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망친 백작 부인이 돌아왔다-38화 (38/232)

38.

제플린은 열쇠를 그레이스에게 내밀었다.

“열쇠는 하녀장에게 있어. 피치 못할 사정이 생길 때만 하녀장이 잠시간 수갑을 풀어 줄 거야.”

제플린은 신뢰가 가득 담긴 눈빛을 그레이스에게 보냈다.

그레이스는 평소처럼 무미건조하게 고개를 까닥였다.

뒤를 돌아선 그녀의 입술에 누구도 눈치채지 못할 미묘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래, 마지막 발악 정도라 생각하자.’

레베카는 손목에 느껴지는 불쾌한 무게감에 인상을 찌푸렸지만 이내 얼굴을 펴고 활짝 웃었다.

그리고 제플린의 마차가 사라질 때까지 오랫동안 손을 흔들었다.

***

“돌아왔습니다. 레베카 님.”

레베카의 방을 찾아온 로버트가 그녀의 발밑에 무릎을 꿇었다.

퍽 고생했는지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볼살이 패여 있었다.

지친 몰골이었지만 로버트는 그 어느 때보다 기분이 좋아 보였다.

레베카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수확이 있었나 봐요?”

“아, 아닙니다. 레베카 님이 말씀하신 정확한 물증은 구하지 못했습니다. 다만…….”

“다만?”

“정보를 줄 만한 사람을 찾았습니다.”

“섬에서 탈출한 사람이라도 찾은 건가요?”

레베카의 질문에 로버트는 새삼 놀라워하며 말했다.

“그걸 어떻게……. 항상 생각하는 거지만 레베카 님의 통찰력을 미리 알았더라면 진작에 도와드릴 걸 그랬습니다. 그랬다면 지금과 같은 수모는 당하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일이니까요.”

로버트는 레베카의 가느다란 손목에서 달랑거리는 수갑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자세한 설명을 듣지 않아도 그는 어떻게 된 일인지 단번에 알았다.

‘백작의 집착 병이 또 도졌구나.’

하지만 이건 도가 지나쳤다.

그 누구도 남편이라는 이름 아래 부인을 수갑으로 묶어둘 수 없는 법이었다.

이래서야 죄수나 다름없는 모습이지 않은가.

사냥개 사이의 여론도 그와 다르지 않았다. 백작이 점점 미쳐간다며 다들 불안에 떨었다.

이러다가 자신에게 불똥이 튀진 않을까 전전긍긍하는 모습들이었다.

레베카의 손목을 휘감은 수갑이 달그락거릴 때마다 안절부절못하는 로버트와 달리 레베카는 여유로워 보였다.

“이 정도면 유하지 않습니까? 수갑이라니. 저는 오히려 더한 것을 상상했는데, 상상력이 이 정도밖에 되지 않는 인물이라는 걸 오늘에야 알았습니다.”

“레베카 님!”

“농입니다. 저는 오히려 고마운걸요. 마음이 흔들릴 기회를 주지 않으니 마음껏 그를 응징할 수 있잖아요. 그나저나 제 수갑을 본 사냥개들 반응은 어떤가요?”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예상대로군요. 확증이 없는 마당에 제플린이 일을 편하게 만들어 줬네요. 정보를 줄 사람은 만나 보셨나요?”

“그게 사실, 행방이 묘연한지라……. 하지만 시간만 주신다면 반드시 찾아내겠습니다.”

레베카가 로버트에게 의뢰한 것은, 제플린이 납치한 사람들을 가둔 섬의 단서를 찾는 것이었다.

그에 로버트는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제플린 소유의 섬에 대해 알아봤다.

오랜 세월 동안 이목을 끌지 않고 많은 수의 사람을 가둬 둘만 한 곳은 그리 많지 않았다.

때문에 로버트는 제플린이 사람들은 가둬 둔 섬이 제플린의 사유지라 판단했다.

하지만 서류상 이상한 곳도 없었고, 제플린이 소유한 대부분의 섬은 휴양지로 개발돼 호황을 이루고 있었다.

은밀하게 생필품을 들여야 했고 사람들을 감시할 인력도 상주해야 했다.

그리고 관리하기 쉽게 모두를 모아뒀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래서 로버트는 관광객이 드나드는 섬은 목록에서 제외했다.

그가 지도에도 없는 무인도로 가닥을 잡았을 때 어느 섬에서 탈출했다는 소리를 하고 다니는 낭인이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하지만 간발의 차로 그를 놓쳐 버렸고, 저택에 돌아가야 했기에 로버트는 별 수확 없이 돌아온 것이었다.

“이게 최선이었다는 건 잘 알지만, 그래도 조금 아쉽긴 하네요.”

레베카는 잠시 생각에 빠졌다.

율리안이 기껏 만들어 준 기회였다. 제플린이 저택에 없는 기간 동안 사냥개들의 일부라도 자신의 편으로 돌려야만 했다.

그래서 로버트가 자그마한 단서라도 가지고 오길 내심 바랐었다.

하지만 그가 단서를 구하지 못했더라도 상관은 없었다. 애초에 단기간에 해내긴 어려운 일이었다.

고민을 거듭하던 레베카는 결단을 내렸다.

“로버트.”

“네. 말씀하십시오.”

“거짓말 잘해요?”

“예?”

“거짓말을 하나 할까 하는데.”

“거짓말이라면……?”

“사냥개들 사이에 소문을 하나 내줘요.”

“무슨 소문을 말입니까.”

레베카는 꼬고 있던 다리를 풀었다. 그리고 여전히 무릎을 꿇고 있던 로버트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레베카는 성녀다.”

레베카는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성녀라는 단어와 달리 다소 섬칫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얼이 나간 표정을 하는 로버트를 응시하며 레베카는 속삭이듯 말을 이었다.

“그녀는 신의 은총을 받아 미래를 내다볼 수 있다. 과거도 훤히 본다. 제플린과 결혼한 것은 성녀의 고난이다.”

“성녀라니요. 자칫하다간 신성모독으로 끌려갈 수도 있습니다!”

“그 부분은 어떻게든 해결할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그리고 원래부터 다들 저를 성녀라 부르지 않았나요? 천사 같은 백작 부인, 성녀라 불러도 손색없는 아름답고 착한 레베카 데본셔. 그들이 원하는 대로 진짜 성녀가 되겠다는데 뭐가 문제일까요?”

“그건 그렇지만, 진짜 성녀라는 뜻은 아니지 않습니까.”

“로버트, 생각보다 고지식한 사람이었군요. 거짓말은 상대방이 진짜라고 믿는 순간 진실이 되는 법입니다. 후에 당사자가 직접 나서서 거짓이라 밝혀도 아무도 믿지 않게 되죠.”

레베카가 이전 생에서 숱하게 겪은 일이었다.

여론에 따라 가해자가 피해자가 되기도 하고, 근거도 없는 소문으로 사회에서 매장되는 사람도 있었다.

나중에 진실이 밝혀져도 사람들은 쉬이 믿지 않았다. 한번 찍힌 낙인은 꼬리표처럼 평생을 따라다녔다.

‘그 때문에 마을에서 쫓겨날 뻔한 적도 있었지.’

이전 생에서 유부남이 레베카에게 치근덕거렸던 일이 있었다.

레베카는 단칼에 그를 거절했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레베카가 그를 유혹한 걸로 소문이 났다.

리베르타의 식구로 구성된 살롱 직원들이 열심히 해명한 탓에 오해는 풀렸다.

하지만 이후에도 마을 사람들이 그녀를 바라보는 눈빛만큼은 돌아오지 않았다.

어느새 레베카는 남자를 홀리는 요망한 여자가 되어 버렸다.

그때 그녀는 소문의 힘을 뼈저리게 느꼈다.

“제게 신성력이 있다고 하세요. 그래서 가족들이 납치당한 곳을 알고 있다고. 레베카의 편이 되면 그들을 구출할 수 있다고 말해주세요. 로버트의 말이라면 신빙성이 있을 거예요.”

“의심이 많은 자들입니다. 제 말을 바로 믿지는 않을 겁니다.”

“당연하죠. 로버트는 그저 운만 띄워 주세요. 나머지는 제가 다 알아서 하죠. 미래를 보는 능력이야 얼마든지 만들어 내면 그만이니까요.”

레베카는 이어서 계획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로버트의 눈빛은 사정없이 흔들렸고, 구석에서 말없이 경청하던 칸나는 여느 때처럼 조용히 미소를 짓고 있었다.

***

“로드리고, 오늘따라 기분이 좋아 보이네요.”

“마, 마님!”

로드리고는 느닷없는 레베카의 인사에 화들짝 놀라 몸을 똑바로 세웠다.

어젯밤 로버트가 넌지시 흘린 말 때문인지 그는 오늘따라 레베카가 더욱 신경 쓰였다.

‘감시하면서 깨달은 건데, 레베카 님이 성녀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매일 시련을 이겨내겠다고 기도를 올리시더군.’

‘기도야 저도 매일 합니다. 대체 그게 뭐가 문제라는 겁니까?’

‘그분은 미래를 보셔. 저번에 마님이 물을 조심하라고 하신 적이 있었지. 혹시 예전에 저택 보수 작업하다가 나 물벼락 맞은 거 기억나나? 마님이 말씀하시고 몇 분 안 되어 일어난 일이었어.’

‘그 정도야 우연의 일치…….’

‘그뿐만이 아니야. 잘 생각해보라고. 레베카 님은 성녀의 조건에 모두 부합해. 데프리아 여신과 비슷한 금발에 푸르른 눈, 백옥같이 하얀 피부, 착한 성정과 데본셔 백작의 부인이라는 시련까지.’

‘듣고 보니…….’

‘이상하지 않아? 백작 부인이 되자마자 구휼원을 세우는 걸 고집하신 이유가? 백작의 기이한 행동에도 고발 한번 한 적이 없지 않나.’

‘그거야, 레베카 님도 약점이 잡혔기 때문 아닙니까?’

‘약점 잡힌 걸 아는 건 우리 사냥개들뿐이지. 순진한 그분이 그런 사실을 어찌 알겠나. 이번에 수갑을 채울 때 가만히 있던 것도 그렇고. 여튼 그분께는 뭔가 있어. 뭔가가…….’

‘괜한 헛소리를…….’

하지만 그 말이 로버트의 입에서 나왔기에 로드리고는 흔들리고 있었다.

그가 아는 로버트는 실수로라도 헛소리를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정말 성녀 같긴 하네.’

새하얀 드레스를 입고 청초하게 미소 짓는 레베카는 천상에 사는 사람 같아 보였다.

그녀의 등 뒤로 비춰드는 햇살이 눈에 부셔 로드리고는 레베카를 똑바로 바라볼 수 없었다.

“아, 그렇지. 로드리고. 하늘을 조심해요.”

“예?”

레베카는 짐짓 고개를 쳐들고서 슬픈 어조로 말했다.

“어째서 신께선 착한 사람들에게 시련을 주시는 걸까요. 저는 다만 끔찍한 고통을 피하게 자그마한 단서밖에 드릴 게 없네요.”

“……?”

레베카는 수수께끼 같은 말을 남기고서 유유히 사라졌다.

로드리고는 그녀의 말을 곱씹으며 다른 사냥개와 교대하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 순간.

“조심해!”

고함이 들리더니 커다란 화분이 그의 발 앞에 떨어졌다.

로드리고는 뒤로 넘어진 채로 벌렁거리는 가슴을 잡았다.

화분은 처참하게 산산조각나 있었다.

레베카의 말이 내심 신경 쓰여 하늘을 예의주시하고 걷지 않았더라면 대참사가 일어났을 수도 있었다.

자신의 머리가 부서진 화분 꼴이 됐을지도 모른다고 상상하자 로드리고의 팔에 소름이 쫘악 돋아났다.

그는 침을 꿀꺽 삼키고는 서둘러 성호를 그었다.

‘성녀!’

***

“드…… 드디어!”

기다란 은발을 흩날리며 유스타프는 미친 듯이 웃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검붉은 빛을 띠었던 잎이 완전한 검은색으로 물들여 있었다.

잎의 끝이 갈고리 모양으로 날카롭게 휘어져 악마의 발톱이란 이름에 걸맞은 모습이 되었다.

유스타프는 두꺼운 장갑을 끼고선 악마의 발톱을 조심스럽게 옮겨 심었다.

다 자란 악마의 발톱이 온도 조절이 되는 휴대용 화분 속에 안락하게 자리를 잡았다.

“이제 공작의 닦달도 줄어들겠지?”

이곳 몽푀르의 연구실로 온 지도 어느덧 한 달.

처음엔 그저 달콤하기만 했다.

“이 좋은 시설을 거저 주신다고요?”

“당연하지. 당신은 레베…… 아니 내게 꼭 필요한 인물이니까. 다른 건 신경 쓰지 말고 연구에만 집중하도록. 아, 이쪽은 당신을 도와줄 고용인들이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