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
제플린이 든 칼이 부들부들 흔들렸다.
그렇다면 로버트는 헛소문을 퍼뜨린 게 아니었다.
그자가 어째서 나보다 더 레베카에 대해 많은 것을 알 수 있었던 말인가!
제플린의 분노는 엉뚱한 곳으로 향했다. 그는 로버트를 그렇게 쉽게 죽인 것을 통탄하고 있었다.
‘레베카 님은 당신께 과분한 존재입니다.’
빌어먹을.
제플린이 좀처럼 분노를 가라앉히지 못하자 옥타비오가 서둘러 사제에게 물었다.
“그렇다면 마님의 몸의 수포와 열 또한 신성력 때문인가?”
사제는 잠시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제 짧은 식견으로 말씀드리자면…… 예, 그렇습니다. 신병입니다. 예로부터 뛰어난 신성력을 가진 이가 신의 그릇이 되기를 거부하면 간혹 신병에 들곤 했습니다. 온몸에 두드러기가 생기고 열이 펄펄 끓었다는 기록이 있는 걸로 미뤄보아, 백작 부인께선 지금 신병을 앓고 계십니다.”
병명을 알아냈다는 말에 제플린은 사제의 어깨를 잡고 세차게 흔들었다.
“그러면 해결책은! 원래대로 돌아올 수 있는 방법이 있긴 한 거지?”
“하나 있기는 한데…….”
“빨리 말해!”
제플린이 윽박지르자 사제가 머뭇거리며 말했다.
“신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것밖에 방법이 없습니다.”
제플린은 온몸에 핏기가 가시는 기분이 들었다.
옥타비오가 서둘러 의자를 가져와 제플린이 넘어지기 전에 그를 부축했다.
제플린은 힘없이 의자에 늘어진 채로 탄식을 내뱉었다.
“아아…….”
성녀 또는 성자가 된다는 것은 오로지 신만을 섬긴다는 뜻이었다.
결혼한 상태라면 이혼을 해야지만 입적이 가능했다.
자식까지 버리고 올라야 하는 희생의 길이었기에 선택의 길을 열어둔 것이다.
제플린은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레베카의 원래 모습을 되찾으려면 그녀를 포기해야 했고, 그렇다고 옆에 두기엔 그녀는 끔찍한 몰골을 하고 있었다.
그가 사랑한 레베카의 모습이 아니었다.
상황이 심각하게 돌아가건 말건, 레베카는 사제를 흥미롭게 바라봤다.
‘흠…… 연기력이 아주 수준급이네. 나중에 이름이라도 알아봐야겠어.’
그런 그녀의 시선을 느낀 사제가 레베카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눈이 마주치자 레베카는 싱긋 웃었다. 사제는 그걸 도와달라는 의미로 받아들였는지 대뜸 비장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이제 정해주셔야 하겠습니다.”
제플린이 힘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무얼 말이냐.”
“레베카 님이 성녀가 되실지 말지를요.”
“당연히 레베카는!”
제플린은 소리치려다 멈추었다.
대체 어떤 게 좋은 건지 알 수 없었다.
자신이 꿈에 그리던 모습을 되찾고 남의 손에 들어가느냐, 아니면 흉측하더라도 과거의 영광을 기리며 제 옆에 두느냐.
고민을 거듭하던 제플린의 머릿속으로 한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신병은 유전이 아니니 아이를 낳을 수 있지…….’
결론을 내리자 제플린의 분노가 점점 사그라들었다.
그는 차분해진 말투로 말했다.
“레베카는 성녀가…….”
“아닙니다. 배우자의 의견은 반영하지 않습니다.”
사제가 대뜸 제플린의 말을 막았다.
“뭐라?”
“성녀로 입적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본인의 의사입니다. 자유를 사랑하시는 데프리아 여신께선 당신의 종이 불행한 걸 원치 않으십니다.”
그리고 레베카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레베카 데본셔 님. 데프리아 여신의 충실한 종이 되시겠습니까?”
레베카는 모여든 구경꾼들의 얼굴을 찬찬히 훑었다.
이 수많은 구경꾼도 옥타비오의 작품이리라.
옥타비오는 그녀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레베카는 그를 빤히 쳐다보다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는…….”
* * *
“제기랄!”
옥타비오는 펜싱 칼을 들고 인간모형을 사정없이 난자했다.
모형이긴 하였으나 그의 잔인한 난도질은 진짜 살인이라도 저지르는 것처럼 섬뜩했다.
옥타비오는 가쁜 숨을 내쉬며 남청색 머리칼을 쓸어올렸다.
그의 얼굴은 때론 노인 같다가도 어느 순간 소년의 것이 되곤 했다.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외모에 아무도 그의 정확한 나이를 알지 못했다.
“감히 나를 물 먹여?”
옥타비오는 낮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저는 성녀가 되지 않겠어요. 제플린이 없는 삶은 상상할 수 없으니까요.’
그는 거세게 칼을 휘둘렀다. 인간모형이 순식간에 여러 갈래로 토막 나 바닥에 투둑 떨어졌다.
그가 판단하기론 분명히 레베카는 제플린을 떠나고 싶어 했다.
제플린의 앞에서 감히 요하네스 공작과 춤을 추고, 몰래 외출을 감행하는 걸 미뤄보았을 때 그랬다.
게다가 그 눈빛!
가끔 차갑게 제플린을 쳐다보는 그 눈빛이 옥타비오를 확신케 했다.
어떤 심경 변화가 있었는지는 몰라도 레베카는 결코 그런 얼굴을 할 인물이 아니었다.
그런데 왜 기껏 자신이 길을 열어주었는데도 나가지 않는지.
‘내가 과대평가를 한 것인가.’
그의 예상보다 레베카는 훨씬 어리석은 여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게 뭐가 좋은 것인지 판단조차 못하는, 자신이 혐오해 마지않는 머저리 같은 분류.
이제 보니 로버트를 구워삶은 건 어떤 계략이 아니라 단순한 우연일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 반반한 얼굴로 유혹했을 수도 있고. 혹시 모르지, 그보다 더한 것을 줬을지도…….
그렇게 생각하자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그는 분수에 맞지 않게 과분한 것을 타고난 사람들을 멸시했다.
그는 오늘부로 레베카도 같은 부류라 여기기로 했다.
자신이 레베카 정도의 외모를 타고났다면 한 나라를 쥐락펴락했을 수도 있었다.
그런데 이제 그것마저 잃고 하찮은 제플린 옆에 남기로 하다니.
‘어리석다. 어리석어.’
옥타비오는 제 멱살을 잡던 제플린을 떠올렸다.
그를 통제하는 게 점점 힘들어지고 있었다. 제플린이 완전히 자신의 손을 벗어나기 전에 해결책이 필요하다.
“내 손으로 움직일 수 없다면…….”
옥타비오는 깊은 생각에 빠졌다.
그때 사냥개 한 명이 그의 방문을 두드렸다.
사냥개들의 정보는 제플린에게 닿기 전에 옥타비오에게 먼저 보고됐다.
“뭐지?”
“알리시아 마님이 방에서 나왔습니다.”
옥타비오의 눈이 번뜩였다.
“그래, 백작에겐 인형이 하나 더 있었지. 버려진 인형이.”
* * *
알리시아는 소리 없이 방을 나섰다.
어쩐 일인지 복도엔 촛불 하나 켜져 있지 않아 누군가가 죽었을 때를 연상하게 했다.
스산한 어둠이 저택에 깔렸음에도 불구하고 알리시아는 겁내지 않았다.
그녀의 발걸음은 사뿐했지만 비장했다.
레베카가 병에 걸렸을 때 알리시아는 환호했다. 그녀가 병석에 누워 있는 동안은 자신이 제플린의 사랑을 독차지할 테니.
그녀의 병명을 어떤 의사도 찾지 못하자 기쁨의 눈물을 흘렀다.
그리고 오늘, 레베카가 불치의 신병이란 걸 알게 되자 신께 감사 기도를 올렸다.
저런 흉측한 몰골로는 백작 부인의 일을 제대로 해낼 수 없었다.
제플린도 레베카의 몸에서 나는 악취에 코를 찡그리곤 했다.
알리시아는 레베카가 쫓겨나고 자신이 진정한 백작 부인이 되는 건 정해진 수순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제플린이 옥타비오에게 은밀히 속삭이는 걸 엿들은 그녀는 크게 좌절했다.
‘몸을 최대한 맞대지 않고 아이를 가질 수 있는 방법은 뭐가 있지?’
그리고 그날 오후, 그레이스가 아이를 가지는 데 좋다는 약재를 대량으로 사들이기 시작했다.
제플린은 레베카를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
아니, 레베카를 버리는 일이 있더라도 제플린은 그녀에게서 난 아이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울분이 벅차올랐다. 레베카가 아이를 낳는다면 알리시아와 제 아이의 입지는 뻔했다.
출신이 한미한 어미를 둔 아이는 귀족 세계에서도 환영받지 못할 것이다.
알리시아는 부른 배를 쓰다듬었다.
‘내가 지켜줄게.’
그리고 결심에 찬 눈빛으로 레베카의 방문 고리에 손을 얹었다.
“그 작은 칼로 뭘 하려고?”
알리시아는 화들짝 놀라 다른 손에 든 단검을 떨어트릴 뻔했다.
옥타비오가 그런 알리시아를 바라보며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찼다.
“네 연약한 힘으로 그걸 휘둘러 봤자 치명상도 못 입혀. 생각이란 걸 좀 하고 행동하라고 예전부터 누누이 일렀거늘.”
“옥타비오…….”
“뭐, 일이 이렇게 됐으니 한 번 더 도와주도록 하지.”
옥타비오는 품속에서 자그마한 병 하나를 꺼내 들었다.
알리시아의 눈동자만큼 짙은 보랏빛을 띠고 있는 액체가 병 속에서 찰랑였다.
“여기 담긴 건 다코타 독사의 독이다.”
“…….”
“왜, 막상 죽이려니 겁이 나? 걱정할 것 없어. 이 독은 잠자듯이 죽는 걸로 유명하니 큰 고통은 없을 거다.”
알리시아는 말없이 옥타비오를 올려다봤다.
옥타비오는 위협적으로 알리시아에게 몸을 굽혔다. 알리시아는 움찔하며 뒷걸음질 쳤다.
“널 백작 부인으로 만들어주겠다고 내가 약조했잖아. 방법을 친히 일러주는 것이니 잔말 말고 따라. 아니면 원래 있던 그 진창으로 돌아가고 싶은 건 아니겠지? 말만 해. 언제든지 그곳으로 돌려보낼 수 있으니.”
“내가 언제 싫다고 했어?”
알리시아는 옥타비오를 흘겨보며 그의 손에서 독이 든 병을 낚아챘다.
옥타비오는 비릿하게 웃으며 문 쪽으로 고갯짓을 했다.
병을 손에 꽉 쥔 알리시아는 레베카의 방문을 느릿하게 열었다.
* * *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물씬 풍겨오는 냄새에 알리시아는 잠시 소매로 코를 가렸다.
꽃향기가 항상 풍기던 방 안에선 이제 썩은 거름 냄새가 났다.
레베카는 규칙적으로 숨을 내쉬며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이따금 인상을 쓰는 것으로 보아 자면서도 병마와 싸우는 것 같았다.
‘레베카…….’
알리시아는 레베카 앞에 서서 그녀를 훑어봤다.
자신이 동경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모두가 꺼리는 괴물의 모습이 되어 있었다.
알리시아는 문득 이곳에 왔던 첫날을 떠올렸다.
제플린이 떠나고 망연자실해 있던 그녀에게 옥타비오가 접근했다.
그는 알리시아를 백작 부인으로 만들어 주겠다며 유혹했다. 그러면서 화려한 저택에서의 생활을 열변을 토하며 설명해주었다.
알리시아가 그의 제안을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그녀는 작은 시골 마을을 떠나고 싶어 안달 난 참이었다.
아름다운 그녀의 외모는 작은 우물에선 독이었다.
웬만한 사내들은 죄다 그녀를 품고 싶어 했다. 그중에는 질 나쁜 놈들도 섞여 있었다.
그러니 어딜 가든 이곳보다는 나았다.
알리시아는 제 어미처럼 살 생각이 추호도 없었기에 옥타비오를 따라 이렌시아로 향했다.
옥타비오의 계획은 성공적이었다.
알리시아를 몇 날 며칠을 굶긴 그는 그녀가 졸도하자 레베카가 자주 다니는 산책로에 던져놓았다.
레베카는 알리시아를 구했고, 알리시아는 손쉽게 레베카의 호감을 얻어냈다.
알리시아는 정신을 차렸던 날, 레베카를 처음 봤던 순간을 상기했다. 결코 잊을 수 없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