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
‘깨어났어요?’
아름다웠다.
매번 거울을 보며 자신의 미모에 우쭐하던 알리시아였지만 그녀는 레베카 앞에선 그저 예쁘장한 소녀에 불과했다.
대리석 같은 피부는 쿡 찔러도 흠조차 나지 않을 것처럼 매끄러웠고, 햇빛 한 폭을 베어다 만든 것처럼 진한 금발은 눈부셨다.
특히 그녀의 눈.
깊은 바다에 푹 몸을 담갔다가 색이 그대로 눈동자에 물든 것 같은 푸른 눈이 곱게 접힐 때면 어디론가 숨고 싶어졌다.
싱그러운 장미를 한입 베어 문 것 같은 붉은 레베카의 입술을 멍하니 보던 알리시아는 울음을 터뜨렸다.
평생 욕망해도 레베카가 소유한 걸 가질 수 없다는 걸 깨달아서였을까.
아니면 그녀의 상냥한 목소리를 제가 해하려고 한다는 부끄러움 때문이었을까.
레베카는 우는 알리시아를 껴안았다.
‘괜찮아요. 많은 일이 있었겠지만, 제가 구해줄게요. 아무 걱정 말아요.’
그녀는 품마저 따뜻했다.
‘알리시아! 오늘 들어온 디저트가 참 맛있더구나. 네게도 먹여주고 싶어 챙겨왔어.’
따스한 기억이 유리 조각처럼 가슴을 찔러댔다.
처음부터 자신에게 친절한 레베카가 싫었던 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영원히 그녀의 곁에 있고 싶은 심정이었다.
‘너도 저렇게 될 수 있어.’
하지만 옥타비오는 끈질겼다. 그는 끊임없이 알리시아에게 속삭였다.
결국 레베카를 향한 그녀의 애정은 동경이 되었고, 동경은 시기심으로 번졌다.
그리고 제플린이 자신을 은근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날이 많아지자 알리시아의 욕망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도 레베카가 될 수 있다.
그리고 그 마음은 지금까지 알리시아의 원동력이 되었다.
알리시아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독을 바른 단검을 치켜들었다.
“그러니 이제 그만 죽어주세요. 레베카 님.”
알리시아는 눈을 질끈 감고 단검을 내리 찍으려 했다.
그 순간 레베카가 눈을 번쩍 떴다.
레베카는 눈을 느리게 깜빡이며 알리시아를 바라봤다.
“감당할 수 있겠어?”
놀란 알리시아가 흠칫 몸을 떨며 단검을 놓쳤다.
레베카는 떨어지는 단검을 재빨리 붙잡았다.
“이런, 조심해야지. 여기엔 치명적인 독이 묻어 있잖니?”
“그, 그걸 어떻게…….”
“그거야 뻔하지. 그나저나 정말 날 죽이려고 했던 거야? 알리시아?”
레베카는 단검을 조심스레 침대 옆의 협탁 위에 올려두었다. 그리고 알리시아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얼굴 전체를 울긋불긋한 수포가 뒤덮고 있건만 그녀의 눈빛만큼은 예전처럼, 아니 예전보다 더 아름답게 반짝이고 있었다.
알리시아는 과연 아름답다는 말에 레베카를 다 담을 수 있을지 고민하며 하얗게 질렸다.
“알리시아, 왜 말이 없어. 정말 나를 죽이려고 했냐니까?”
알리시아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다가 말했다.
“맞아요. 당신을 죽이려고 했어요.”
“왜요? 이렇게 연약하고 가여운 제가 뭘 잘못했나요?”
레베카는 정말 모르겠다는 듯 손으로 입을 가리며 순진무구한 표정을 지었다.
알리시아는 그게 자신을 흉내 낸 것이란 걸 깨달았다.
“레베카…….”
알리시아는 부들거리며 주먹을 쥐었다.
그리고 표독스레 입을 열었다.
“그래! 당신은 아주 큰 잘못을 저질렀어. 내가 원하는 걸 다 가지고 있다는 잘못 말이야. 난 네가 가진 걸 하나도 남김없이 다 빼앗을 거야. 어떤 대가를 치른다 해도 나는 멈추지 않아.”
알리시아는 의기양양하게 레베카를 바라봤다.
레베카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이제야 솔직해졌구나.”
“뭐?”
“기다렸어. 네가 그 앙증맞은 송곳니를 드러낼 날을.”
레베카는 협탁 위에 놓인 단검의 자루를 매만졌다.
“그래, 누가 무슨 소리를 했기에 이런 끔찍한 결정을 내렸을지 들어나 볼까.”
“내게…… 화나지 않아? 널 배신했잖아. 은혜를 원수로 갚았잖아!”
레베카의 눈이 차갑게 내려앉았다.
“네가 네 잘못을 정확히 알고 있는 줄은 몰랐는데.”
“그냥 뺨이라도 쳐! 아니, 차라리 그 칼로 나를 죽여!”
알리시아가 칼을 향해 달려들었다.
레베카는 침대의 머리맡에 걸려 있던 지팡이를 들어 알리시아의 손등을 내리쳤다.
“어딜.”
“악! 이게 무슨 짓이야!”
“난 피를 보는 건 원치 않아서 말이야. 게다가 네가 벌써 죽으면 곤란하거든.”
“그게 무슨 말이지?”
“말 그대로야.”
레베카는 잠시 알리시아의 배로 시선을 보냈다.
아이가 생각났다. 하루에 수십 번도 넘게 떠오르는, 존재조차 하지 않는 자신의 아이가.
시선을 느낀 알리시아가 배를 두 손으로 감쌌다.
“네 얄팍한 자비는 필요 없어, 레베카.”
“이런, 자비를 베풀 생각은 없었는데. 내가 그리 착해 보였니?”
레베카는 서리꽃이 피어난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알리시아를 채근했다.
“그래서, 말해 보라니까? 왜 나를 죽이려 했는지. 무엇이 널 그렇게 초조하게 만들었는지.”
“백작이 날 백작 부인으로 만들 생각이 없다는 걸 깨달았거든.”
“어째서?”
“지나가다 들었어. 네게서 후사를 보겠대. 신병에 걸려도 아이는 가질 수 있지 않느냐면서. 벌써 그레이스가 준비하고 있더라. 어때, 이제 만족해? 좋아죽겠어?”
“하!”
레베카는 짧게 웃었다.
짧은 웃음은 곧 기나긴 웃음이 되었다. 그녀는 미친 사람처럼 고개를 젖히고 큰 소리로 웃었다.
알리시아가 겁에 질려 멀찌감치 떨어질 정도로 괴이한 모습이었다.
‘제플린, 네가 기어코…….’
레베카가 그려 봤던 미래 중 가장 최악의 것이 현실이 되었다.
인형 취급도 모자라, 제플린은 이제 저를 애 낳는 기계로 생각하기로 한 모양이다.
그 심약한 비위에도 자신과 몸을 맞대겠다는 결정을 한 걸 보니 참으로 대단한 용기를 내었다 싶었다.
사랑? 아니, 그는 한 번도 나를 사랑한 적이 없다.
레베카의 왼쪽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레베카는 동공이 반쯤 풀린 눈으로 알리시아를 바라봤다.
“알리시아. 가질래? 이 시궁창이 그렇게도 좋다면.”
알리시아는 잠시 움찔하다 입술을 앙다물며 말했다.
“당신은 시궁창이 뭔지 몰라.”
알리시아는 레베카가 평생 겪을 리 없을, 태어나서부터 자신이 겪었던 고통을 쭉 떠올렸다.
아름다운 외모 때문에 변태로 소문난 귀족에게 강제로 끌려가던 어머니의 뒷모습, 가난하고 힘없는 아버지, 결국 싸늘한 주검으로 돌아온 어머니…….
그녀처럼 살지 않겠노라 다짐했던 나날들.
그럼에도 어머니처럼 살 수밖에 없었던 현실.
알리시아는 울었다. 레베카의 눈물이 흐를 때마다 배는 더 크게 울었다.
알리시아는 레베카의 옷깃을 붙잡고 흔들었다.
“네가! 시궁창이 뭔지 어떻게 알아! 알지도 못하는 사내들의 손길을 거쳐 봤어? 절대로 행복한 가정을 꿈꿀 수 없는 심정을 네가 어떻게 알아! 레베카, 감히 네가 시궁창을 운운해?”
레베카는 눈물을 거두고는 제 멱살을 잡고 부르짖는 알리시아를 묵묵히 응시했다.
자신이 좋아했던 짙은 보라색 눈동자는 슬픔에 잠겨버렸다.
레베카는 벅차오르는 감정을 꾹꾹 누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도 내게 그랬으면 안 됐어.”
“가, 가까이 오지 마!”
레베카는 서서히 알리시아에게 다가가 그녀의 뺨을 감싸 쥐었다.
열기가 가시지 않은 레베카의 손은 뜨거웠다. 터진 수포에서 불쾌한 악취가 풍겼다.
텅 빈 레베카의 눈동자를 이제야 마주한 알리시아는 순간 그녀가 감당하고 있는 현실의 무게를 막연하게나마 느낄 수 있었다.
“널 좋아했어, 알리시아. 그래서 아팠지.”
“…….”
“아팠어. 너무도 많이. 그래서 널 용서할 수는 없어. 하지만…….”
“히끅.”
알리시아는 딸꾹질을 했다. 레베카의 뜨거운 기운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다.
레베카는 알리시아에게서 손을 떼고 서랍장의 문을 열었다. 그리고 찻잎이 든 병을 꺼내 들었다.
“잠시 같은 길을 동행할 수는 있겠지.”
그리고 알리시아의 손에 병을 단단히 쥐여 줬다.
레베카는 알리시아가 동경해 마지않던 미소를 지었다.
“네가 원하는 걸 줄게. 너도 내가 원하는 걸 줄래?”
* * *
방으로 돌아온 알리시아는 침대에 몸을 던져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한참 동안을 울었다.
“나쁜 년……. 레베카. 이 나쁜 년…….”
분했다. 제 속에 든 말을 그 여자 앞에 다 꺼낸 것도.
결국 죽이지 못하고 또 놀아난 것도.
‘널 좋아했어, 알리시아.’
레베카는 결국 그 말을 내뱉었다.
알리시아가 애써 닫아두었던, 그녀와의 기억을 봉인했던 문을 기어코 열어버렸다.
또다시 흐느끼던 알리시아는 곧 울음을 그쳤다.
그리고 방 안을 가득 채운 제가 가진 것들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사람이 서너 명은 누울 수 있는 푹신한 침대.
자신이 좋아하는 분홍 장미가 수놓아진 캐노피.
고풍스런 옷장 안에 빼곡히 차 있는 화려한 드레스들. 그 드레스에 맞춰 주문 제작한 구두와 보석들.
제플린의 것이 되면 누릴 수 있는 호사였다.
알리시아는 레베카가 건넨, 찻잎이 든 병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문득 배가 꿈틀거렸다. 배 속의 아이는 험난한 풍파에도 잘 자라고 있었다.
알리시아는 배를 가만가만 쓸며 말했다.
“아가야, 어쩔 수 없단다. 엄마는…… 포기하지 않아.”
* * *
다음 날, 데본셔 백작가는 발칵 뒤집혔다.
“불임이라니요!”
그레이스가 기함을 하며 의사에게 소리쳤다.
의사는 퍽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찻잎을 흔들었다.
“이 차 안에는 불임을 유발하는 성분이 들어 있습니다. 열 번만 마셔도 효과가 금방 나타날 정도로 독합니다. 하지만 마님께선 이걸 한 달이 넘도록 드셨다고 하더군요. 그렇다면 아무래도…….”
“아아…….”
의사의 말에 그레이스는 비틀거리며 벽을 짚었다.
레베카가 신병이라는 걸 알았을 때, 그녀는 차라리 레베카가 성녀가 되기를 바랐다.
그럼 열렬한 신도가 되어 그녀를 찾아가면 됐으니까.
그래서 제플린이 레베카의 임신을 도우라고 했을 때 그레이스는 기뻤다.
레베카가 이곳에 남아 있을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재기할 기회는 있었다.
그녀는 어떻게든 레베카를 고쳐 보려고 했다.
시간만 있다면 세상에 못 고칠 병이 어디 있겠는가. 자신의 딸 레일라처럼 그렇게 레베카를 보낼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제 그 마지막 희망마저 사라져버렸다.
레베카는 성녀를 포기했고, 제플린이 꿈꾸던 아이를 안겨줄 수 없는 몸이 되었다.
그녀가 사랑해 마지않던 인형은 이제 쓰레기처럼 버려질 운명이었다.
그레이스가 슬픔에 빠져 있는 사이, 옥타비오는 뒷짐을 진 채 퍽 흥미로운 얼굴로 이 상황을 잠자코 지켜봤다.
울음소리가 들릴 거라 예상은 했지만, 그 원인이 레베카의 죽음이 아니라 불임이란 사실은 계산에 없던 일이었다.
옥타비오는 알리시아를 슬쩍 바라봤다.
그의 시선을 느꼈는지 알리시아는 피식 웃음을 흘리고 그에게 속삭였다.
“이게 내 방식이야. 옥타비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