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다나에는 자신의 사업을 돌볼 뿐만 아니라 타니샤에게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
타니샤는 데뷔탕트만 치르고 곧장 공작가에서 일을 시작했다.
그녀는 사교계엔 별 관심이 없었기에 귀부인들을 상대하는 데 많은 애를 먹었다.
그럴 때마다 다나에가 나서서 타니샤에게 조언을 해주었다.
과거에 황후의 시녀였다더니, 그녀는 타고난 것처럼 사교술이 좋았다.
속속들이 도착한 물건들을 꼼꼼하게 살피는 다나에를 보면서 타니샤는 문득 그녀가 제 어머니였다면 하고 생각해 봤다.
그러면 자신은 지금쯤 누군가의 부하가 아니라 유능한 사업가가 되어 있을지도 몰랐다.
타니샤의 부모는 타니샤의 교육에 큰 관심이 없었다.
타니샤는 거의 방치되다시피 컸다.
때문에 그녀는 모든 걸 혼자 배웠다.
외롭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자기 연민이 드는 동시에 레베카가 떠올랐다. 이런 어머니 밑에서 컸다면 레베카도 만만치 않은 재능이 있을 터였다.
그런데 백작 부인이란 이름에 갇혀 살아야 한다니, 타니샤는 저도 모르게 레베카의 안전한 이혼을 응원하고 싶어졌다.
“상단주님! 데본셔 백작가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직원이 헐레벌떡 창고로 들어왔다.
데본셔란 말에 다나에와 타니샤는 눈빛을 주고받았다.
“금방 갈게. 다과를 준비하라 이르고, 부인을 뒷문으로 안내해드려.”
타니샤는 치마에 묻은 먼지를 털어냈다. 그리고 레베카가 보낸 서신을 다시 한번 더 꼼꼼하게 읽었다.
타니샤는 추신으로 붙어 있는 한 줄까지 읽고 배시시 웃었다.
이 얼마나 달콤한 지령인가.
타니샤의 발걸음에 힘이 들어갔다.
자, 이제 돈 벌 시간이다.
* * *
“이 정도면 후하게 쳐 드리는 겁니다.”
데본셔가의 가신 파블로 자작은 거만한 태도로 액수가 적힌 카드를 타니샤의 앞에 스윽 내밀었다.
‘생각보다 일이 쉽게 풀리겠어.’
아직 어린 티를 벗진 못한 타니샤의 통통한 볼을 보며 파블로는 조용히 미소 지었다.
와인 사업은 예술 유통업과 더불어 데본셔가의 핵심 사업 중 하나였다.
그 사업을 맡게 된다면 따라올 부와 명예는 당연한 것이었다.
그는 자작의 신분이었지만 저보다 훨씬 높은 이들을 하나둘씩 짓밟고 올라 와인 사업의 총책임자가 되었다.
그는 여느 귀족처럼 높은 지위에 취해 일을 소홀히 한 적이 없었다.
포도 농장부터 시작에 와인을 유통하는 와인 가게까지 모두 그의 감독 아래 엄격하게 관리되고 있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농장의 장미포도들이 죄다 시들어버렸다.
갖은 노력 끝에 원인을 찾아냈지만 문제는 해결책이었다.
어찌 된 일인지 전국의 타바라 무당벌레의 씨가 말라 있었다. 모두 이곳 타니샤 상회에서 사들였다고 했다.
그는 처음에 장미포도를 시들게 한 게 상회의 짓이 아닐까 추측했지만, 막상 이곳을 보니 그럴 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치지 않고서야 시장 한복판에 있는 이런 허름한 상회가 데본셔 백작가를 건드릴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상단주는 어린 아가씨였다.
제 딸보다 어려 보이는 타니샤이기에 파블로의 경계가 누그러졌다. 아마 운 좋게 벌레를 사들였던 것이겠지.
파블로는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리면서 타니샤가 기뻐하며 승낙하기를 기다렸다.
“흐음…….”
타니샤는 짐짓 고민하는 척하며 파블로가 내민 종이를 쳐다봤다. 그리고 그 뒤에 ‘0’을 하나 더 붙여 다시 내밀었다.
“이 정도는 주셔야겠는데요?”
파블로는 제 눈을 의심했다.
“이봐, 아가씨. 아직 금전 감각이 무딘가 본데, 고작 벌레에 이 정도의 값을 부르면 살 사람은 아무도 없어.”
“그래요?”
타니샤는 고민도 하지 않고 ‘0’을 하나 더 붙였다.
“이 정도 가격은 어떠세요, 아저씨? 급한 거 아니었어요?”
“이…….”
제플린이 해결하라고 보낸 예산의 다섯 배는 족히 넘는 액수였다.
파블로는 지팡이를 바닥에 쿵하고 내리찧었다.
“아저씨라니! 그리고 이런 터무니없는 가격까지. 나는 지금 데본셔 백작가의 대표로 와 있는 걸세. 예를 갖추시게!”
“아, 그쪽이 먼저 날 아가씨라 부르기에 호칭을 그렇게 통일하는 건 줄 알았지. 그리고 조사해봤는데, 그쪽 큰일 났더라. 장미포도 수급에 큰 문제가 생겼다면서? 어디 보자, 조금 있으면 여름 축제에 황태자 탄신연회까지 있잖아! 대목이 코앞인데 유일한 해결책을 내가 독점하고 있으면 가격을 올려 받는 게 장사의 기본 아니겠어?”
타니샤는 달력에 동그라미를 쳐가며 파블로의 눈앞에 들이밀었다.
“그리고 당신 상사가 그 제플린 데본셔잖아. 오늘 안으로 해결 못하면 당신, 죽을지도 몰라.”
거기서 그치지 않고 타니샤는 손으로 목을 긋는 시늉까지 했다.
파블로는 지팡이를 붙잡고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데본셔 백작님의 성정을 알면서도 이렇게 오만방자하게 나온다고? 이런 무너져 가는 상회 하나쯤은 하루아침에 없어질 수 있는 거 모르는가?”
“아, 그럼 어디 한번 해보시든가. 내가 망하는 게 빠를지, 아저씨가 죽는 게 빠를지 내기해 봐도 좋아요.”
타니샤는 조금도 아쉽지 않다는 얼굴이었다.
어느덧 그녀는 귀엽고 어린 아가씨가 아니라 노련한 늙은 악마 같은 미소를 베어 물고 있었다.
파블로의 등 뒤로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눈앞의 상단주는 협상을 하려는 게 아니었다. 일방적으로 그를 벗겨 먹으려 작정하고 있었다.
다른 대안책이 없으니 파블로는 그녀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제플린에게 예산을 더 받을 수는 있겠지만 그랬다간 터무니없는 가격에 벌레를 사들였다는 걸 알려야만 했다.
그건 그의 무능함을 증명하는 꼴이나 마찬가지였다.
제플린은 무능한 사람을 참지 못했다. 이건 결국 제플린의 도움 없이 그의 사비로 나머지를 채워야 한다는 뜻이었다.
‘해결해! 시일이 늦을 때마다 네 식솔에게 끔찍한 일이 생길 건 예상하고 있겠지?’
검은 잎으로 물든 광활한 농장을 살펴본 제플린이 분노에 차서 내뱉은 말이 떠올랐다.
제플린은 허투루 협박하는 일이 없었다.
파블로는 그의 말이 농이 아님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선택지가 없어…….’
당장 발등에 떨어진 불부터 꺼야 했다.
파블로는 훗날 크게 보복할 것을 다짐하며 모난 어조로 말했다.
“거래하지.”
“그럴 줄 알았어요. 계약서는 미리 만들어 두었으니 여기에 사인만 하시면 됩니다.”
큰돈이 수중에 들어온다는 사실 때문인지 퍽 유해진 말투로 타니샤가 종이를 내밀었다.
계약서를 찬찬히 읽던 파블로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일시불이라고? 그것도 선불에 현금으로? 제정신인가!”
“싫으면 관두시든가요. 듣자하니, 대금을 늦게 주기로 유명하신 분이던데요? 자작님 때문에 망한 사업이 제가 들은 것만 해도 열 군데가 넘는데 어떻게 당신을 믿겠어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오늘 안으로 만들 수 없는 금액이야.”
“데본셔 백작가가 그 정도 돈도 못 써요? 실망인걸. 그럼 없던 계약으로 하죠.”
타니샤는 냉큼 계약서를 가져가는 시늉을 했다.
파블로는 계약서 위에 두꺼운 손을 턱하니 올려뒀다.
‘이 망할 계집. 반드시 내 손으로 망하게 해주겠어.’
이를 악물며 그는 거칠게 사인을 했다.
* * *
<수급완료.>
크로아가 손바닥만 한 쪽지를 율리안에게 슬쩍 보여줬다.
율리안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이거, 오래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집안에 일이 생겨서…….”
데프리아교의 교황이 흐르는 땀을 손수건을 닦으며 거대한 흰색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의 육중한 몸집에 소파가 내려앉았다.
“괜찮습니다. 새로 들어온 조각상을 관람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습니다.”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는 게 당연했다.
오히려 율리안은 그의 난감함을 즐기고 있었다.
교황의 집에 생겼다는 곤란한 일은 자신이 만든 작품이었다.
교황 데스라치노가 애타게 찾는 그의 다섯 번째 부인은 지금쯤 바리니카와 함께 바다 위의 항해를 즐기고 있을 터였다.
데스라치노는 평소보다 유들하게 구는 율리안을 보고 눈을 가늘게 좁혔다.
또 무슨 꿍꿍이가 있는 건지…….
야옹.
“오! 레오 님!”
둘 사이에 레오가 끼어들었다. 율리안은 달마다 의무적으로 레오를 대신전에 데리고 와야만 했다.
“그럼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사제가 끝에 거대한 수정이 달린 지팡이를 가져왔다. 수정에서 흐릿한 빛이 새어 나왔다.
교황은 사제에게서 지팡이를 건네받았다. 그리고 수정을 조심스럽게 레오의 머리에 가져다 댔다.
레오와 수정이 맞닿은 면에서 환한 빛이 쏟아졌다.
율리안은 누군가가 발밑을 잡아당긴 것마냥 몸이 땅으로 꺼지는 느낌이 들었다.
‘언제나 썩 달갑지 않은 기분이군.’
다량의 신성력이 소모될 때 일어나는 증상이었다.
현기증이 일어 율리안은 잠시 이마를 짚었다.
사제들은 그런 그에게 관심조차 주지 않고 오로지 레오의 안위만을 살폈다. 교황 데스라치노도 마찬가지였다.
“어쩜 이렇게 볼수록 어여뻐지실까.”
데스라치노가 살집이 두툼한 손을 뻗어 레오의 윤기나는 털을 쓰다듬으려 했다.
그러자 레오는 샛노란 눈을 위협적으로 치켜뜨고 이빨을 드러냈다. 데스라치노는 움찔하며 손을 뒤로 물렸다.
“제, 제가 실례를 범했습니다.”
역대 교황은 한 번씩은 레오를 쓰다듬어 봤다는데, 자신은 언제쯤 가능할는지.
데스라치노는 퍽 섭섭한 표정으로 도도히 율리안의 곁으로 걸어가는 레오를 바라봤다.
레오는 대놓고 편애를 보이려는 듯 현기증에 눈을 감고 있는 율리안의 손등을 부드럽게 핥았다.
율리안이 웃으며 눈을 떴다.
“레오, 간지러워.”
데스라치노가 눈을 가늘게 떴다.
대체 신의 사자께선 뭐가 좋다고 저 버릇없는 꼬맹일 사랑하시는지 모를 일이었다.
어지러움이 조금 가시자 율리안의 시선이 사제의 손에서 빛나고 있는 지팡이를 향했다.
지팡이 끝의 수정은 어느새 눈이 부실 만큼 밝게 빛나고 있었다.
“하. 그 장난감에 빛이나 내자고 대체 매달마다 이게 무슨 짓인지. 이 짓을 할 때마다 내 수명이 깎인다는 거, 알고는 있습니까?”
율리안의 볼멘소리에도 항상 있었던 일인 듯 데스라치노는 인상 한번 변하지 않고 말했다.
“신성한 분을 모시는 분께서 어찌 성물을 장난감이라 하십니까. 이 빛의 지팡이는 존재만으로도 불쌍한 이들의 이정표가 됩니다. 마치 레오 님처럼요.”
율리안의 미간이 와락 구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