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벌겋게 부어오른 뺨을 잡고 의사가 진땀을 흘리며 말했다.
“백작님, 저희도 모든 방법을 동원해 보았습니다! 고대 의술까지 써보았지만 저런 형태의 병은 난생처음 봅니다. 현재 드릴 수 있는 말씀은 기다리시라는 말밖에…….”
“그럼 지금 저 꼴이 평생 갈 수도 있다는 말이야?”
“지, 지금의 소견으로는…… 그렇습니다.”
“아아! 젠장! 젠장! 젠장!”
제플린은 한 바가지 욕설을 내뱉더니 눈물 젖은 눈으로 레베카를 바라보았다.
레베카는 그저 슬픈 얼굴로 그를 응시할 뿐이었다.
“제플린…… 괜찮아요. 저는 금방 나을 테니…….”
“당연히 나을 거야. 당신을 예전으로 완벽히 돌려놓겠어!”
“그, 그럼 저는 당신만 믿고……. 아아…….”
레베카는 그대로 까무룩 기절했다.
칸나가 레베카의 이마에 손을 대어보더니 체온계를 쟀다.
체온계의 수치를 확인한 칸나가 호들갑을 떨었다.
“안 되겠습니다. 어제보다 열이 훨씬 더 높아졌습니다. 숨소리도 거칠고요.”
주치의 중 한 명이 조심스레 제플린에게 말했다.
“백작님, 마님께선 지금 절대 안정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제플린은 그를 잠시 노려봤다. 하지만 일리가 있다 생각했는지 곧 한숨을 내쉬고 입을 열었다.
“그래. 서재에서 이야기하도록 하지. 목숨을 부지하고 싶다면 치료법을 가져와야 할 거야.”
그의 경고에 주치의들은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제플린의 고약한 성미만 참아낸다면 이곳은 꽤 좋은 직장이었다.
다른 곳보다 배는 높은 봉급에 계속 보살펴야 할 노약자도 없었다.
하지만 이젠 목숨줄이 달렸다.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됐을까.
그들은 침을 꿀꺽 삼키며 머리를 조아렸다.
“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제플린은 그들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혀를 한 번 쯧, 차더니 레베카를 향해 몸을 돌렸다.
그는 문간도 넘지 않은 채 다정히 속삭였다.
“레베카, 내가 돌아왔으니 모든 게 다시 원래대로 돌아올 거야.”
정신을 잃은 레베카에게선 아무런 답도 들리지 않았다.
제플린은 조심스레 문을 닫고 나갔다.
문이 닫히자마자 레베카는 굳게 감고 있던 눈을 번쩍 떴다.
“내 연기 어땠어, 칸나?”
“훌륭하셨습니다.”
“너도 보았지? 겁먹은 아이처럼 내 곁으로 오지도 못하는 제플린을. 마치 자신에게 더러운 게 묻을까 봐 벌벌 떠는 것 같았어.”
“저는 놀랍지도 않습니다. 처음부터 그런 자였습니다.”
“그렇지. 그래야 제플린 데본셔지. 아픈 아내보다 제 몸을 먼저 걱정하는 사람.”
레베카는 다시 눈을 지그시 감았다.
“사랑한다는 말은 다 거짓말이야. 진실한 사랑 같은 건 있을 수 없어. 상대방에게서 원하는 게 사라지면 금방 깨져 버릴 걸 왜 사랑이란 거창한 걸로 부르는지.”
‘그렇지 않습니다…….’
칸나는 진실한 사랑을 믿는 쪽이었지만 굳이 레베카의 의견을 반박하지는 않았다.
그런 말을 하는 레베카가 다분히 지쳐 보였기 때문이다.
레베카가 신음을 흘리며 말했다.
“칸나……. 몸이 너무 간지러워 미치겠어. 머리도 아프고.”
칸나는 서둘러 얼음주머니를 가져와 레베카의 몸 구석구석을 찜질했다.
레베카가 힘없는 목소리로 읊조렸다.
“하아. 좀 낫구나. 예상했던 것보다 더 괴로워.”
칸나가 염려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레베카 님, 회복하실 수 있는 게 확실합니까? 저는 평생 이런 병을 본 적이 없습니다.”
“네가 살았다면 얼마나 살았다고 그래. 세상에는 우리가 모르는 일이 잔뜩 있단다. 난 나을 거야. 그럴 거야.”
칸나가 아무 말이 없자 레베카는 그녀의 콧잔등을 손으로 툭하고 쳤다.
“그런 표정 짓지 마. 난 네가 그런 표정 지을 때마다 마음이 아프더라. 나 믿지, 칸나? 조금만 지나면 열은 내릴 거야. 수포는 여전하겠지만.”
“제가 어떻게 당신을 믿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칸나를 향해 웃어 보이던 레베카는 쌔액거리며 숨을 몰아쉬다가 열에 못 이겨 잠을 청했다.
* * *
한편, 제플린은 서재에서 주치의들이 올린 보고서를 면밀하게 살펴보고 있었다.
모든 방법을 시도해 봤다는 그들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한 장 한 장 보고서를 넘기던 제플린은 세게 책상을 내리쳤다.
“어쩌다가 일이 이렇게 됐냐 말이야! 레베카! 아, 레베카!”
제플린은 절망스럽게 얼굴을 감싸 쥐었다.
“백작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줄곧 옆에서 조용히 제플린의 술잔을 채우고 있던 옥타비오가 말했다.
“지금 상황에 도움이 되는 게 아니라면 입을 다물고 있었으면 좋겠는데.”
제플린은 신경질적으로 술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옥타비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관련이 있을 수도 있는 일입니다.”
“말해봐.”
“마님이 앓고 계시는 병이 신병일 수도 있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신병이라니?”
“사실, 백작님이 떠나시고 난 뒤로부터 레베카 님이 성녀라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습니다.”
“난 또 뭐라고. 레베카가 성녀로 추앙받는 게 어디 하루 이틀인가.”
“이번에는 다릅니다. 그동안 지켜본 바, 레베카 님께 미래를 예지하는 신성력이 있다는 게 제 소견입니다.”
“예지력이라고? 옥타비오. 내가 없는 사이 약이라도 먹은 거야? 무슨 그런 헛소리를.”
“정말입니다. 마님의 도움을 받은 고용인들이 한두 명이 아닙니다.”
“설령 그렇다고 쳐도 내가 그 사실을 몰랐다는 게 말이 안 되지 않는가.”
“그것이……. 아무래도 모종의 이유로 신성력이 억눌러 있다고 들었습니다.”
“대체 그런 터무니없는 소문은 누가 퍼뜨린 거야?”
옥타비오가 심호흡을 크게 한 뒤 입을 열었다.
“로버트입니다.”
“로버트……?”
제플린은 생각에 잠겼다.
옥타비오는 잠시 분노를 가라앉힌 제플린을 보고 슬며시 미소 지었다.
그레이스는 레베카가 성녀라는 소문을 언급하지 말라고 했지만 옥타비오의 생각은 달랐다.
레베카가 불치병에 걸린 건 이미 일어난 일이었다.
집사인 그가 지금 주인을 위해 할 수 있는 건 레베카에게서 주의를 돌릴 만한 일을 만들어 주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기회에 눈엣가시 같던 사람들도 제거하면 좋고.’
옥타비오는 제플린을 잘 알았다.
저택에서 그의 비위를 가장 잘 맞추는 사람은 자신이었다.
“로버트가 헛소문을 퍼뜨릴 만한 인물이 아니란 걸 백작님께서 가장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를 불러 문초해 보십시오.”
옥타비오는 향초를 피웠다. 그가 직접 배합한 향이 그윽하게 서재에 퍼졌다.
제플린은 향기를 깊게 들이마셨다가 다시 내뱉었다. 노곤하게 긴장이 풀어졌다.
제플린은 조금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왜 내가 로버트를 생각하지 못했을까. 그야말로 레베카의 일거수일투족을 함께했던 자인데.”
“충격적인 일을 겪으면 잠시 이성이 마비되는 법입니다. 하지만 백작님께선 워낙 출중하시니 금방 이렇게 해답을 찾아내시는군요,”
“음……. 그렇지. 내가 영특하긴 하지…….”
옥타비오는 부드럽게 제플린의 경직된 어깨를 주물렀다.
향기가 더 진하게 퍼지자 제플린은 몽롱한 기분으로 그의 손길을 받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제플린은 의자에 앉아 스르르 잠에 빠져들었다.
옥타비오는 그를 조심스럽게 침실까지 옮겼다.
‘오늘은 어떻게든 마무리되었군. 이제 중간에 서신을 빼돌린 사람들만 찾으면…….’
“옥타비오. 백작님께선 잠자리에 드셨나?”
침실의 문을 닫고 나온 그를 반기는 건 싸늘하게 식은 얼굴을 한 그레이스였다.
옥타비오는 안 그래도 가느다란 눈을 더 가늘게 뜨고 말했다.
“제가 알아서 다 했으니 그레이스 씨께선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하녀장이란 호칭 대신 제 이름을 부르는 옥타비오의 말에 그레이스의 눈이 잠시 치켜 올라갔다.
그녀는 하녀장이라 불리는 걸 좋아했다.
그 편이 조금 더 백작가의 중요한 인물이라는 느낌을 주었기 때문이었다.
부인이라는 호칭은 나이가 들어 보였고, 제 이름을 부르게 해서 친근하고 만만한 상대로 보이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니 하녀장이란 호칭이 가장 적절했다.
하지만 옥타비오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그녀를 꼬박꼬박 ‘그레이스 씨’라고 불렀다.
그레이스 ‘님’도 아니고 그레이스 ‘씨’라 부르는 그의 태도는 그레이스의 성질을 매번 긁었다.
오늘도 변함없는 그의 태도에 그레이스는 화가 치밀었지만 꾹 눌렀다.
지금 당장은 확인할 게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의도를 알아차렸는지 옥타비오가 슬며시 웃으며 말했다.
“성녀라는 소문을 전해드렸는지 궁금해서 이리 기다리신 겁니까?”
“설마, 고한 거야?”
그레이스는 끼고 있던 팔짱을 풀고 옥타비오를 바라봤다.
“그게 그렇게 놀랄 일인지 전혀 모르겠습니다만. 백작님은 저택에서 일어나는 일은 모두 아실 권리가 있습니다. 그것보다 소문을 함구하라 하셨던 이유를 알고 싶군요.”
“뭐, 백작님의 근심을 조금이라도 덜어드리려는 충심에서 우러난 말이었을 뿐. 다른 의미는 없었네.”
“그럼 다행이지만요.”
옥타비오가 잔잔하게 웃었다.
그가 저렇게 웃을 때는 무언가 탐색하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레이스는 유려하게 화제를 돌렸다.
“이 향은……. 또 그 향초를 피운 건가. 전대 백작님께서 금지하셨던 향초를?”
“그분은 이미 영면에 드셨습니다. 지금의 백작님은 제플린 님입니다. 백작님께서 허락하신 일인데 무엇이 문제입니까?”
“무엇이 문제라니, 제정신으로 하는 말은 아니겠지?”
“백작님이 원하시는 건 심신의 안정이었습니다. 원하시는 걸 얻었으면 그만이지 않습니까.”
옥타비오는 또 웃기만 했다.
옥타비오 리멘, 가난한 귀족이라는 것 이외엔 아무도 그의 정확한 출신은 알지 못했다.
옥타비오는 하인부터 시작해 자킴 데본셔의 신임을 얻어 집사 자리까지 올라갔다.
그는 그레이스와 함께 제플린이 아주 어렸을 때부터 교육을 도맡았던 사람이기도 했다.
제플린은 옥타비오를 아버지보다 더 따랐다. 백작이 되어서도 그에게 의존하는 경향이 있었다.
제플린은 이성을 잃다가도 옥타비오의 한마디에 침착해지곤 했다.
그가 옥타비오를 사냥개의 수장 자리에 앉힌 건 그를 향한 신뢰의 증거였다.
옥타비오는 결과만 좋다면 과정 따윈 무시해도 좋은 사람이었다.
때문에 세세한 부분 하나하나 따져 드는 그레이스와는 상극이었다.
한껏 경계 어린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그레이스에게 옥타비오는 음험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 참, 로버트가 소문의 진원지니 조사해 보시라 말씀드렸습니다.”
“……!”
그레이스의 검은 눈동자가 잠시간 흔들렸다.
옥타비오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
금세 감정을 가다듬은 그레이스는 다시 표정 없는 얼굴로 말했다.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가.”
“글쎄요. 한때 사위가 될 수도 있었던 자이니 소식을 궁금해하실 것 같아 하는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