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율리안은 일전에 연회장에서 레베카의 손목을 세차게 채가던 제플린을 똑똑하게 기억했다.
‘데본셔 백작이 집에 없으면 일이 수월하다고 했었지…….’
그의 시선이 작은 탁자 위에 올려 둔 와인 병을 향했다. 장미향이 감도는, 제국에서 가장 잘 팔린다는 와인이었다.
와인병에는 데본셔 백작의 직인이 커다랗게 찍혀 있었다.
유스타프에게 장미포도를 조사해보라 했던 건 순간 떠오르는 뿐이었다.
하지만 다시 보니 나쁘지 않은 발상이었다.
율리안은 씨익 웃었다.
“돌아와도 그녀를 제대로 볼 일은 없을 거다. 제플린 데본셔.”
* * *
데본셔 저택의 공기가 미묘하게 달라졌다.
레베카는 유유히 저택을 거닐면서 바뀐 분위기를 만끽했다.
그녀가 지금까지 매수한 사냥개들은 총 여섯 명이었다. 확인한 바에 따르면 저택에는 열세 명의 사냥개가 있었다.
그중 절대로 회유가 불가능한 기사 베이츠와 하녀장 그레이스, 그리고 집사 옥타비오를 제외하면 절반 이상이 레베카에게 돌아선 셈이다.
레베카가 매수한 여섯 명은 소중한 사람이 인질로 잡혀 있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때문에 그들은 자신의 사람을 구할 단서가 있다는 그녀의 말에 손쉽게 넘어왔다.
‘갑작스럽게 주어진 희망은 크기가 작아도 커 보이는 법이지.’
그것도 성녀라고 소문난 레베카가 하는 말이라면.
‘나머지 네 명이 문제인데…….’
세 명은 복잡한 채무 관계가 얽혀 있다고 했고, 나머지 새로 들어온 소년 한 명은 로버트조차 제플린에게 잡힌 약점을 파악하지 못했다고 했다.
‘뭐, 굳이 모두를 매수하지 않아도 괜찮지만…….’
그렇게 레베카가 고뇌하는 사이, 삼층에서 찢어지는 듯한 알리시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답답하다고 하잖아! 당장 풀어!”
“백작님께선 불가피한 상황이 아닌 이상 수갑을 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것 봐. 살갗이 다 까여서 빨갛게 변했잖아. 이게 불가피한 상황이 아니면 뭐란 말이야.”
그레이스는 알리시아의 손목을 슬쩍 보더니 웃음을 흘렸다.
“이건 최고급 실크를 덧댄 수갑입니다. 억지로 빼려고 하지 않은 이상 그런 생채기가 날 일은 없습니다. 혹여 백작님이 하사하신 물건을 함부로 대하신 건 아닌가요?”
“하녀장! 난 무려 백작님의 후계자를 품고 있는 사람이야. 지나친 스트레스는 좋지 않다는 걸 잘 알 텐데. 문제가 생기면 곤란한 건 당신이야. 좋은 말 할 때 풀어줘.”
“규칙입니다. 규칙을 지키세요. 이 아름다운 저택에 계속 발붙이고 싶다면요.”
“뭐, 뭐……?”
그레이스는 고고하게 고개를 쳐들었다.
아, 그래도 저건 너무했는데.
고용인들이 은연중에 알리시아를 무시하고 있다는 건 레베카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레이스마저 면전에 대놓고 그녀를 무시할 줄은 몰랐다.
레베카는 소란을 잠재울까 싶어 계단에 한 발을 올렸다.
그 순간, 알리시아가 그레이스의 머리라도 내리칠 요량으로 손을 번쩍 들었다.
곧이어 벌어질 참사를 예상하고 레베카는 잠시 멈춰 상황을 지켜봤다.
하지만 예상 밖으로, 들려오는 건 알리시아의 새된 비명이었다.
“꺄악!”
“저번에 하녀에게도 손찌검하시더니, 이제는 제게 손을 올리십니까? 역시 교육은 근본을 지우지는 못하는군요.”
그레이스는 알리시아의 한 손을 붙잡고 말했다. 그레이스가 세게 그러쥐었는지 알리시아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그레이스가 냉엄한 표정으로 말했다.
“백작님께서 당신에 대한 처벌권을 제게 모두 일임해 주셨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홑몸이 아니란 걸 참작해서 벌을 내리진 않겠습니다. 다만 백작님께 보고는 올려야 할 것 같군요. 그걸 원치 않으신다면 얌전히 지내는 걸 추천드립니다.”
그리고 알리시아의 팔을 내팽개치듯이 놓았다. 그 반동에 알리시아가 휘청거렸다.
알리시아는 더는 소리를 지르지 않았다. 그녀는 앙금이 가득한 눈빛으로 그레이스를 잔뜩 노려봤다.
“당신, 오늘 일을 후회하게 될 거야.”
그리고 휙 몸을 돌려 빠르게 계단을 내려갔다.
얼핏 방으로 들어가는 그녀의 눈에서 눈물은 본 것도 같았다.
레베카는 몸을 곧게 폈다.
현재 알리시아의 몸 상태를 생각했을 때 가여운 마음이 들기도 했으나 그녀를 도와주기엔 과거 그녀가 저질렀던 극악무도한 일들이 레베카의 발목을 붙잡았다.
아쉽게도 알리시아의 행적을 눈감아줄 만큼 레베카는 선하지 않았다.
그래서 레베카는 가만히 있는 걸 택했다.
가만히 홀로 방에서 울고 있을 알리시아를 그려 보기만 했다.
레베카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눈을 크게 떴다.
삼층에 올라선 그레이스가 저택 전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마치 제플린이 하던 것과 똑같은 모양새였다.
그녀의 발아래에서 고용인들이 기계처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모두가 그녀의 뜻대로였다.
그레이스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찬찬히 고개를 돌렸다.
평소 표정 하나 없던 그녀의 얼굴에 생기가 넘쳐흐르고 있었다.
처음 보는 그레이스의 표정 변화에 레베카는 그녀를 낱낱이 해부하듯 바라봤다.
아래를 살피던 그레이스는 계단 밑에서 자신을 올려다보는 레베카와 눈이 마주쳤다.
자신을 꿰뚫듯이 쳐다보는 레베카의 예리한 눈빛에도 그레이스는 당황한 기색 없이 여유롭게 계단을 타고 내려왔다.
매끄러운 계단의 난간을 쓸어내리는 그녀의 손짓은 한낱 고용인의 것이 아니었다.
주인의 것이었다.
레베카의 영민한 눈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그레이스는 마치 제가 안주인이라도 된 듯 고고하게 레베카를 바라보았다.
레베카는 그런 그레이스에게 응수하듯 장신을 이용해 고개를 쳐들고서 그녀를 한껏 내려다봤다.
물러서지 않는 레베카의 태도를 예상하지 못했는지, 그레이스의 입매가 잠시 불쾌감에 움찔거렸다.
하지만 곧 태연하게 레베카에게 말을 걸었다.
“총 두 번입니다. 마님.”
“무엇이 말인가.”
“제가 마님의 실책을 눈감아줬던 횟수 말입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레베카가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레이스는 계속해서 입을 놀렸다.
“첫 번째, 하녀 복장으로 저를 속이려고 하신 것. 두 번째, 수잔으로 변장하고 시장에 갔다 돌아오신 것.”
예상하지 못한 말이라 레베카는 순간 움찔했다.
그레이스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후후 웃으며 레베카에게 속삭였다.
“설마, 백작저에서 일어나는 일 중에 제가 모르는 일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특히나 하녀들의 일은 철저히 제 소관입니다. 아이들의 손짓 하나만 달라져도 전 알 수 있습니다.”
그래, 역시 이 정도는 되어야 제플린의 왼팔이라 할 수 있었다.
레베카는 당황한 티를 내지 않고 여유로운 미소를 입가에 띠며 말했다.
“내가 고맙다고 인사라도 해야 하는가.”
“아닙니다. 예전에 제 여식의 장례식을 무사히 치를 수 있도록 편의를 봐주셨지 않습니까. 그에 대한 보답으로 앞으로 세 번은 마님을 도와드리기로 결심했습니다.”
레베카는 잠깐 기억을 더듬었다.
그레이스의 하나뿐인 딸은 불치병을 앓고 있었다.
일상생활을 평범히 이어가다 어느 순간 발작과 함께 정신을 잃는 무서운 병이었다.
하루는 쓰러진 그녀의 딸이 이틀이 넘도록 의식을 되찾지 못했다.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한다는 급한 전보에 그레이스는 집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하지만 하필 그 다음 날이 백작가에 커다란 무도회가 열리는 날이었다.
제플린은 당연히 그레이스를 놓아주지 않고 돈으로 보상하려 했다.
그런 그를 레베카가 끈질기게 설득했다.
결국 아침에 백작저로 돌아오는 조건으로 그레이스는 집으로 갈 수 있었다.
그렇게 레베카 덕분에 그레이스는 딸의 마지막 순간을 볼 수 있었다.
“저는 은혜는 잊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이번 성녀 소문 건도 백작님께 따로 보고를 올리지는 않을 겁니다. 아, 이건 소원으로 치지 않을 테니 걱정 마십시오.”
마치 선심이라도 쓴 듯한 말투에 레베카의 미간이 살짝 모아들었다.
“그러다 들키면 후환은 어떻게 감당하려고 그러나.”
“괜찮습니다. 적당한 말로 둘러대면 백작님도 이해하실 테니까요.”
그렇게 말하면서 그레이스는 레베카의 퍼프 소매의 주름을 바로잡았다.
양쪽 다 가지런히 주름이 잡히자 그녀는 레베카를 쭉 훑어보며 감격에 겨운 숨을 들이켰다.
“너무 완벽하세요. 마님은.”
레베카의 등 뒤로 소름이 쫙 돋았다. 그러고 보니 오늘의 옷차림도 그레이스가 준비한 거였지.
레베카는 제 목에 걸린 목걸이의 진주 한 알까지 세심하게 관찰하는 그녀를 바라봤다.
하녀를 시켜도 될 것인데, 그레이스는 언제나 레베카의 치장을 직접 도맡으려 했다.
게다가 그녀는 제플린이 고른 드레스나 액세사리 따위를 이따금씩 제 입맛에 맞게 몰래 변형해서 레베카를 꾸미곤 했다.
황홀하게 제 모습의 이곳저곳을 살피는 그레이스의 눈빛을 바라보고 레베카는 어렴풋이 그녀가 자신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차렸다.
지금 그녀는 레베카라는 아름다운 인형을 제 것으로 만들고 싶어 했다.
그러고 보니 그녀의 딸의 병이 시작된 것도 그레이스의 지나친 통제 때문이라고 들었다.
자신을 통해 딸에게 못다 한 욕심을 채우려고 하는 걸까.
그리고 소원 운운하며 레베카의 편이 되려고 하는 이유도 뻔했다.
‘호의를 베풀면 내가 홀딱 빠질 줄 아는가 보지. 예전에 내가 알리시아에게 그랬던 것처럼.’
레베카는 자신의 인형 줄을 휘어잡고 싶어 안달이 난 그레이스를 눈여겨봤다.
그동안 어떻게 저 탐욕스런 눈길을 숨겼는지 의문스러울 정도였다.
왕좌가 비어버리자마자 그녀는 하이에나처럼 침을 뚝뚝 흘리며 그 자리를 탐내고 있었다.
이런 그레이스의 모습을 레베카가 그동안 알 수 없던 것도 당연했다.
제플린은 언제나 제 왕좌에 앉아 레베카의 목줄을 쥐고 있었으니, 그레이스가 본성을 드러낼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것도 수확이라면 수확일까.’
레베카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이와 비슷한 어투로 말을 하는군. 마치 이곳의 주인이 당신인 것처럼.”
화살을 쏘듯 직설적인 그녀의 말에 그레이스는 순간 움찔했지만 이내 태연한 얼굴로 되받아쳤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엄연히 이곳의 주인은 데본셔가 사람들이지요. 다만, 제 어머니의 어머니, 그리고 그 위의 어머니들까지 이곳을 돌보았기에 애착이 남다를 뿐입니다.”
“돌보았다?”
“그렇지요. 아기님처럼 소중히 데본셔가를 돌보았습니다.”
그레이스는 당당했다.
레베카는 그런 그녀를 찬찬히 보다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 자네의 충성 어린 헌신에 항상 고마워하도록 하지.”
“그리 생각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그건 그렇고, 날 도와주겠다는 게 한 번은 남은 거란 말이지?”
“그렇습니다.”
“그 약속, 꼭 잊지 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