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알리시아처럼 격한 반응을 보이지도, 크게 동요하지도 않았다.

다만 눈을 치켜뜨고는 용암 같은 뜨거운 분노를 저 깊은 곳에 숨겨두고 있었다.

그런 레베카의 담담한 태도가 오히려 제플린의 심기를 건드렸는지, 제플린은 레베카의 손을 낚아챘다.

수갑에 달린 쇠사슬이 요란한 소리를 냈다.

“부인은 왜 아무 말도 없지? 도망치려는 계획을 들키기라도 한 것처럼?”

아아, 정말 감 하나는 더럽게 좋은 자식이다.

레베카는 제 앞에 얼굴을 가깝게 들이미는 그를 향해 비릿하게 웃었다.

“도망이라니요. 제가 이곳을 두고 어디로 가겠습니까? 수갑이 너무나 아름다워 넋을 놓은 것뿐이랍니다. 조금 성가신 팔찌 정도로 생각하면 이 선물을 마다할 이유는 없지요.”

그 말에 알리시아가 발을 동동 굴리며 말했다.

“레베카 님! 이건 말도 안 돼요! 한 달이 넘는 기간 동안 수갑을 차고 어떻게 살란 말씀이세요? 밥은 어떻게 먹고, 씻기는 어떻게 씻고요?”

“알리시아, 하녀들이 다 해줄 텐데 무슨 걱정이에요? 원래 그랬던 것처럼 우리는 이 저택에서 손 하나 까닥하지 않으면 될 뿐인걸요. 이런 눈물겨운 호강이 어디에 있나요. 그렇죠, 제플린?”

비꼬는 건지 아니면 진심인지 알 수 없는 모호한 미소를 짓고서 레베카는 제플린을 바라봤다.

제플린이 그런 레베카의 의중을 가늠할 새도 없이 알리시아가 항의하고 나섰다.

“백작님, 백작님께서 제게 무슨 짓을 하시든지 용인할 수 있지만요, 그래도 이건 아니지요. 저는 당신의 부인입니다. 죄수가 아니라!”

“쫑알쫑알, 머리가 울리는군. 교육의 효과가 그새 떨어졌나, 알리시아? 다시 한번 더 네 위치를 알려줘?”

어젯밤 저를 그렇게 다정하게 안았던 남편이라 여겨지지 않을 정도로 그의 싸늘한 시선이 알리시아를 파고들었다.

일전의 기억이 떠올라 알리시아는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어깨가 사정없이 떨리기 시작했다.

레베카가 파들거리는 알리시아의 어깨를 조용히 주시했다.

제플린이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레베카의 말대로 하녀들이 다 해줄 텐데 뭐가 걱정이지? 부인들은 내 말만 따르면 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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