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꼭, 네 동반자처럼 행동하는구나.”
애옹.
“그나저나 율리안이 왜 내게 거짓말을 했을까.”
얼추 계산해보니 그가 이곳에 있던 건 많아봤자 한 시간 남짓밖에 되지 않았다.
율리안은 분명히 세 시간이 지나야 공간이동을 할 수 있다고 했었고.
“아, 모르겠다!”
레베카는 레오를 껴안고 침대 위에 벌러덩 누웠다.
레오는 잠시 당황하다가 그냥 레베카의 품에 안겨 있기를 택했다.
“조금 열이 오르는 것 같기도…….”
이마에 열감이 느껴졌다. 악마의 발톱의 효과가 시작되고 있는 것 같았다.
가물가물 흐려지는 의식 속에서 레베카는 신기루처럼 사라진 율리안을 떠올렸다.
‘쓰다듬어줘.’
그의 머리칼은 레오의 털만큼이나 푹신푹신했다. 머리칼을 헤집을 때마다 좋은 향이 훅하고 풍겨왔었다.
‘아아…….’
레베카는 꿈을 꿨다.
꿈에서 그녀는 컴컴한 터널에 홀로 있었다. 아무리 걸어도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암흑이 그녀를 끊임없이 괴롭혔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레베카는 겁이 나지 않았다.
그녀는 계속해서 나아갔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은 암흑이 사방에서 옥죄어 왔지만 그녀는 이 터널도 언젠가 끝이 날 거란 예감이 들었다.
이윽고 터널의 끝에 도달했을 때, 굳게 닫힌 철문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난감한 얼굴로 내려다본 손에는 어느덧 열쇠가 들려 있었다.
열쇠의 끄트머리엔 요하네스 공작가의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레베카는 열쇠 구멍에 열쇠를 넣고 돌렸다.
문을 힘껏 밀자 굳센 철문이 기괴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느닷없이 쏟아져 내리는 환한 빛에 레베카는 손을 올려 빛을 가렸다. 누군가가 그녀를 불렀다.
‘레베카.’
아는 목소리였다. 지독하게도 다정한 목소리.
그가 손을 내밀었다.
그의 커다란 손을 잡는 순간 레베카는 생각했다.
나, 행복해도 될까?
레베카는 문밖으로 발을 내디뎠다.
눈부신 빛만큼이나 환하게 웃고 있는 그가 보였다.
레베카는 나지막이 그의 이름을 불렀다.
‘율리안.’
* * *
발코니의 문이 열리자 선선한 바람이 금발을 헤쳐 놓았다.
달빛이 질투하듯 쏟아져도 천사처럼 잠든 이는 일어나지 않았다.
율리안은 우뚝 선 채로 깊게 잠든 제플린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지금 머릿속으로 그가 아는 모든 잔인한 고문 방법을 그려가며 제플린을 응징하고 있었다.
‘미안! 잘못했어! 이제 그만……. 으아악!’
잠시지만 그의 비명을 상상하니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율리안의 눈은 어느새 지옥 염화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감히…….’
레베카가 수갑을 찬 모습으로 등장했을 때 율리안은 속으로 몇 번이나 제플린을 저주했는지 몰랐다.
그녀가 속박된 제 모습을 혹여나 수치스러워할까 봐 일부러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하지만 제플린과의 잠자리를 한다는 이유로 독한 악마의 발톱을 바로 집어삼키는 그녀를 보니 이성의 끈이 끊어졌다.
율리안은 칼을 꺼내 들었다.
칼날에 스산한 밤기운이 배었다.
그는 양손으로 칼을 치켜들고 그대로 제플린의 목을 겨냥했다.
그가 쥔 칼과 제플린의 여린 살결이 거의 맞닿았을 즈음 율리안은 손을 멈추었다.
지금 그를 죽인다면 모든 게 쉬워질 것이었다.
레베카는 그 끔찍한 저택을 벗어날 수 있고, 그녀가 과부가 되면 그는 계획대로 빠른 시일 내에 그녀와 결혼을 할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율리안은 그러지 않았다. 그럴 수 없었다.
제플린은 단숨에 죽기엔 갚아야 할 죄가 너무나 많았다.
설령 단칼에 죽더라도 그건 레베카의 몫이었다.
그에게 벌을 내릴 수 있는 자격은 율리안에게 없었다.
그저 하루빨리 레베카가 저 낯짝을 뭉개 버릴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 자신에게 주어진 권리의 전부라고 율리안은 생각했다.
스릉-
아쉬운 소리를 내며 칼이 검집으로 들어갔다.
율리안은 세상모르고 잠에 취해 있는 제플린을 잠시 쳐다보다 등을 돌렸다.
기다리는 건 그의 적성에 맞지 않는 일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레베카…….”
제플린이 잠결에 레베카의 이름을 읊조렸다.
밖으로 나가려던 율리안은 꿈에 젖은 제플린의 목소리에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뒤돌아선 율리안의 눈에 진한 살기가 솟구쳤다.
저 목소리로 레베카를 부르며 추접스러운 짓을 했겠지. 걷잡을 수 없는 분노가 깊은 곳에서부터 폭발했다.
‘이 정도는 레베카도 이해하겠지.’
율리안은 눈을 부릅떴다.
지옥의 염화는 어느새 화산처럼 용암을 분출하고 있었다.
그는 단단히 그러쥔 주먹을 제플린의 얼굴을 향해 날렸다.
빡!
뼈가 부서지는 듯한 소리가 났다.
“끄아악!”
제플린은 고통에 찬 비명을 지르며 잠에서 깨어났다. 그는 통증이 몰아치는 한쪽 눈을 감싸 쥐고 야밤의 침입자를 찾았다.
하지만 방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문이 활짝 열린 발코니에 새하얀 커튼이 밤바람에 휘날리고 있을 뿐이었다.
* * *
흔들리는 마차 안에서 제플린은 거울을 들었다. 그는 멍이 사라진 자리를 면밀히 살폈다.
원래라면 일주일 전에 이미 집으로 돌아왔어야 했을 테지만 얼굴에 들었던 멍이 제대로 빠지지 않았던 탓에 귀가를 미루었다.
엉망인 얼굴로 레베카를 보고 싶진 않았다.
사냥개가 몰래 넣어다 준 연고가 효과가 있었는지 다행히 멍은 생각보다 빨리 빠졌다.
‘대체 누가…….’
제플린은 그날 밤의 일을 떠올렸다.
엄청난 통증에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침실의 문은 그가 잠가둔 그대로였다.
달라진 건 발코니의 창문이 열려 있던 것과 그의 왼쪽 눈두덩이에 남은 커다란 멍뿐이었다.
그가 묵는 방은 고층이었다.
웬만한 사람들은 올라올 수 없는 높이었기에 제플린은 침입자가 상당히 실력 있는 자일 것이라 추측했다.
‘하지만 왜 살려둔 거지?’
그 실력이라면 얼마든지 자신을 죽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차라리 치명상을 입혔으면 이렇게 찝찝하지도 않았다.
그는 뼈가 부러지지 않을 정도의 상해만 입혔다.
침입자의 의도를 읽을 수가 없었기에 제플린은 영 꺼림칙한 기분이 들었다.
이것도 황제가 벌인 일인가?
제플린은 자히드라를 다시 평가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황제는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영악한 노인네일 가능성이 높았다.
순간 마차가 세게 요동쳤다.
제플린은 신경질적으로 마부에게 소리쳤다.
“마차 제대로 못 몰아?!”
“죄, 죄송합니다. 길이 험한지라…….”
깡촌도 이런 깡촌이 없었다.
제플린은 새삼 자신이 저런 구석에 한 달이 넘는 기간 동안 있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 건 자신이 자리를 비운 동안 저택에선 별다른 일이 없었다는 점이었다.
자그마한 변수라도 생기면 연락하라고 사냥개들에게 신신당부를 해뒀다.
한 달 동안 사냥개가 보내온 소식은 여느 때와 다를 바 없이 평화롭다는 내용뿐이었다.
제플린은 그리운 데본셔 백작저를 떠올리며 잘 짜인 그의 세상으로 얼른 돌아가고 싶어 했다.
그는 초조하게 창문 밖을 바라봤다.
그곳으로 돌아가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이다.
이토록 근거 없이 불안한 마음이 드는 것도 집을 떠나온 지 오래되었기 때문이라고 제플린은 스스로를 다독였다.
* * *
“백작님!”
제플린이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그레이스와 집사 옥타비오가 헐레벌떡 뛰어나왔다.
알리시아도 천천히 그 뒤를 따라 걸어 나왔다.
제플린은 가볍게 그레이스와 옥타비오에게 고갯짓하고는 알리시아의 볼에 가볍게 입 맞췄다.
“조금 수척해졌군, 알리시아.”
“당신이 그리워서 그랬나 봐요.”
“그나저나 레베카는 어디에 있지?”
제플린은 한껏 지친 얼굴로 머리를 쓸어올리며 말했다.
가장 먼저 달려와 주길 바랐던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
옥타비오가 당황하며 물었다.
“소식을 전해드렸지 않습니까?”
“무슨 소식.”
“레베카 님이…….”
“레베카가 어쨌다고?”
제플린이 눈을 치켜떴다.
옥타비오는 침착하게 뒷말을 이어갔다.
“아프십니다. 저번 주부터 알 수 없는 고열에 시달리시더니, 사흘 전부터는 몸에 수포가 올라…….”
“뭐라고? 그걸 왜 이제야 말해! 분명 아무 일 없다고 연락하지 않았나!”
옥타비오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닙니다. 계속해서 레베카 님의 상태를 서신으로 넣었습니다. 콜린이 서신 전달을 맡았으니 잘 알 겁니다.”
“콜린!”
제 이름이 불리자 고용인들과 함께 있던 콜린이 화들짝 놀라며 제플린의 앞으로 갔다.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무거운 살기를 풍기며 제플린이 말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해봐.”
“저, 저는 분명히 백작님이 지시하신 정원 뒷담 벽돌 사이에 서신을 가져다 두었습니다.”
“그런데 내용이 뒤바뀐 게 말이 돼?”
제플린은 콜린의 멱살을 잡고 들어 올렸다. 가벼운 그의 몸이 단숨에 허공으로 들어 올려졌다.
콜린은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냥개였다.
그는 발이 빠르고 영리한 소년이라 주로 은밀한 서신을 배달하는 역할을 했다.
콜린이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저, 정말입니다! 아! 그러고 보니 저번 주에 서신을 가지고 갔을 때 어느 덩치 큰 사내가 그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걸 보았습니다.”
“덩치 큰 사내?”
“네, 네! 붉은 머리를 하고 왼쪽 뺨에 십자 무늬 흉터가 있는 자였습니다.”
제플린은 콜린을 집어 던지다시피 바닥에 내려놓았다.
“하…… 비밀 서신까지 검열했단 말인가?”
황제에게 밉보여도 단단히 밉보인 모양이다.
자히드라. 감히 이런 식으로 나온단 말이지?
제플린은 황제에 대한 복수를 다짐하며 서둘러 레베카의 방으로 향했다.
“윽.”
레베카 방이 가까워지자 알 수 없는 악취가 풍겨왔다. 제플린은 얼른 소매로 코를 가렸다.
불길했다.
그의 심장이 나쁜 예감에 쿵쿵 세차게 뛰었다.
억겁 같은 시간이 지나고 마침내 그가 문을 열었을 때, 레베카의 몰골을 확인한 제플린은 휘청거렸다.
그는 충격적인 레베카의 모습에 아무 말도 못하고 탄식하는 소리만을 겨우 내뱉었다.
“아아…….”
“제플린…….”
레베카는 칸나의 부축을 받으며 간신히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아름다운 눈빛은 그대로였으나 그 외의 곳은 끔찍한 수포가 점령하고 있었다.
그녀의 매끄럽던 피부는 온데간데없고, 손과 발은 퉁퉁 부어 있었다.
무엇보다 방 안을 가득 채운 견딜 수 없는 악취가 제플린을 주춤하게 했다.
그가 사랑해 마지않았던 이전의 아름다운 레베카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제플린은 털썩 주저앉았다.
“어째서……. 어째서!”
절규 어린 그의 울음소리가 저택에 울려 퍼졌다.
처절한 그의 비탄에 저택에 있는 사람들은 숨조차 쉴 수 없었다.
“방법이 있을 거다. 의사, 의사를 불러와!”
제플린은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레이스가 눈치껏 주치의들을 미리 불러왔다.
제플린은 가장 나이가 많은 의사의 뺨을 거세게 쳤다.
“내 아내가 저 지경이 될 때까지 뭘 한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