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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친 백작 부인이 돌아왔다-48화 (48/232)

48.

저건 성물 따위가 아니었다.

신성력에 반응해 빛이 나는 수정을 그의 선조 중 한 명이 발견해 신전에 기부한 것이었다.

신전은 낡은 나뭇가지에 수정을 꽂아 오래된 성물로 둔갑시키고, 닿기만 해도 행운을 가져온다는 말로 사람들을 꾀었다.

행운의 빛을 받으려 너도나도 지갑을 열고 신전에 헌금을 했다.

신전은 그 수익 중 일부분을 요하네스 가에 상납했기에 그간 요하네스 공작들은 군말 없이 신성력을 수정에 불어넣었다.

‘사기꾼들.’

여느 종교가 그렇듯이 데프리아교도 처음 시작부터 오늘날만큼 타락하진 않았다.

데프리아교가 외치는 건 평등과 자유였다.

누구나 차별 없이 쾌락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가 교리였다.

물론, 타인의 자유를 침범하지 않는 선에서라는 제약과 함께였다.

하지만 데프리아교가 국교가 되고 신전이 힘을 얻기 시작하자 ‘타인의 자유를 침범하지 말아야 한다’는 제약은 점차 성서에만 남아 있는 교리가 되었다.

신도들을 무리하게 끌어들이는 과정에서 ‘누구나 차별 없이’란 교리도 생략되기 시작했다.

이제 데프리아교에 남은 것은 끝없는 쾌락을 추구하는 것, 그뿐이었다.

신전 또한 헌금을 받아내는 데만 열중했다.

신전은 제국에서 유일하게 합법 카지노를 운영하는 주체이기도 했다.

율리안은 세대를 거치면서 점점 불어나는 교황들의 몸집을 보고 조소를 금치 못했다.

사제와 수도자들은 교황의 취향에 맞는 외모의 사람으로 채워졌다.

오죽하면 외국에선 데프리아교를 ‘교황의 하렘’이라 조롱하기까지 할까.

이런 파렴치한 신전이 제국의 국교로 아직까지 건재할 수 있었던 건, 광신도들의 존재와 오랜 세월 이어져 내려온 관습 때문이었다.

오랫동안 제국을 관철하던 신앙심이 하루아침에 바뀌기는 어려운 일이다.

신전의 불합리한 일련의 일에 분노하는 자들은 항상 있었다.

하지만 그들도 데프리아 여신의 탄생절이나 신전이 주관하는 카니발은 기꺼운 마음으로 참석하고는 했다.

전통이라는 이름하에 데프리아교는 로탄더스 제국과 줄곧 함께하고 있었다.

율리안은 제가 무너뜨리려고 하는 것이 얼마나 뿌리가 깊은지 잘 알고 있었다.

‘서두를 것 없지.’

사람들이 썩은 뿌리란 걸 스스로 알아채기까지 기다려야 했다.

율리안은 계획한 바를 다시금 떠올리며 잔잔히 미소 지었다.

* * *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크로아, 마차를 준비하라고 일러둬.”

율리안의 명에 크로아가 고개를 숙이더니 냉큼 밖으로 나갔다. 이곳에 오래 있기 싫은 건 크로아도 마찬가지였다.

레오에게 시선을 떼지 못하던 교황은 율리안의 말에 그제야 그를 쳐다보았다.

“오랜만에 오셨는데 좀 더 있다 가시지요.”

데스라치노는 아쉬움이 뚝뚝 떨어지는 말투였다. 물론 율리안이 아니라 레오를 향한 아쉬움이었다.

레오는 눈치껏 문 앞으로 갔다.

데스라치노는 할 수 없다는 듯 문을 열고 레오와 율리안을 입구까지 안내했다.

“그나저나 대체 언제 혼인할 생각이십니까. 한 살이라도 젊을 때 후사를 보셔야지요.”

오늘은 왜 언급하지 않는가 했다.

율리안은 월례 행사 같은 데스라치노의 말에 손을 내저었다.

“후사는 저 말고 교황께서나 열심히 보십시오. 부인이 몇 명인데 아직까지도 아이가 없으십니까.”

“이이…….”

데스라치노의 뒷말은 시끌벅적한 신도들의 외침에 묻혀들었다.

“오오오!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아, 안 돼!”

사방에서 환호성과 절규하는 비명이 한데 뒤섞여 들려왔다.

하루의 운세를 예지하는 주사위가 도르륵 소리를 내며 쉼 없이 굴러갔다.

일정한 액수의 헌금을 하면 누구든지 주사위를 던질 수 있었다.

주사위의 숫자가 높을수록 그날의 운이 좋다는 의미였다.

주사위를 굴리는 신도들의 대부분은 신전과 이어진 카지노를 이용하려는 사람들이었다.

주사위의 가장 높은 숫자가 나올 때까지 헌금함에 돈을 던져 넣는 그들의 눈엔 붉은 핏발이 서 있었다.

신성한 하얀색으로 가득 찬 신전 내부의 분위기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색의 눈빛이었다.

익숙한 광경이었지만 율리안은 불쾌감에 눈을 찌푸렸다. 언제 보아도 기분 나쁜 곳이었다.

율리안 일행이 거의 입구에 다다랐을 즈음 사제 한 명이 그들을 향해 뛰어왔다.

그리고 율리안의 귀에 들리지 않을 만큼 조용하게 데스라치노의 귀에 속닥였다.

사제의 말을 들은 데스라치노는 입이 귀에 걸릴 만큼 함박웃음을 짓더니 서둘러 레오를 배웅하고 헐레벌떡 신전 안으로 다시 들어갔다.

율리안이 직접 듣지 않았다고 해서 그가 들을 수 없는 건 아니었다.

율리안은 속으로 레오를 불렀다.

레오가 귀찮다는 듯 뒷발로 귓바퀴를 긁으며 말했다.

‘레베카가 성녀일지도 모른대.’

* * *

“그럼, 성물을 꺼내겠습니다.”

레베카는 조심스레 성물을 꺼내는 사제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섬세하게 조각된 금덩이 위에 투명한 수정이 박혀 있는 펜던트였다.

한눈에 봐도 성스러움이 느껴지는 물건이었다.

모여든 고용인들이 눈이 휘둥그레져서 성물을 바라보았다.

성녀를 확인하는 의식은 생각보다 간단했다. 성물과 접촉한 뒤 성물에서 빛이 나기만 하면 됐다.

의외로 성녀나 성자의 그릇이 되는 건 그리 드물지 않았다.

한 달에 한두 번 꼴로 신성력을 타고난 사람들이 나타나고는 했다.

하지만 정식으로 신전에 속한 성녀가 되는 건 쉽지 않았다.

첫 번째로 본인이 성녀가 되고 싶어야 했고, 두 번째로 수려한 외모를 갖추어야 했으며, 마지막으론 신의 사자에게 허락을 구해야 했다.

특히 앞의 두 가지 조건을 만족한다고 하더라도 신의 사자인 레오의 마음에 드는 게 가장 어려웠다.

게다가 성녀나 성자가 되었을 땐 신전의 공식 마스코트로 수행해야 할 일이 많았다.

거의 무보수나 다름없는 명예직을 반기는 사람은 몇 없었다.

그래도 신성력이 있다는 증명서는 효력이 있었다.

신성 증명서를 가지고 있다는 건 좋은 가문의 일자리를 얻을 때나 결혼 시장에 나갔을 때 유리한 조건이었다.

때문에 신의 그릇의 자격이 있다는 사실 자체는 영광스러운 일이긴 했다.

어쩐지 아침부터 하녀들이 분주하게 목욕을 시킨다고 했다. 그렇다고 해서 수포가 내뿜는 악취가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제플린이 포도 농장을 살펴보러 간 틈을 타 옥타비오가 몰래 사제를 들인 것 같았다.

그가 알게 되면 경을 칠 게 분명한 일인데도 옥타비오는 흐뭇한 표정으로 사제의 행동거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왜 이렇게까지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레베카는 옥타비오에게 의아한 눈빛을 보냈다.

옥타비오는 레베카의 시선을 느끼고 천천히 걸어왔다. 그리고 의자에 앉아 있는 그녀의 귀에 속삭였다.

“성녀가 되시면 이곳에서 나가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소문을 내신 것 아닙니까? 당신이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도록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

어떻게 보면 레베카를 위하는 것 같은 말이었다.

하지만 상냥한 웃음 뒤에 숨겨진 비열한 그의 의도를 레베카는 단숨에 읽어냈다.

레베카는 기쁨으로 차오르는 눈을 크게 부릅떴다.

그의 말 한마디에 지난 생의 기억과 현재의 기억이 점철되었다. 그러자 뜻밖의 결론이 내려졌다.

아아. 그래서 그가…….

옥타비오에게 레베카는 눈엣가시였다.

그는 제플린을 제 마음대로 조종하고 싶어 했으나 그의 앞을 레베카가 항상 막아섰다.

레베카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존재 자체만으로도 옥타비오에게 방해가 됐다.

제플린은 옥타비오의 말을 곧잘 듣다가도 레베카가 끼어든 일이라면 금세 태도를 돌변하곤 했다.

그러니 옥타비오는 레베카가 없어지길 바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지난 생, 백작저에서 도망칠 때 지나치게 일이 쉽게 풀린다고 생각했다.

그땐 알리시아가 도와줬기 때문이라 여겼었지만 알리시아도 감시받고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런 두 여인이 감히 주인을 배신하는 데 아무런 사냥개도 방해하지 않았다.

게다가 레베카가 리베르타 구휼원으로 도망가리라는 건 뻔한 사실이었음에도 그녀는 들키지 않았다.

심지어 구휼원에서 나온 뒤 살았던 마을도 백작령에 인근 한 마을이었다.

그때의 레베카는 먹고사는 데만 급급해 그리 신중하게 행동하지 않았다.

사냥개들이 마음만 먹었다면 언제든지 레베카를 찾을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아이를 낳고 꽤 시간이 지났건만 레베카는 잡히지 않았다.

운이 좋았던 게 아니었다.

옥타비오가 그녀가 돌아오는 걸 원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훗날 제플린에게 발각되긴 했지만 그건 아마 알리시아가 그에게 언질을 줬기 때문이었겠지.

‘하!’

레베카는 이 상황이 우스웠다.

의도치 않게 옥타비오와 뜻이 같았지만 애석하게도 그의 바람대로 순순히 성녀가 될 생각은 없었다.

이제 레베카는 도망치지 않는다.

“이, 이 빛은……!”

펜던트에서 눈부신 빛이 뿜어져 나왔다. 엄청난 신성력이 잠재되어 있다는 뜻이었다.

사제가 대뜸 레베카의 발 앞에 엎드렸다.

“서, 성녀님!”

모여서 구경하고 있던 고용인들 사이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레베카, 그녀는 정말 성녀였다!

레베카는 환한 빛에 잠시 당황했다가 입이 찢어져라 웃고 있는 옥타비오를 보고 금세 납득했다.

‘조작이구나.’

그렇다고 성물까지 조작할 능력이 있는지는 몰랐다.

레베카는 옥타비오의 수완이 심상치 않음을 깨달았다.

그가 제플린의 오른팔이라는 건 그만큼 능력이 출중하다는 의미였다.

“이게 무슨 짓들이지?”

몰려든 고용인들을 비집고 제플린의 고함이 들려왔다.

옥타비오는 고양된 그의 목소리에 잠시 미간을 모았다가 다시 사근한 웃음을 지었다.

제플린이 환하게 빛나는 성물과 엎드린 사제를 번갈아 보더니 옥타비오의 멱살을 잡았다.

“옥타비오! 내가 쓸데없는 짓 하지 말라고 했잖나!”

“제가 신전에 오실 필요 없다는 서신을 넣었는데, 그만 늦었나 봅니다. 사제께서 친히 발걸음 하셨으니 내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리 말하며 옥타비오는 고요하게 웃었다. 제플린의 협박 따윈 무섭지도 않다는 태도였다.

제플린은 옥타비오를 뚫어지게 바라보다 이내 손을 풀었다.

옥타비오는 망가진 셔츠 깃을 정리하면서 덧붙였다.

“하지만 보십시오. 헛된 일이 아니었습니다. 저 성물의 빛을! 레베카 님은 정말 성녀셨습니다.”

“거짓이다. 그럴 리가 없어. 똑바로 말해! 레베카가 정말 성녀라고?”

제플린이 칼을 빼 들고 사제의 목에 가져다 댔다.

고용인들이 헙, 하고 숨을 들이마셨다.

아무리 제플린이라고 해도 사제에게 무기를 겨누는 것은 엄연한 신성모독이었다.

사제는 벌벌 떨면서도 제 신념을 굳히지 않고 입을 열었다.

“진실입니다. 성물이 빼어난 빛을 보였으니 이곳에 계신 백작 부인께서는 누구보다 뛰어난 신의 그릇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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