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레베카의 고갯짓에 칸나가 조용히 방문을 열었다.
레베카는 입가에 오싹한 미소를 만연히 피우며 손님을 맞았다.
“어서 와요, 로드리고.”
방 안에는 촛불이 은은히 어둠을 밝히고 있었다.
다소 어두운 분위기에 로드리고는 멍하니 레베카를 바라봤다.
살갗이 살짝 비치는 유혹적인 검은 드레스를 입고 수갑을 찬 손을 흔들고 있는 레베카는 낮에 보였던 성녀의 모습은 벗어버린 채였다.
퇴폐적이고 위험한 분위기를 풍기는 그녀의 모습에 로드리고는 움찔했다.
그의 뒷골이 쭈뼛 섰다.
“그래요, 이제 누구에게 충성을 맹세할지 정했나요?”
“전…….”
사냥개의 목줄이 요동치는 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들려왔다.
* * *
바리니카의 비밀 작업실은 외딴 숲 깊은 곳에 있는 황제의 별장 중 하나였다.
녹음이 우거지고 경관이 아름다운 대저택이었으나 마차를 타고 한참을 가야 자그마한 마을이 나오는 외진 곳에 있었다.
제플린은 바리니카가 그림을 그리는 걸 잠시간 지켜보다 산책이나 할 겸 정원을 향했다.
그가 문밖을 나서자마자 풍채 좋은 경호원 세 명이 그의 뒤에 따라붙었다.
“그저 산책하러 가는 것뿐이니 귀찮게 따라 오지 마.”
제플린의 협박 어린 눈빛에도 경호원들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똑같은 말만 되풀이했다.
“황명입니다.”
‘빌어먹을.’
말이 경호원이지, 제플린을 감시하는 감시자나 다름없었다.
그들은 제플린이 밥을 먹을 때도, 심지어 화장실을 갈 때도 따라붙었다.
도무지 이곳에서 마음 편히 할 수 있는 일이란 하나도 없었다.
화가를 감시하라고 저를 보낸 줄 알았더니 되레 제가 죄수가 된 기분이었다.
‘황제의 심기를 거슬리게 할 만한 일을 했던가…….’
제플린은 여태껏 제가 몰래 피해갔던 황명을 차근차근 되짚어 봤다.
들킬 만한 일도 없었고, 들켰다 하더라도 크게 문제 될 것 없는 명령들뿐이었다.
그에게 있어 자히드라 황제는 인자하고 손해를 보더라도 귀찮은 일을 마다하는 뒷방 늙은이 같은 존재였다.
이는 세상에 익히 알려진 자히드라의 모습과 별반 다를 바 없었다.
신전이 자신을 경계하는 것을 우려해 자히드라가 대면적으로 꾸며낸 모습이었다.
하지만 자히드라의 황자 시절을 기억하는 나이 든 귀족들은 그의 숨겨진 뜻을 알고 몸을 사리고 있었다.
제플린은 자신을 제외하고는 다른 사람에게 별 관심이 없었다.
첫인상으로 상대를 파악하고 끝내는 게 그의 약점이라면 약점이었다.
자킴은 그런 제플린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제플린이 결혼해서 소백작의 지위를 얻었을 때 자히드라 황제와 더불어 고위 귀족들의 검은 속내에 대해 차차 교육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그 전에 제플린이 자킴을 사지로 내몰았다.
제플린이 자히드라의 본모습을 영영 알 수 없게 된 것은 어쩌면 자업자득이라 할 수 있는 결과였다.
제플린은 자신을 향한 자히드라의 저의를 도무지 추측해내지 못하고 투덜거렸다.
“이래서야 유배와 별반 다를 바 없잖아.”
살벌한 경호원들의 눈살에 제플린은 결국 저택으로 다시 돌아와 바리니카의 작업실과 이어진 방에 드러누웠다.
레베카의 사진이 들어 있는 로켓을 열고 닫았다 하던 걸 반복하던 그는 문득 그리움이 밀려와 눈을 질끈 감았다.
레베카가 몸을 회복했는데도 그녀를 한 번도 안지 못했다.
하루빨리 더 늙기 전에 그녀와의 사이에서 딸을 낳아야 했다.
그래야 그가 계획한 완벽한 그의 왕국이 완성됐다.
제플린은 애가 타는 얼굴로 앉아 있다가 여분의 캔버스 중 적당한 크기를 골라 이젤에 얹었다.
그리고 빨리 시간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렸다.
그는 거침없이 손을 놀려 스케치를 시작했다.
그는 그림에 꽤 재능이 있는 편이었지만 완벽을 추구하는 탓에 그가 그린 그림은 언제나 소각장행이었다.
“부인을 그리시나 보군요.”
제플린이 레베카의 눈에 깊은 푸른색을 채워 넣고 있을 때, 중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물감이 덕지덕지 묻은 앞치마를 걸친 바리니카가 까칠한 제 턱수염을 문지르며 제플린의 그림을 바라보고 있었다.
날카롭게 그림을 평가하는 듯한 그의 눈빛에 제플린은 왠지 수치심이 느껴져 황급히 캔버스를 치웠다.
“누굴 보여주려고 그린 건 아닐세.”
“그림을 보아주는 사람이 없으면 그건 죽은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흐음……. 백작님은 이쪽 방면으로 재능이 출중한 것 같으신데요?”
“선생의 작품에 비하면 쓰레기일 뿐이야. 난 칭찬에 유한 사람은 아니지만, 선생의 작품은 항상 내게 좋은 인상을 남겼어. 몇 개는 가지고 있기도 하지.”
“그거 참 고마운 말씀입니다. 그리고 애정이 듬뿍 담긴 그림을 쓰레기라 하지 마십시오. 어린아이의 낙서도 예술이 될 수 있는 법입니다.”
“내 그림에서 애정이 느껴진다라……. 그런데 내가 레베카를 그린다는 건 어떻게 알았지?”
잔뜩 경계심 품은 그의 눈빛을 바리니카는 가소로운 듯 웃었다.
“데본셔 백작 부인을 모르는 예술가도 있답니까. 그분이 어릴 때부터 뮤즈로 삼고 싶어 하던 화가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아십니까. 그러고 보니…….”
바리니카는 대뜸 제플린에게 얼굴을 들이밀어 그의 이목구비를 구석구석 살폈다.
제플린은 당황해서 뒤로 주춤 물러났다.
“뭐, 뭐하는 거야.”
“부인과 백작님은 참 많이도 닮으셨습니다. 저 같은 화가가 탐낼 만한 아름다운 얼굴입니다.”
찬사의 눈빛을 보내는 사람은 있었지만 이렇게 노골적으로 말하는 사람은 몇 없었기에 제플린은 당황해서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미간의 주름도 완벽한 비율이네요. 흠, 눈은 여름 바다처럼 맑고 투명하고. 코는 어디 보자, 휘어진 곳 하나 없이 높다랗고…….”
“그만두게!”
제 얼굴을 마치 훌륭한 조각상마냥 더듬는 바리니카의 손을 제플린은 질색하며 쳐냈다.
바리니카는 오히려 그런 그의 태도가 이상한 듯 고개를 갸우뚱하며 말했다.
“백작님은 예술을 사랑하시는 분이 아니셨습니까. 아름다운 것을 보고 더듬고자 하는 건 예술가의 본능일진대, 왜 그렇게 경악을 하십니까.”
“나는 예술품이 아니야! 이게 무슨 무례한 행동이란 말인가!”
제플린의 분노가 심상치 않아 보였기에 바리니카는 한 발짝 물러났다.
“알겠습니다. 대신 제 청을 하나 들어주십시오. 저도 이런 곳에 갇혀 그림을 그리는 걸 감수했으니 원하는 걸 하나 얻어야겠습니다.”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제플린은 시근거렸다.
황제의 명령만 아니었다면 저런 작자는 소리 소문도 없이…….
“제 뮤즈가 되어주십시오.”
“뭐라고?”
“희대의 걸작의 주인공이 되고 싶지 않으십니까?”
“지금 나더러 신성모독 그림의 모델이 되어 달라는 건가? 내가 바보로 보여?”
“그림의 주인공이 백작님인지 알아보는 사람이 얼마나 될 것 같습니까. 그리고 저는 보는 그대로 그리는 걸 그다지 좋아하는 편은 아닙니다.”
“그렇지. 사물을 묘하게 비트는 게 당신 작품의 매력이긴 했지.”
“그렇다면 동의하신 겁니다?”
빙글 웃는 바리니카의 표정으로 보고 제플린은 고민에 빠졌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의 제안에 혹했다.
바리니카는 제플린이 평소 흠모해 마지않던 화가였다.
제플린은 지금 그리고 있는 그의 작품을 얼핏 보았다.
작품이 담고 있는 메시지가 파격적이란 걸 감안하더라도 엄청난 대작이라는 것이 직감적으로 느껴졌다.
지금 그가 그리고 있는 건 세대를 이어 두고두고 회자할 만큼 아름다운 작품이었다.
희대의 걸작에 자신이 담긴다?
그렇지 않아도 제플린은 어떻게든 자신의 아름다움을 세상에 보여주고 싶어 안달이 난 사람이었다.
그런 그에게 바리니카의 제안은 무척이나 달콤했다.
잠깐의 고민 끝에 제플린은 결국 제 욕망을 이기지 못했다.
작품은 익명으로 발표될 거라고 황제가 언급했었다.
그러니 누가 작품 속의 인물이 저를 닮았다고 하더라도 잡아떼면 그만이었다.
“잠깐의 시간만 내는 거라면…….”
제플린은 마지 못하는 척 바리니카의 작업실로 들어갔다.
바리니카는 그가 그럴 줄 처음부터 예상했다는 듯 여유롭게 웃었다.
* * *
“똑같이 해줘도 느끼는 바가 없었단 말이지. 그 작자는.”
율리안은 바리니카의 편지를 곱게 접으면서 중얼거렸다.
“뭐, 이제 와 후회를 한다 해도 달라질 건 없을 테지만.”
그는 깃펜을 들어 바리니카에게 보낼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일이 마무리되는 대로 그의 약혼녀와 외국에서 살게 해주겠노라는 내용이었다.
율리안은 바리니카에게 제플린이 했던 짓의 극히 일부를 말해주고 그에게 똑같이 행동하기를 지시했다.
바리니카는 제 약혼녀를 되찾을 수만 있다면 무슨 일이든 하겠다고 했다.
그는 이번 기회에 제플린을 가둬두고 레베카가 그간 받았던 고통을 조금이라도 느껴 보길 바랐다.
그가 일말의 반성이라도 한다면 레베카가 좀 더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에서였다.
그런데 보아하니 제플린은 반성은커녕 불같이 화를 냈다고 했다.
그리고 뮤즈가 되어달라는 바리니카의 부탁을 탐욕스럽게 받아들이기까지 했다.
‘재활용도 안 되는 놈이었어.’
율리안은 다 쓴 편지에 밀랍을 녹여 부었다. 붉은 밀랍이 피처럼 뚝뚝 떨어졌다.
그는 밀랍 위에 무늬 없는 도장을 꾹 찍은 뒤 크로아를 불렀다.
“부르셨습니까.”
“이걸 바리니카에게 전해. 그리고 제플린에게 사람을 좀 더 붙이는 게 좋겠군. 그곳에서 숨 쉬는 것조차 혐오스러울 정도로 말이야.”
“알겠습니다.”
크로아가 조용히 나갔다.
율리안은 차가운 와인잔을 들고 창가로 다가섰다.
곧 폭풍이 몰아칠 것처럼 바람의 기세가 예사롭지 않았다. 창문의 커튼이 세찬 바람에 휘날렸다.
“레베카는…… 뭘 하고 있으려나.”
율리안은 먹구름 낀 숲을 응시하며 중얼거렸다.
그는 일전에 방문했던 레베카의 방을 머릿속으로 그려봤다.
화려한 화장대 앞에 앉아 부드러운 금발을 빗고 있을까.
푹신한 침대에 파묻혀 이른 저녁잠을 자고 있을 수도 있지.
그게 아니라면 창가에 비스듬히 기대어 앉아 나와 같은 하늘을 바라보고 있을 수도…….
우수에 찬 레베카의 깊은 눈동자가 그의 상상 속에서 그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율리안.’
레베카의 눈이 곱게 호선을 그렸다. 그리고 낭랑한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또다시 가슴 부근이 간질거리는 통증이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