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망친 백작 부인이 돌아왔다-39화 (39/232)

39.

율리안 요하네스 공작은 처음엔 사람 좋은 얼굴로 그를 극진하게 대우해줬다.

악명 높은 그의 소문에 긴장하고 있었던 유스타프는 잠시 맥이 빠졌다.

그는 잘생긴 사람이면 모두 성격이 더럽다는 이상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왜냐하면 내 성격이 개차반이니까.’

하지만 율리안은 그의 믿음을 흔들었다.

율리안은 언제나 정중한 태도로 유스타프의 편의를 봐주었다.

그가 난장판으로 연구실을 만들어놔도 다음 날 출근해서 보면 모든 게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연구에 정신이 팔려 끼니를 제대로 챙겨 먹지 못했던 지난날에 비해 이곳에는 영양이 고루 잡힌 식사가 제때 나왔다.

그가 끼니를 거르려고 하면 하인이 득달같이 달려들어 떠먹여 주기까지 했다.

그것도 그의 입맛을 고려한 신선한 제철 채소로 구성된 식단이었다.

‘이곳은 천국인가.’

유스타프는 제게 찾아온 행운이 믿기지 않았다.

레베카가 제안한 대로 정말 아무런 간섭을 하지 않을까 싶어 흡혈 식물을 들여오겠다고 공작에게 말한 적이 있었다.

“어렵지 않지.”

율리안은 아무 말 없이 서류에 사인을 했고, 며칠 뒤에 유스타프가 원하는 식물이 직배송으로 도착했다.

‘돈이 좋긴 좋구나.’

유스타프는 그 어느 때보다 싱싱한 식물의 상태를 보고 이곳에 뼈를 묻으리라 결심했다.

그랬는데…….

콰앙-

새벽까지 악마의 발톱을 돌보다 겨우 잠이 들었던 날이었다.

율리안이 방문을 거세게 열어젖히며 들어왔다.

“지금! 한가하게 잠을 잘 시간이 있나?”

그는 다짜고짜 자고 있던 유스타프의 멱살을 잡았다.

“두 달이다. 두 달 안으로 악마의 발톱을 쓸 만하게 키워.”

자다가 날벼락을 맞은 유스타프는 서슬 퍼렇게 빛나는 율리안의 황금색 눈동자를 보고 비명을 질렀다.

‘빌어먹을. 그때 도망갔어야 했어.’

그날 이후로 공작은 매일같이 연구실을 찾아왔다.

‘아직도 안 됐다고? 당신의 자질이 심히 의심되는군.’

‘밥 먹을 시간이 있는 걸 보니 아직 내가 유하게 굴었던 모양이야.’

‘당신은 식물을 죽이는 쪽으로 재능이 있는 건가? 어떻게 어제까지 멀쩡하던 새싹이 죽을 수가 있지?’

율리안 요하네스 공작은 단단히 미친놈이었다. 식물의 ‘식’ 자도 모르면서 매일같이 재촉만 해대니 유스타프는 미칠 지경이었다.

왜 갑자기 태도를 바꾼지는 몰라도 이렇게는 못 살겠다 싶어 유스타프는 그에게 사표를 내밀었다.

“도저히 못 참겠습니다! 그만두겠습니다!”

하지만 율리안은 그의 눈앞에서 사표를 쫙쫙 찢더니 음흉하게 웃었다.

“돈이 많으신가 봐? 당신 앞으로 들어간 투자금이 얼마나 되는지 알아? 그거 다 갚을 자신 있으면 나가던가. 그러게 계약은 신중히 했어야지.”

하지만 유스타프도 미친놈에 관해서는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렇게 나오실 줄 알았습니다. 좋습니다. 두 달이 아닌 한 달 안으로 악마의 발톱을 키워 보이죠.”

“처음부터 그렇게 나올 것이지.”

“대신!”

“대신?”

유스타프는 거대한 서류철을 거세게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그동안 공작님께서 제게 퍼부은 폭언 목록입니다.”

“뭐?”

율리안은 황당한 눈으로 종이를 한 장 한 장 넘겼다.

율리안이 그에게 했던 말이 날짜, 시간별로 일목요연하게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정리되어 있었다.

어쩐지 광기가 느껴지는 목록이었다.

“특히 멱살을 잡으신 부분을 주의 깊게 봐주시기 바랍니다. 무려 지금까지 이십 회입니다. 이십 회!”

“그래서, 나더러 무릎 꿇고 사과라도 하라고?”

“아니요! 잼으로도 못 만드는 사과는 받아서 어디다가 씁니까? 그 횟수만큼 돈으로 주시지요.”

“뭐……?”

“보아하니 공작님 성격상 폭언을 하지 않는 건 글러 먹은 것 같으니, 욕하시려거든 돈을 주고 하시란 말씀입니다. 그러면 저도 신나게 욕을 받아드리지요. 욕 한 번당 10브론즈입니다! 멱살은 1실버고요!”

뭐 이런 미친놈이 다 있냐는 눈으로 율리안은 유스타프를 바라봤다.

하지만 한 달 안으로 악마의 발톱을 키워내겠다는 그의 말에 율리안은 눈살을 찌푸리며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유스타프가 비릿하게 웃었다.

“와하하! 금방 돈방석에 앉겠군요! 빨리 욕해주세요. 공작님!”

생각보다 쉽게 율리안이 납득하자 유스타프는 제가 벌어들일 돈을 속으로 세어보곤 기분이 좋아졌다.

하지만 그날 이후로 율리안이 폭언을 퍼붓는 일은 없었다.

다만 이전보다 더 자주 찾아와 유스타프의 일거수일투족을 집요하게 지켜보았다.

그게 더 불편했기에 유스타프는 울컥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돈 나가는 건 아깝다 이거지. 하지만 어쩐다, 내가 한 달도 안 돼서 성공했으니 이전에 퍼부은 폭언에 대한 값은 치러야 할 거다.”

유스타프는 제가 받을 돈을 셈하며 해맑게 웃었다.

* * *

“악마의 발톱이 준비됐다고?”

소식을 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율리안이 한달음에 달려왔다.

유스타프는 의기양양하게 악마의 발톱을 담은 화분을 내밀었다.

율리안은 잠시 말없이 악마의 발톱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어딘가 먹먹해 보였다.

율리안은 얼굴을 쓸어내리곤 초조하게 물었다.

“복용법은?”

“바로 딴 생잎을 씹어 먹으면 됩니다. 그나저나 그때 저희 집을 방문했던 소년이 실험 대상입니까? 연약해 보이던데, 실험을 견딜 수 있을지…….”

“그녀에 대해선 신경 꺼.”

“그녀요? 설마 그 소년이 여자였습니까? 어쩐지 곱더라니.”

레베카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율리안은 단번에 불편한 기색을 표했다. 그러다가 그는 말실수까지 해버렸다.

유스타프는 건수를 잡은 것처럼 신나게 질문을 부어댔다.

“그런데 왜 남장을 한 거랍니까? 그땐 영락없는 소년 같아 보였는데. 그러고 보니 공작님이 갑자기 재촉하신 것도 그렇고, 혹시……?”

“혹시 뭐?”

“숨겨둔 연인 아닙니까? 출신을 극복하지 못한 비극적인 사랑이라든지…….”

“그렇게 머리가 좋은 편은 아닌가 보군.”

“무슨 그런 망발을! 한 달 만에 악마의 발톱을 성장시킨 걸 보면 모르시겠습니까? 공작님만 빼고 세상 모든 사람이 제 영특함을 안다고요!”

“시끄럽고, 이거나 받아.”

율리안은 금화 꾸러미를 입막음용으로 쓸 것처럼 유스타프의 너른 가슴팍에 던졌다.

다행히 효과가 있었는지 유스타프는 정신없이 금화를 세기 시작했다.

“난 약속은 지키는 사람이다. 수고비 개념으로 돈을 좀 더 얹었다. 그리고…….”

“예예. 제겐 그 정도의 수고비는 받아도 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니 감사하단 인사는 생략하겠습니다. 그리고요?”

“미안.”

“네?”

유스타프는 제가 뭘 잘못 들었는가 싶어 고개를 쳐들었다.

황당함이 역력한 은빛 눈동자를 마주친 율리안은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말했다.

“못 들은 거로 쳐. 내 성격이 지랄 같아서 말을 곱게 못해. 특히 흥분하면 더. 앞으로 그 정도의 폭언을 할 일은 없을 거다. 뭐, 약조는 못하지만 혹시라도 그런 일이 있다면 오늘처럼 돈으로 보상하겠다.”

지금껏 귀족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는 유스타프는 멍하니 율리안을 바라봤다.

“그만 봐!”

얼굴을 살짝 붉힌 채로 뒤통수를 긁적이는 율리안이 좀 귀여워 보이기도 했다.

‘생각보다 착한 미친놈일지도…….’

하지만 이어지는 그의 말에 유스타프는 그 생각을 곱게 접어 하늘로 날려 보냈다.

“자, 그럼 이제 다시 일해야지.”

“네? 악마의 발톱 연구가 끝 아니었습니까?”

“무슨 소리야. 네가 연구해야 할 건 잔뜩 있다. 다음은…… 그래, 장미포도가 좋겠군.”

“데본셔 백작이 특허 낸 그 품종 말입니까?”

“빨리 알아들어서 편하군. 그래, 그 포도를 병들게 할 방법을 연구해. 기한은 일주일이다.”

유스타프는 비명을 질렀다.

“쉬는 시간은 주셔야죠! 저는 기계가 아니란 말입니다!”

그의 말에 율리안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돈을 주겠다고 했지, 돈 쓸 시간을 주겠다고는 안 했는데? 대신 기한을 맞출 수 있게 연구원을 더 고용해 주도록 하지.”

‘악마다! 저 인간은 악마야!’

음흉하게 웃으며 돌아서는 율리안의 머리 위로 악마의 뿔이 솟아나는 상상을 하며 유스타프는 부들부들 떨었다.

* * *

레베카는 저택에서 유례없는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그녀가 가는 곳마다 고용인들이 달라붙어 재잘거렸기 때문이었다.

“레베카 님, 갓 만든 사과주스입니다. 드셔보세요. 그나저나 제 아버지가 운수 사업에 투자를 하려고 하시던데 어떻게 될까요?”

“레베카 님! 제 아이가 이번에 아카데미에 들어가는데…….”

모여든 인파 중에는 사냥개도 있었다. 제플린이 없는 틈을 타 그들은 조심스레 레베카에게 말을 붙이고 있었다.

그녀가 영험한 예지력을 지닌 성녀라는 소문이 어느덧 고용인들 사이까지 번진 것 같았다.

레베카는 고용인들이 건네는 다과를 받으며 그녀가 아는 미래의 정보에 한해 최소한의 답변을 해주었다.

한바탕의 질문 세례가 끝나고 잠시 숨을 돌리려는 찰나, 뒤에서 속닥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그런데 왜 이때까지 레베카 님의 능력을 우리가 몰랐지?”

“백작님과 함께 있는 게 시련이라고 했잖아……. 그래서 백작님이 옆에 없을 때만 능력이 발현된대.”

그들은 제플린이 시련이라는 점에서 납득을 했는지 꽤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하긴 제플린이 레베카의 곁을 이렇게 오래 떠나 있던 건 손에 꼽을 일이었으니 이해할 만도 했다.

레베카는 하마터면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제플린이 없을 때만 능력이 발현된다니.

로버트가 소문에 양념을 좀 쳤다고 했는데, 이렇게 기특한 일을 했을 줄이야.

덕분에 직접 나서서 해명하는 일은 없어서 다행이었다.

레베카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다들 알아서 추측하고 말을 옮기기 바빴다.

문제는 이 이야기가 저택 안에서 그치지 않고 신전까지 들어갔을 때였다.

성녀 사칭은 중대한 일이었으니 조사원이 파견된다면 들키는 건 시간문제였다.

그러면 신성모독으로 종교재판을 받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왜 하나도 걱정이 되지 않을까.’

무척이나 안일한 자신의 태도에 놀라면서도 레베카는 불안하지 않았다.

어쩐지 모든 게 절로 다 해결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잊었어? 행운은 내 편이야.’

자신만만한 율리안의 말이 떠올라 레베카는 조용히 미소 지었다.

‘사람은 믿는 게 아닌데 말이지.’

사실 신성모독으로 끌려가도 솟아날 구멍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제플린은 빼앗긴 물건을 반드시 찾으러들 테니까 탈출할 기회는 얼마든지 있으리라 생각했다.

레베카는 만약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자신을 구할 패가 제플린이 아니라 율리안이길 바랐다.

* * *

늦은 밤이었지만 레베카는 깨어 있었다.

그녀는 책상 앞에 바르게 앉아 방문할 손님을 기다렸다.

레베카가 성녀라는 소문이 퍼진 뒤로 가끔 밤손님이 그녀의 방으로 은밀히 찾아들고는 했다.

칸나는 조용히 다과를 준비해 레베카의 앞에 놓았다. 손님의 몫의 찻잔이 티 테이블 위에 놓였다.

레베카는 차를 홀짝이며 중얼거렸다.

“올 때가 됐는데.”

똑똑-

그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머뭇거리는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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