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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친 백작 부인이 돌아왔다-45화 (45/232)

45.

죽은 딸은 유일한 그녀의 역린이었다.

그레이스는 파들거리는 입꼬리를 애써 밑으로 끌어 내리곤 되받아쳤다.

“내 딸은…… 죽었네. 그러니 로버트는 남이나 마찬가지야. 그리고 난 처음부터 둘 사이를 반대했던 거 알잖나. 오히려 그를 미워해야 마땅하지. 딸과 내 사이를 멀어지게 했으니.”

“아, 그렇지요. 제가 잠시 깜빡했네요. 노파심에 그만. 그럼 저는 물러가 봅니다. 백작님을 위해 해야 할 일이 많아서요.”

옥타비오는 의미심장한 웃음을 남기고 자리를 떴다.

그레이스는 그의 웃음에 섬뜩한 기분이 들어 그의 뒷모습을 한동안 노려봤다.

* * *

“로버트가 불려갔다고?”

“네. 백작이 아침부터 긴급히 찾았다고 합니다.”

“생각보다 늦게 발각됐네.”

레베카가 태연히 말했다.

칸나가 의문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발각될 걸 미리 알고 계셨습니까?”

“당연하지. 아마 옥타비오의 짓일 거야. 내게 미쳐 있는 제플린의 관심을 배신자 척결이라는 쪽으로 돌리려는 계획이겠지, 아마.”

“그럼 로버트는…….”

“죽겠지.”

“예?”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레베카의 태도에 칸나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레베카는 칸나의 반응을 못 본 척, 레오가 가지고 온 서신을 읽었다.

“유스타프가 장미포도를 연구하고 있다고 하는구나. 율리안이 내 계획을 미리 알기라도 한 것 같네. 신기하지 않니, 칸나?”

“그러네요. 그자가 그래도 도움이 된다니 다행입니다.”

그렇게 대답하면서도 칸나는 석연치 않은 표정을 지었다.

아무래도 로버트를 죽게 하겠다는 레베카의 말을 믿기 힘든 눈치였다.

하지만 칸나는 이번에도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레베카의 모든 결정을 따르겠다는 그녀의 결심은 확고했다.

그런 그녀를 지그시 관찰하던 레베카가 빙그레 웃었다.

“이제 로버트도 저택을 벗어날 때가 됐어. 때론 죽어야 자유가 되는 일도 있는 법이지.”

“로버트도 레베카 님을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다면 영광으로 생각할 겁니다.”

“걱정 마. 그를 다시 되살릴 거니까.”

“네……?”

“설마, 내가 로버트를 죽게 놔둘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겠지? 그것도 제플린의 손에? 이거 실망인걸.”

레베카가 짓궂은 웃음을 흘렸다.

그녀는 답신을 마무리하곤 레오의 목걸이 함 안에 넣었다.

레오가 창문을 넘고 나가자 레베카는 서신 두 장을 더 썼다.

그러곤 칸나에게 건넸다.

“하나는 캐서린이 보는 앞에서 건네고, 하나는 어머니께 몰래 건네드려. 그리고 리베르타 구휼원에도 잠시 들르고. 마가렛이 마음을 정할 때가 된 것 같아.”

“레베카 님께서 이렇게 아프신데 제가 어떻게 자리를 비울 수 있겠습니까?”

칸나는 통증을 견디느라 이따금 인상을 찌푸리는 레베카를 걱정스레 바라봤다.

레베카가 칸나의 두 손을 잡았다.

“이제 열도 많이 내렸고 괜찮아. 너 아니면 마음 놓고 맡길 사람이 없는걸. 그리고 이제 예전과는 달리 내 편이 많아졌어.”

레베카가 박수를 두어 번 쳤다.

이내 문이 열리더니 수잔과 또 다른 하녀 에밀리가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레베카가 준 정보로 큰돈을 만진 두 사람이었다.

그녀가 성녀라고 굳게 믿고 있는 수잔과 에밀리는 이제 레베카의 말이라면 죽는 시늉도 할 수 있었다.

레베카가 ‘봤지?’라는 눈빛으로 칸나를 쳐다봤다.

칸나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잠시 웃더니 곧 엄격하게 수잔과 에밀리에게 이것저것 지시하기 시작했다.

레베카는 흐뭇한 표정으로 하녀들을 응시했다.

* * *

‘정말 감당할 수 있겠어요? 지금이라도 거절하세요. 다른 방법을 찾아볼 테니.’

깊은 바다색의 눈동자가 물어왔다.

진심 어린 걱정에 긴장되어 있던 그의 입매가 풀어졌다.

‘이 정도의 희생 없이 이곳을 빠져나가리라 생각한 적 없습니다.’

‘할 수 없네요. 그럼 목숨 걸고 당신을 구해 낼 테니 부디 버텨주시길.’

하나뿐인 생명을 하찮은 자신에게 거는 그녀는 잃어버린 제 옛 연인을 떠올리게 했다.

‘로버트!’

아아, 레일라.

심연으로 끊임없이 떨어지는 그의 손을 꿈에서나 그려보던 레일라가 덥석 잡았다.

차갑다.

망연히 그녀의 온도를 바라보고 있는데 레일라가 그를 위로 끌어올린다.

‘로버트 정신 차려!’

‘레이……. 보고 싶어. 그냥 이대로 너와 함께 가면 안 될까.’

‘안 돼. 내 몫까지 행복하기로 약속했잖아. 돌아가.’

‘레일라!’

그가 사랑해 마지않던 밤하늘을 품은 검은 눈동자가 별빛을 흩뿌렸다.

그녀의 눈물을 타고 로버트는 수면 위로 올라갔다.

* * *

“일어나!”

차가운 물이 얼굴에 끼얹어졌다.

로버트는 숨을 내뱉으며 깨어났다. 이마에서 흘러내린 피로 시야가 흐렸다.

멍하니 있던 로버트는 곧 자신이 어디에 있었는지 기억해 냈다.

빛의 전당 지하에 있는 고문실이었다.

제플린이 그의 앞에 앉아 인내심의 한계가 다다른 표정으로 말했다.

“다시 한번 더 묻겠다. 왜 그런 헛소문을 퍼뜨린 거지?”

“헛소문이 아닙니다. 그분은 진정한 성녀십니다.”

“애석하군, 로버트. 자네를 정말 아꼈는데 말이야.”

제플린이 한숨을 쉬며 손짓했다.

그러자 대기하고 있던 기사 베이츠가 달궈진 부지깽이를 들었다.

이윽고 로버트가 고통에 찬 비명을 질렀다.

제플린의 뒤에서 옥타비오가 그 모습을 퍽 즐겁게 바라보고 있었다.

‘옥타비오…….’

네 짓이구나.

옥타비오는 제플린의 신임을 잔뜩 받고 있는 로버트를 줄곧 견제해 왔다.

로버트를 제 자리를 위협할 인물로 낙인을 찍은 게 분명했다.

하지만 로버트는 개의치 않았다. 그는 옥타비오의 자리를 원한 적이 없었다.

개는 어차피 개다. 고작 개의 우두머리 자리를 두고 육탄전을 벌일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옥타비오는 싹부터 잘라버리는 타입이었다.

그는 그동안 로버트의 꼬투리를 잡을 기회만 호시탐탐 노렸다.

그리고 옥타비오는 오늘 그 기회를 잡았다.

‘이쯤 되면 충분하려나.’

로버트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마, 마지막으로 담배 하나만 피워도 되겠습니까. 그럼 모든 진실을 말하겠습니다.”

베이츠가 제플린의 눈치를 봤다.

무슨 대답을 하든 어차피 그는 죽을 운명이었다. 제플린은 이 상황에 대한 화풀이 대상이 필요했다.

제플린이 손가락 마디를 뚝뚝 꺾으며 손을 풀었다.

망자의 마지막 소원쯤이야 들어줄 수 있지.

제플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베이츠가 로버트의 가슴팍에서 담배를 찾아내어 그의 입에 물려주었다.

“후우.”

로버트는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싸늘한 연기가 폐부를 가득 채웠다. 로버트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모든 것은 그분의 뜻대로…….’

죽음의 향기는 달콤했다.

“자, 그럼 이제 말해.”

로버트는 몽롱한 상태로 제플린이 원하는 대답을 쏟아냈다.

“연모했습니다.”

“뭐라고?”

“다시 말씀드릴까요? 레베카 님을 연모했습니다. 그분의 아름다운 얼굴과 심성을 사랑했습니다. 레베카 님은 당신께 과분한 존재입니다. 그분을 사랑한다면 이만 놓아주십시오! 당신은 그녀에게 시련일 뿐입니다.”

“이 개자식이!”

그럴 줄 알았다는 반응이었다.

제플린은 눈에 핏발이 선 채로 로버트에게 달려들었다.

제플린은 분노로 정신을 잃은 채 너클을 낀 손으로 로버트의 머리를 연신 가격했다.

어느새 피투성이가 된 로버트의 입에서는 신음조차 흘러나오지 않았다.

“감히! 개 따위가 주인의 것을 탐내?”

옥타비오는 삐져나오려는 웃음을 겨우 참고 제플린을 말렸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과 다르게 옥타비오의 눈은 큰 호선을 그렸다.

옥타비오가 피 묻은 제플린의 손을 잡아챘다.

“그만하십시오. 이러다가 죽겠습니다.”

“이놈이나 저놈이나 내 걸 탐내기는…….”

분노를 삭이는 제플린을 뒤로하고 베이츠가 로버트의 코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죽었습니다.”

“알아서 처리해.”

제플린은 쯧, 하고 혀를 한번 차더니 머리를 쓸어올렸다. 그는 거슬리는 벌레를 밟은 정도의 표정을 짓고 있었다.

“기분이 더럽군. 옥타비오, 목욕물 준비해주라고 일러.”

“알겠습니다.”

냉기가 흐르는 지하실 안에 계단을 오르는 제플린의 발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베이츠는 제플린이 완전히 지하실을 나갈 때까지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로버트에게로 돌아섰다.

로버트의 입에 물린 담배가 마지막까지 맹렬하게 타들어 갔다.

* * *

레베카의 서신을 전달 받은 다나에는 서둘러 외출 준비를 했다.

모자를 쓰고 밖으로 나서려는데, 테오가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여보. 대체 어딜 그렇게 다니는 겁니까?”

“저번에도 말했잖아요. 젠키스 부인 댁에 간다고요.”

“거짓말하지 말아요. 당신이 거짓말할 때마다 오른쪽 눈썹이 올라가는 걸 다 알고 있습니다. 혹시…….”

다나에는 순간 멈칫했다.

그이가 뭔가 알고 있나?

테오의 파란 눈에 금방 눈물이 차올랐다.

“혹시 다른 남자가 생긴 건 아니겠죠? 내가 능력이 없어서…….”

“테오 오벨리아! 그게 무슨 말이에요!”

“그런 게 아니라면 대체 왜 나를 두고 자꾸 밖으로 나간단 말입니까!”

테오는 아예 다나에의 허리를 붙들고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아니, 이이가 미쳤나. 비켜요!”

테오가 눈물을 뚝뚝 흘리며 말했다.

“난 당신 없이 못 살아. 다나에, 다른 남자와 재혼하려거든 날 첩으로라도 들여줘요.”

“아까부터 자꾸 이상할 소릴 하네!”

“아빠!”

리비아와 헤레나가 테오에게 소리쳤다. 그리고 득달같이 달려와 각자 테오의 팔을 하나씩 붙들었다.

“엄마 일 방해하지 마세요!”

“그래요! 엄마는 지금 돈 벌러 가는 거라고요.”

“돈을 벌러 간다고……?”

테오의 젖은 눈이 커다랗게 떠졌다.

다나에가 화들짝 놀라며 쌍둥이 딸들을 쳐다봤다.

“너희들, 어떻게 알았니?”

헤레나와 리비아는 헤헤거리며 서로 번갈아 대답했다.

“요새 식사 메뉴가 엄청 좋아졌잖아요!”

“새 드레스도 사주시고!”

“매일 디저트도 먹을 수 있고!”

“아빠가 돈을 한 푼도 못 벌어오는데 누가 벌어왔겠어요?”

“엄마지요!”

갑자기 훅 들어오는 딸들의 말을 듣고 있던 테오는 충격에 휩싸였다.

“도, 돈을 번다고? 당신이?”

캐서린을 심부름 보내길 잘한 것 같았다.

다나에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쉬곤 대답했다.

“맞아요. 자세한 건 말 못해요. 걱정은 말아요. 불법적이거나 위험한 일은 아니니까.”

“내가, 내가 무능력해서 결국 당신이……. 당신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겠다고 약속했는데…….”

테오가 다시 울먹거리자 다나에는 서둘러 그를 달랬다.

“사람마다 적성이 다른 거잖아요. 당신은 돈 버는 재주가 없을 뿐이에요.”

헤레나와 리비아도 질세라 거들었다.

“맞아요. 아빠는 대신 요리를 잘하잖아요.”

“청소랑 빨래도 엄마보다 잘해요!”

테오는 기다란 속눈썹을 끔뻑거렸다.

“그, 그렇긴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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