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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친 백작 부인이 돌아왔다-46화 (46/232)

46.

다나에가 부드럽게 웃었다.

“거봐요. 당신도 잘하는 게 있잖아. 그러니 얌전히 있어요. 돈은 내가 벌어 올게.”

“알겠어요……. 하지만 무리하면 안 됩니다.”

“걱정 말아요. 그 어느 때보다 힘이 넘치니까.”

그렇게 말하는 다나에의 눈에 생기가 돌아 반짝거렸다.

테오는 그 모습을 넋 놓고 보고 있다가 얼굴을 붉혔다.

“저기, 다나에……. 급한 일이 아니라면 지금 잠시 위층으로…….”

다나에가 눈을 흘기며 테오의 등을 찰싹하고 쳤다.

“애들 앞에서 못하는 말이 없네! 바쁘니까 꿈도 꾸지 마요.”

다나에는 테오를 밀쳐내고 대문을 열었다.

리비아가 테오를 끌고 가는 사이, 헤레나가 다나에에게 쪼르르 다가와 속삭였다.

“엄마, 캐서린 언니는 우리에게 맡기고 마음 편히 갔다 오세요.”

“……!”

방긋 웃는 헤레나의 예쁜 얼굴에 다나에는 눈시울이 시큰해졌다. 말한 적 없는 데도 딸들은 모든 걸 알고 있었다.

언제 저만큼 컸을까.

그녀의 눈에 세 딸은 아직도 마냥 아기 같아 보였다.

하지만 어느새 무럭무럭 자라 부모가 망쳐놓은 집안을 다시 일으켜 세우려 하고 있었다.

훌쩍 커버린 아이들이 대견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내게 너무 과분한 딸들이야.’

그렇기에 다나에는 더욱 힘차게 발을 내디뎠다.

* * *

“비정상적인 수포의 형태도 그렇고, 난생처음 보는 병입니다. 열을 내리는 약을 처방해 드릴 수는 있으나 일시적인 효과만 볼 수 있을 겁니다.”

남쪽 끝에서 왔다는 의사가 진찰을 끝내더니 고개를 내저었다.

제플린은 이제 화를 낼 힘도 없는지 의자에 주저앉아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이걸로 스무 번째…….’

근 일주일 동안 제국의 내로라하는 의사들이 레베카의 상태를 보고 갔다.

그리고 대부분 가망이 없다는 말만 반복했다.

몇 명은 치료할 수 있다고 큰소리를 쳤지만, 거짓으로 밝혀져 흠씬 두들겨 맞고 쫓겨났다.

‘당연하지. 이건 병이 아니라 악마의 발톱 중독이니까.’

레베카는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중독 증상은 그녀가 기억하고 있는 것보다 더 고통스러웠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수백만 마리의 벌레가 기어 다니는 기분이었다.

그렇다고 섣불리 긁었다간 수포가 터져 견딜 수 없는 쓰라림이 시작됐다.

하지만 후회한 적은 없었다.

거의 반송장 상태로 자신을 바라보는 제플린의 퀭한 눈동자를 보면 없던 힘이 솟아났다.

제플린은 그녀를 잃을까 전전긍긍하면서도 수포로 덮인 몰골을 보면 연신 헛구역질을 해댔다.

레베카는 그를 향해 힘겹게 입을 열었다.

“제플린, 그만 날 포기해요. 난 괜찮아요. 당신에겐 알리시아가 있잖아요.”

“아니. 내게 아내는 너 하나뿐이야, 레베카.”

“그런 말 알리시아가 들으면 서운해 할 거예요.”

“상관없어. 레베카, 대체 어쩌다 이렇게 된 거야. 내 사랑스러운 레베카…….”

퍽 안쓰러운 모습이었으나 우스웠다.

침대에서 멀찌감치 떨어진 호화로운 의자에 앉아 손수건으로 코를 감싼 이가 걱정하는 꼴이라니.

똑- 똑-

조심스러운 노크 소리가 들렸다.

레베카의 몸에서 나는 악취를 환기하기 위해 문이란 문을 죄다 열어놓았기에 레베카는 노크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실례하겠습니다.”

옥타비오가 제플린에게 다가와 무어라 속삭였다.

제플린은 심각한 얼굴로 그의 말을 경청하다 화들짝 놀라 소리쳤다.

“뭐? 포도 농장에?”

“당장 가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빌어먹을. 하필 이런 때…….”

“이곳은 제게 맡기시고 마음 편히 갔다 오십시오. 그리고 신전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신전? 내가 쓸데없는 짓이라고 하지 않았나.”

“그래도 마지막 희망입니다. 한 번쯤 시도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됐어. 필요 없다고 해.”

옥타비오의 끈질긴 설득이 실패한 듯 제플린은 손을 회회 저었다.

옥타비오의 얼굴에 잠시 짜증이 올랐다가 다시 사라졌다.

제플린은 레베카를 바라보고 부드럽게 말했다. 그의 눈은 짙은 피로로 가득 차 있었다.

“레베카, 잠시 나갔다 와야 할 것 같아. 그동안 옥타비오가 돌봐줄 테니 얌전히 있어.”

얌전히 있으라니, 이보다 더 어떻게 얌전히 있는가 말인가.

이젠 저 단어가 그에게 습관이 된 듯싶었다.

레베카는 자그맣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플린이 자리를 비우자 그가 있던 의자에 옥타비오가 앉았다.

그는 평소처럼 입술에 미소를 띠고 작은 실눈으로 레베카를 낱낱이 파헤쳐보고 있었다.

“어디 불편하신 곳은 없습니까?”

레베카는 생글생글 웃는 옥타비오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제플린이 그에게 의지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전 생부터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옥타비오에게 보내는 신뢰는 어린 시절부터 함께한 고용인에 대한 믿음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라 여겼다.

제플린은 누군가에게 마음을 내어 주는 인물이 아니었다.

하지만 옥타비오의 최근 행보를 지켜본 레베카는 그에 대해 다시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는 사람의 경계를 푸는 탁월한 재주가 있었다.

그의 몇 마디 질문에 고용인들은 비밀을 술술 말하곤 했다. 대부분 자신이 비밀을 말하는지도 모른 채였다.

몇 번 그 광경을 목격하고 나니 합리적인 의심이 들었다.

제플린의 삐뚤어진 성격의 기원이 과연 그의 아버지뿐이었을까.

옥타비오는 이 저택의 뱀이었다.

제 주인의 목을 휘감고서 온갖 달콤한 말을 쏟아내는 위험한 뱀.

그에게 물려 서서히 죽어가는 사람이 얼마나 많았을지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레베카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괜찮네. 그나저나 옥타비오, 칸나는 요즘 뭘 하고 있나? 갑자기 하녀들이 바뀌어서 불편해서 말이야.”

옥타비오는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칸나는 새로 맡은 일을 잘 해내고 있습니다. 천직인 듯싶군요. 지켜본 바, 마님의 시중을 들 만한 아이가 아니라고 백작님께서 판단하신 듯합니다. 새로 배정된 하녀들도 유능하니 조금만 참아주시길 바랍니다.”

로버트가 죽고 사냥개의 인사가 대대로 개편됐다.

사냥개의 인사는 옥타비오의 고유한 권한이었다.

그는 칸나가 로버트와 연관이 깊다고 여겼는지, 그 재주 많은 아이를 빨래방으로 보내버렸다.

옥타비오는 레베카가 고용인들의 환심을 사고 있다는 것도 눈치챈 것 같았다.

에밀리와 수잔이 아니라 처음 보는 하녀들을 레베카에게 배정했다.

방 안에서 꼼짝도 할 수 없는 레베카는 졸지에 손발이 묶인 셈이었다.

하지만 이젠 기다리긴 하면 될 뿐이라 레베카는 개의치 않았다.

제플린과 옥타비오의 대화를 듣자하니 율리안이 장미포도 작업을 시작한 것 같았다.

기존의 포도 품종보다 튼튼하게 개량된 장미포도의 유일한 약점은 스바나 진딧물이었다.

스바나 진딧물은 장미포도의 잎을 검게 물들이고 과육을 흐물거리게 했다.

원래라면 한 달 후에나 일어날 일이었지만 유스타프가 개입한 탓에 그 시기가 빨리 찾아왔다.

스바나 진딧물을 죽이려면 특정한 살충제가 필요했다.

하지만 그 살충제는 법으로 금지된 독한 약물이라 유일한 해결책이 바로 타마라 무당벌레였다.

타마라 무당벌레는 번식 조건이 까다로워 인위적으로 환경을 조성해 줘야 했다.

그리고 레베카는 타니샤에게 이 방법을 일러주었다.

타니샤는 빠르게 움직였다.

그녀는 레베카가 무당벌레를 독점해야 한다고 언질하자마자 전국의 벌레를 사들이기 시작했다.

애초에 수요가 그리 많은 벌레는 아니였기에 타니샤가 어렵지 않게 독점할 수 있었다.

타마라 무당벌레의 새끼들이 부화했다고 했으니 제플린이 필요한 배 이상의 벌레를 확보했을 것이다.

‘이제 타니샤가 알아서 돈을 쓸어 모으는 일만 남았구나.’

레베카는 슬며시 웃었다.

“기분 좋은 상상이라도 하셨나 봅니다.”

찰나를 놓치지 않고 옥타비오가 물었다.

레베카는 웃는 낯을 유지하는 옥타비오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러고 보니 그가 웃지 않는 모습을 본 적이 거의 없었다.

“그래. 내 남편과의 추억을 회상했네.”

“그러시군요. 두 분의 금슬은 언제나 보기 좋습니다.”

“그런데 자넨 할 일이 많은 걸로 아는데, 이렇게 있어도 되는가?”

“아무래도 지금 나가려던 참이었습니다. 하녀를 부르겠습니다. 그럼 부디 편히 쉬시길.”

옥타비오는 음침한 미소를 곁들인 인사를 하곤 밖으로 나갔다.

그가 나가기 무섭게 하녀들이 들어왔다.

“시중들겠습니다.”

새로운 하녀들은 확실히 능숙한 손길이었지만 어딘가 영혼이 없어 보였다.

차가운 얼음주머니가 쉴 새 없이 열을 뿜어내는 수포에 맞닿았다.

아플 정도로 차가운 냉기에 레베카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일이 순조롭게만 풀린다면 기다리는 건 문제가 아니었다.

하지만 옥타비오와 제플린의 대화에서 들린 ‘신전’이라는 단어가 거슬렸다.

제플린은 친황제파였다. 때문에 그는 누구보다 신전과의 접촉을 조심해야 하는 위치였다.

옥타비오도 그걸 모르지는 않을 터인데.

레베카는 생각에 빠졌다.

신전에 연통을 넣을 만한 이유가 대체…….

‘신병이라 생각하는구나.’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옥타비오의 의도가 더욱 의문스러웠다.

정말 순전히 자신의 병을 고치기 위해 신전을 끌어들인 걸까?

게다가 신병은 신전에서 조사하러 나온다면 바로 거짓으로 밝혀질 사안이었다.

옥타비오 정도의 사람이라면 레베카가 성녀라는 소문을 분명 믿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제플린의 관심을 돌리기 위한 쇼를 하는 것일까.

자신이 레베카의 병을 낫게 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는 걸 보여주기 위한 한 편의 연극?

‘하긴 신전에 가짜 성녀라는 게 발각된다 하더라도 그가 크게 손해 볼 것은 없겠지.’

최초 발언자인 로버트가 죽었으니 모든 걸 그의 탓으로 돌리면 신성 모독죄쯤은 그냥 넘어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걸 이용할 수는 없을까.’

미동 없이 누워 있는 그녀의 사지와 다르게 레베카의 자그마한 머리가 활발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이건 모조품이에요. 여기 꽃잎 무늬가 미묘하게 다른걸. 이곳과는 거래를 끊는 게 좋겠어요.”

화병의 무늬를 유심히 살피던 다나에가 타니샤에게 말했다.

타니샤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다나에가 지적한 부분을 살펴봤다.

정말 그녀의 말대로 카탈로그 속 진품과 모양이 미세하게 달랐다.

살롱 건물이 지어질 동안 다나에는 살롱 안에 채울 물건들을 고르기 위해 타니샤 상회를 자주 드나들었다.

다나에는 타니샤에게 온전한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머리색과 푸른 눈동자, 그리고 눈매를 보아 그녀가 다나에 오벨리아, 즉 레베카의 어머니라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었다.

‘그 어머니에 그 딸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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