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레베카는 활짝 웃었다.
그레이스는 멈칫하며 그녀의 미소에 담긴 의미를 찾으려고 애썼다. 하지만 결국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했다.
그레이스의 머릿속에서 레베카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고작해야 몰래 담을 넘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럼, 더 하실 말씀이 없으시다면 할 일이 많아 실례하겠습니다.”
그레이스는 레베카를 지나쳐갔다. 그녀가 걸을 때마다 열쇠 꾸러미가 찰그락거렸다.
레베카는 저택의 모든 방을 열 수 있는 열쇠 꾸러미를 잠시간 바라보다 제 방문을 열었다.
방 안을 바라본 순간 레베카는 숨을 멈춘 채 눈을 휘둥그레 떴다.
가구들이 이곳저곳에 널브러져 있고, 찢어진 베개에서 빠져나온 깃털이 사방에 휘날리고 있었다.
레베카는 방문을 서둘러 닫았다.
이내 칸나의 음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더러운 몸을 들이밀어. 죽여버린다.”
“자, 잠깐! 윽. 무슨 힘이 이렇게…….”
칸나가 어느 사내를 바닥에 눕혀 놓고 칼을 그의 우람한 목덜미에 겨누고 있었다.
아마도 칼은 사내의 것인 듯 그의 허리춤에 매여 있는 검집이 비어 있었다.
그는 칸나를 떨치려고 안간힘을 쓰며 샛노란 빛의 눈을 치켜뜨고 으르렁거렸다.
하지만 그때마다 사내의 가슴팍을 누르고 있는 칸나의 무릎에 더욱더 힘이 들어갔다.
“맙소사! 율리안! 칸나!”
레베카의 외침에 칸나가 잠시 주춤한 틈을 타 율리안이 재빠르게 칸나를 밀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후다닥 레베카의 옆으로 갔다.
“저 여자, 혹시 하녀가 아니라 호위 기사였어?”
아직도 칼날이 닿던 서늘한 감촉이 가시지 않아 율리안은 목을 쓸어내렸다.
“아시는 작자입니까?”
칸나는 레베카가 아니라고 대답하기라도 하면 바로 목을 그어버릴 것처럼 여전히 손에 칼을 그러쥔 채 말했다.
율리안도 더 이상 질 생각이 없는지 칸나를 매섭게 노려봤다.
둘 사이에 흐르는 팽팽한 긴장감에 레베카는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정식으로 소개할게. 칸나, 이쪽은 율리안. 요하네스 공작이야.”
공작이라는 말에 칸나는 눈을 휘둥그레 뜨며 칼을 내렸다.
그러나 적대감 어린 눈빛은 여전히 거두지 않은 채였다.
“율리안, 이쪽은 칸나. 일전에 내가 말했던 그 아이야. 기억하지? 하녀인 줄만 알았는데 오늘 보니 호위 기사까지 맡겨도 되겠어.”
서로의 정체를 알고 나서도 둘은 한동안 시근덕거리며 사나운 눈빛을 교환했다.
레베카는 다시 한번 길게 한숨을 내쉬고 둘의 손을 잡아끌었다.
“자, 이제 서로 악수해. 만나서 반갑습니다, 이렇게. 한배를 탄 사이니 사이좋게 지내서 나쁠 것 없잖아.”
둘은 마지못해 손을 잡고 흔들었다.
칸나와 율리안은 마치 불에라도 덴 듯 혐오 어린 표정으로 빠르게 손을 거둬들였다.
칸나는 율리안과 닿았던 손을 옷에 문지르면서 말했다.
“이자가 정말 요하네스 공작입니까? 사칭이 아니고요?”
칸나가 그를 훑어보며 비웃자 율리안이 발끈해서 소리쳤다.
“사칭이라니! 말조심해!”
“그렇지 않고서야 이 야심한 시각에 약속도 없이 숙녀의 방을 찾아온단 말입니까. 그래도 재주는 좋네요. 그 삼엄한 경비를 뚫고 오다니.”
“둘 다 조용히 해, 제발!”
두 사람의 언성이 점점 높아지자 레베카는 혹여나 밖에 소리가 새어 나갈까 봐 불안에 떨었다.
레베카가 눈을 매섭게 치켜떴다.
레베카의 눈치를 살피던 율리안은 칸나에게 무어라 반박하려다 입을 꾹 다물었다.
그는 칸나를 곁눈질하다 목소리를 낮춰 레베카에게 속삭였다.
“단둘이 긴히 할 말이 있는데…….”
“안 됩니다.”
저 칸나라는 여자는 귀까지 밝은 모양이었다.
율리안이 귀찮다는 듯 끄응 소리를 내었다.
칸나는 고집스러운 표정으로 율리안과 레베카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다.
레베카는 미소를 지어 보이며 칸나에게 말했다.
“칸나, 괜찮아. 이 사람은 위험하지 않아.”
“하지만…….”
“네가 걱정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야. 나 믿지?”
레베카가 칸나의 손을 다독이며 말했다.
믿느냐는 말에 칸나는 더는 군말을 할 수가 없었다. 자신이 어떻게 레베카를 불신한다고 말할 수가 있겠는가.
칸나는 아직도 의심을 떨칠 수 없는 모양이었지만 별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율리안이 의기양양하게 칸나를 내려다봤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무슨 일이 있거든 바로 소리치십시오. 제가 달려오겠습니다.”
“고마워. 칸나.”
칸나는 율리안의 어깨를 세게 툭 치고 밖으로 나갔다.
긴장이 풀렸는지 레베카가 한숨을 내쉬며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잠시 율리안을 흘겨봤다.
“정말이지, 아무런 기별 없이 불쑥불쑥 찾아오지 말라고.”
“미안. 꽤 급한 일이라.”
왠지 연적을 이긴 기분이라 율리안은 레베카의 볼멘소리에도 연신 벙글거리며 말했다.
“무슨 일인데?”
“악마의 발톱. 구했어.”
레베카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율리안의 머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
“잘했…….”
하지만 곧 아차 싶었는지 다시 손을 내렸다.
율리안의 눈에 묘한 실망감이 어렸다.
“흠흠. 고마워. 그럼 언제 가져다줄 수 있는데?”
“지금.”
율리안이 화장대 쪽을 눈짓했다.
화장대 위에는 유리돔이 쓰인 화분 안에 악마의 발톱이 심어져 있었다.
“오늘 안으로 잎을 따야 할 거야.”
“이 색깔…… 잎 모양까지. 정말 악마의 발톱이 맞아!”
레베카는 악마의 발톱을 요리조리 살펴보면서 기쁨에 겨워 발을 동동 굴렀다.
그 모습에 율리안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게 다야?”
“응?”
“정말 힘들게 구해 온 거라고. 감사의 표시가 말이 다냐고.”
“뭘…… 원하는데?”
레베카는 제 눈앞에서 움찔거리는 굵은 목울대를 바라보았다.
엄연한 남성의 것인 목울대가 움직일 때마다 레베카는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저번에 하다 말았던 거…….”
율리안이 레베카의 손을 잡았다. 그의 커다란 손 안에 레베카의 얇은 손가락이 살포시 쥐어졌다.
그녀의 손은 자꾸만 간질이고 싶을 만큼 보드라웠다.
율리안은 레베카의 손을 잡고 제 얼굴로 가져다 댔다.
“자, 잠깐!”
레베카는 순간 스쳐 지나가는 아찔한 상상에 그를 밀어냈다.
“우린 아직 결혼도 안 했잖아. 그리고 당신이 한창 혈기왕성할 때라는 건 알겠는데, 이러면 큰일나. 이성을…….”
“무슨 소리야.”
율리안은 레베카가 밀쳐도 바위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손을 잡은 채로 점점 더 다가갔다.
율리안이 제 머리를 레베카의 손에 가져다 댔다.
“쓰다듬어줘.”
“어……?”
레베카는 망치로 머리를 한 대 세게 얻어맞은 것처럼 멍하게 율리안을 쳐다보았다.
이 철없는 공작이 지금 뭐라고 한 거지?
“하. 안 되겠네, 이거. 얼굴까지 빨개져서 대체 무슨 상상을 한 거야.”
얼이 나간 레베카의 모습에 율리안이 장난스레 웃었다.
그녀의 얼굴이 곧 여름 햇살에 새빨갛게 익어가는 자두처럼 변했다.
“무, 무슨 상상을 했다고 그래!”
“야한 상상 했던 거 아니야? 그러니까 이렇게 격한 반응을 보이지.”
“야한 상상이라니…….”
레베카는 다음 말을 할 수 없었다. 율리안이 눈을 감고 손에 머리를 비볐기 때문이었다.
검은 머리가 부드럽게 손가락 사이로 들어왔다.
“한 번도, 이렇게 내 머릴 쓰다듬어 준 사람은 없었어.”
“…….”
“그렇게 벅찬 목소리로 고맙다고 한 사람도 없었고.”
율리안은 레베카의 손을 놓아주었다. 그의 눈이 나른하게 풀어져 있었다.
레베카는 그런 그를 의아스럽게 쳐다보다가 그의 가슴팍 근처에서 코를 움칫거렸다.
“술 냄새는 안 나는데……. 혹시 또 술에 취한 건 아니겠지?”
“그래 보여?”
율리안의 눈이 호선을 그렸다.
그의 눈동자는 아까부터 호박처럼 샛노랗게 빛나고 있었다.
“유감스럽지만, 완벽한 정상이야. 오래 참았으니 이 정도는 받아도 되지 않을까 싶어서.”
“오래 참았다니, 뭘?”
율리안은 대답 대신 시선을 떨구었다.
그는 악마의 발톱이 들어 있는 유리돔을 톡톡 쳤다. 경쾌한 유리 소리가 울렸다.
“이걸 먹으면 많이 아프다고 했나.”
레베카는 잠시 율리안을 바라보다가 실소를 터뜨렸다.
“그럴 거야. 게다가 흉측해지겠지. 수포가 터지면 고약한 냄새도 날 거야. 누구나 날 피하고 싶을 만큼 끔찍한 몰골을 하고 있겠지.”
제 고통을 예고하면서도 레베카는 별다른 감정의 동요를 보이지 않았다.
마치 원래부터 해야만 했던 일인 것처럼 담담했다.
“두렵지 않나?”
몰려오는 폭풍우 앞에서 침착하게 서 있는 레베카를 보고 율리안이 물었다.
오히려 물어보는 그가 겁먹은 눈동자를 하고 있었다.
“두렵지 않아.”
레베카는 손을 꽉 쥐었다.
다부진 주먹만큼이나 그녀의 청청한 눈에는 힘이 들어 있었다.
레베카는 고개를 천천히 들어 율리안을 똑바로 응시했다.
“다시 도망치지 않겠다고 맹세했어. 내 앞날엔 복수가 아니라면 파멸밖에 남지 않았어. 그러니 대체 뭐가 날 망설이게 하겠어.”
말을 마친 레베카는 유리돔 안으로 불쑥 손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악마의 발톱을 움켜쥐었다.
“그렇게 맨손으로 만지면……!”
율리안이 말릴 새도 없이 레베카는 비릿하게 웃으며 잎을 입 안에 털어 넣었다. 생잎이 짓이겨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꿀꺽-
레베카는 한참 잎을 씹다가 삼켰다.
율리안은 말없이 그녀에게 물 잔을 건넸다.
물 잔을 받는 레베카의 손에 어느새 붉게 발진이 올라오고 있었다.
“아, 생각보다 쓰네.”
물 한 컵을 비우고 레베카는 인상을 찡그렸다.
하지만 곧 미간을 펴고 평소의 잔잔한 얼굴로 돌아왔다.
“이제 제플린이 돌아왔을 때 그와 침대에서 뒹굴게 되는 불상사는 없겠지.”
제플린이 오려면 보름 정도가 남았지만 잎을 먹고 중독 증상이 발현될 때까진 시간이 조금 더 걸렸다.
제플린이 오자마자 제 흉측한 얼굴을 보여주고 싶었기에 율리안이 악마의 발톱을 가져온 건 아주 적절한 타이밍이었다.
“차 한잔이라도 할래? 이 시간에 내 방을 찾아올 사람은 지금 저택에 없어. 게다가 칸나가 지키고 있으니까 잠시는 괜찮을 거야.”
레베카는 한쪽에 마련된 트롤리로 다가갔다.
불빛에 그녀의 손목 밑으로 늘어진 쇠사슬이 번쩍거렸다.
그 모습을 보고 율리안은 이를 아득 깨물었다.
“아니, 방금 해야 될 일이 생각났어.”
“그래도 잠시는…….”
애옹.
레베카가 찻주전자를 들고 몸을 돌렸을 때 율리안은 사라지고 없었다.
레오가 꼬리를 흔들며 구워진 식빵 같은 자세로 앉아 있을 뿐이었다.
오늘도 갑작스레 불려왔는지 심기가 불편해 보였다.
레베카는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레오의 머리부터 꼬리까지 쓰다듬었다.
레오의 표정은 금방 풀렸다.
그는 레베카의 손에 얼굴을 부비다가 발진이 올라온 그녀의 손을 핥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