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망친 백작 부인이 돌아왔다-51화 (51/232)

51.

“네 방식이다?”

“난 네 꼭두각시가 아니야. 더 좋은 방법이 있는데 굳이 피를 볼 일은 없잖아? 나머지는 당신이 알아서 처리하겠지?”

말을 마친 알리시아의 싸늘하게 식어 있던 얼굴은 곧이어 세상에서 가장 가련하고 겁 많은 소녀로 변했다.

알리시아는 잔뜩 겁에 질린 표정으로 소리쳤다.

“맙소사! 이건 레베카 님이 향이 좋다고 엊그제 제게 주신 것이었어요.”

알리시아의 커다란 눈에서는 금방이라도 눈물방울이 흘러내릴 것 같았다.

오들오들 떠는 그녀의 어깨는 누구라도 안아주고 싶을 만큼 처연했다.

‘하!’

옥타비오는 헛웃음을 내뱉었다.

연기력을 논하는 상이 있다면 마땅히 알리시아가 대상을 받을 만큼 자연스러운 연기였다.

“설마, 부인께서도 드신 건 아니겠죠?”

그레이스가 경악에 찬 얼굴로 알리시아의 작은 어깨를 감싸 안았다.

알리시아는 근심 가득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다행스럽게도 마시지 않았어요. 혹시나 하고 의사에게 물어보길 잘했지요. 요새 전 먹는 것에 예민하거든요.”

“세상에나. 감사합니다, 신이시여.”

정말 다행이었다.

레베카가 불임인 게 밝혀진 이상 알리시아의 아이까지 잘못됐다간 제플린이 미쳐 날뛸 게 분명했으니.

“이거 큰일이군요. 한데 마님께서 왜 그런 차를 드셨을까요. 구하기 어렵다는 재료로 배합한 차를.”

옥타비오가 대체 무슨 꿍꿍이냐는 얼굴로 알리시아를 바라보며 말했다.

알리시아가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사실은 파비올라 님께서 주신 차라고 알고 있어요…….”

“뭐라고? 다시 말해봐.”

소란을 들었는지 제플린이 모여든 고용인들의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알리시아가 화들짝 놀라며 특유의 순진한 표정을 지었다.

“백작님…….”

“알리시아, 다시 말해봐. 레베카가 뭘 먹었다고?”

알리시아는 옥타비오를 슬쩍 보고는 마지 못하는 척 대답했다.

“불임을 유발하는 차를 계속 드셨다고 해요. 그리고 이건 어머님께서 레베카 님께 선물한 걸로 알고 있어요.”

알리시아가 파비올라의 필체가 고스란히 담긴 쪽지를 증거로 내밀었다.

제플린은 쪽지를 멍하니 응시하다 중얼거렸다.

“불임이라고……?”

제플린은 정신이 아득해졌다.

거짓말이었다. 거짓이어야만 했다.

레베카가 내 아이를 낳을 수 없다고?

그는 멀어져가는 의식을 겨우 붙잡고 소리쳤다.

“어머니를…… 그 여자를 당장 내 앞으로 데려와!”

알리시아의 입가에 미소가 살짝 걸렸다가 사라졌다.

옥타비오는 알리시아의 계획을 대충 눈치채고는 눈을 가늘게 떴다.

알리시아는 레베카를 저택에서 쫓아내는 동시에 파비올라까지 한데 엮어 없애버리려 하고 있었다.

그는 제가 주워 꿔다놓은 촌뜨기 소녀를 바라봤다. 그녀의 얼굴에선 어제의 겁먹었던 눈빛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마음에 썩 차진 않았지만 어찌 됐든 나쁘지 않은 작전이었다.

그는 빠르게 계산을 끝마쳤다.

공황에 빠진 제플린이 고함을 지르기 시작했다.

“레베카! 레베카! 안 돼! 이럴 수는 없어!”

“쉬이……. 백작님, 보는 눈이 많습니다.”

옥타비오는 울부짖는 제플린을 능숙하게 달랬다.

“옥타비오……. 그 여자를 데리고 와. 진실을 알아야겠어. 분명 잘못 안 걸 테지. 멍청한 그 여자가 하는 일이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네. 당신의 어머니를 데리고 오겠습니다. 그러니 그만 진정하시지요.”

제플린은 옥타비오의 품 안에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그의 등을 토닥이는 옥타비오의 손을 알리시아가 물끄러미 바라봤다.

허공에서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먼저 웃은 것은 옥타비오였다.

* * *

“물……. 물을 가져와.”

파비올라는 숙취로 지끈거리는 머리를 싸매고 소리쳤다.

간밤의 파티는 평소와 다를 것이 없었는데도 오늘따라 숙취가 심했다.

아무래도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몸이 예전 같지 않았다.

파비올라는 침대에서 비척이며 일어나 화장대 앞에 앉았다.

주름진 피부와 퀭한 눈 밑의 그늘이 그녀를 반겼다.

걷잡을 수 없이 흘러가는 세월에 파비올라는 울적해졌다.

한때 자신은 아름다운 백작 부인으로 칭송받았다.

하지만 지금은 돈을 뿌려야지만 아름답다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그것조차도 진심 어린 말은 아니었다.

이제 옛날 그녀가 가졌던 영광은 레베카, 그 아이에게로 옮겨갔다.

그녀가 가는 파티마다 레베카의 이름이 들려왔다.

그 아이는 사교계에 얼굴을 내밀지 않는 데도 어딜 가나 주목을 받았다.

아름다운 데본셔 백작 부인의 이름은 이제 파비올라 데본셔가 아니라 레베카 데본셔의 것임을 그녀는 인정해야만 했다.

그 사실이 매일 밤 그녀를 미치게 했다.

파비올라는 피곤에 찌든 물빛 눈동자를 들어 올렸다.

이제 자신에게 남은 건 제플린과 데본셔의 돈이었다.

그걸 놓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노후를 손주 보는 낙으로 살아가는 귀부인들이 있었지만 자신은 그런 부류가 아니었다.

그녀에게 있어 손주는 제플린의 관심과 재산을 가져갈 또 하나의 경쟁자였다.

그녀는 부디 레베카가 자신이 선물한 차를 알리시아와 나눠 마셨기를 바랐다.

지난밤 파티의 흔적을 지우려는지 아래층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파비올라는 한숨을 내쉬며 다시 한번 크게 소리쳤다.

“대체 뭐하는 거야! 물을 가져오라고 했잖아!”

“이런 시각까지도 침실에 계실 줄을 몰랐습니다. 아, 아니면 이게 일상이신가?”

분홍색 문틈 사이로 들어온 건 하녀가 아닌 날카로운 인상의 사내였다.

그를 알아본 파비올라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옥타비오!”

그의 등 뒤로 문이 닫혔다.

옥타비오는 빙글거리는 얼굴로 파비올라를 훑어내렸다.

노골적인 희롱이 섞인 눈빛에 파비올라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녀가 여기서 소리를 내질러 봤자 아무 소용이 없었다.

이곳에 있는 것 중에 온전한 그녀의 것은 아무것도 없었으므로.

파비올라는 서둘러 가운을 걸치고 옷을 여몄다.

그 모습을 즐겁게 바라보던 옥타비오가 말했다.

“우리 사이에 그럴 필요는 없지 않나.”

“우린 아무 사이도 아닐세.”

“이거 서운하게 구네.”

능글맞은 그의 얼굴에 파비올라는 그를 잔뜩 노려보다 화장대 앞에 앉아 그를 등졌다.

저 작자의 얼굴을 조금이라도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또각또각, 옥타비오의 정갈한 구둣발 소리가 그녀에게 점점 다가왔다.

“들킨 거지?”

그녀의 말에 발소리가 잠시 멈췄다.

파비올라는 엉망으로 엉켜 있는 머리를 빗어 내렸다.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마냥.

옥타비오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우리 아가씨께서 그새 눈치가 빨라지셨네요. 그런데 그걸 알면서 왜 그런 무모한 짓을 벌이셨을까.”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했잖아!”

파비올라는 어느새 지척까지 다가온 옥타비오를 내리칠 기세로 브러시 빗을 치켜들었다.

옥타비오가 그녀의 손을 잡아챘다.

“그런 걸로 때리기라도 하시게? 당신 아버지처럼? 가난한 소작농의 자식은 이런 걸로 맞아야 정신을 차린다고 어디 한번 소리쳐 보시지요.”

“너…….”

파비올라의 손에서 빗이 힘없이 떨어졌다.

옥타비오는 바들바들 떨리는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잡아 쥐었다.

“여전히 부드럽군요. 처음 당신의 손을 잡았을 때와 같아.”

“이거 놔.”

“그러게 처음부터 나와 같이 도망쳤으면 이런 수모까지 당할 일은 없었잖아.”

“내 의지대로 결혼한 게 아니란 거 너도 알잖아. 이제 이런 이야기는 지긋지긋하지도 않아?”

“아니. 세상에서 가장 재밌는데. 내가 옛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당신 얼굴이 구겨지는 게 참 볼만하거든.”

“닥쳐. 대체 뭐가 더 필요해서 이렇게까지 나를 달달 볶는 거야? 차라리 날 죽여! 그래, 그 차의 효능이 발견됐다고 했지? 그대로 나를 내 아들에게 넘기면 되겠네. 제플린이 네 대신 날 죽여줄 테지. 그 아이가 제 아비를 제 손으로 죽였을 때처럼!”

악에 받친 목소리가 옥타비오의 귓전을 때렸다.

그녀의 눈은 슬픈 것 같기도 하고 화가 난 것 같기도 했다.

옥타비오의 미간이 잠시 모아졌다. 하지만 이내 그는 평소처럼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그는 파비올라의 얼굴을 한 손으로 쓸어내리며 말했다.

“그럴 수 없지. 난 아직도 당신을 사랑하거든.”

“하! 사랑? 웃기지 마. 너와 가장 어울리지 않는 단어가 바로 그거야. 사랑이라니. 넌 날 사랑한 적 없어.”

“파비올라. 아, 나의 사랑스러운 파비. 사랑에는 여러 가지 형태가 있지. 내가 당신에게 했던 그 모든 건 사랑이었어. 복수도 사랑의 형태란 걸 당신은 알까?”

옥타비오는 파비올라의 손을 들어 입을 맞췄다.

그녀는 벌레가 제 손등을 기어가는 걸 바라보는 것처럼 혐오를 가득 담은 눈으로 그의 행동거지를 쳐다봤다.

“개소리.”

“입이 많이 험해지셨군요. 백작 부인님. 제플린의 곁에서 당신을 떼어내길 잘한 것 같군. 애 버릇이 나빠지지 않게.”

“하. 여러 번 말했지만, 그 아인 당신 아들이 아니야. 아버지처럼 구는 거 이제 그만하는 게 어때?”

“글쎄. 그거야 신만이 아시겠지. 당신도 확신하지 못하잖아.”

“닥쳐! 닥치라고! 누가 뭐래도 내 아들은 데본셔의 핏줄이야! 위대한 데본셔 백작의 후손이라고!”

파비올라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옥타비오에게 달려들었다. 곱게 기른 손톱이 날카롭게 그의 뺨을 스쳤다.

옥타비오는 뺨에서 핏물이 배어나는 데도 오히려 더 즐거운 표정을 지었다.

“그래! 당신은 내 앞에서만 그런 얼굴을 보이지. 역시 난 날것 그대로의 당신이 좋아.”

희열에 찬 옥타비오의 얼굴에 파비올라는 전의를 잊고 팔을 떨어트렸다.

그리고 눈물이 고인 눈을 들어 그를 노려봤다.

“넌 미쳤어.”

“날 이렇게 만든 건 당신이야. 나의 파비올라.”

옥타비오는 손을 들어 파비올라의 눈물을 닦아냈다. 그리고 가볍게 그녀의 볼에 입맞춤했다.

파비올라의 손이 잘게 떨려왔다.

“그나저나 우리 이럴 시간 없어. 당신의 아드님이 지금 제정신이 아니라서 말이지.”

“…….”

“계획은 세우고 일을 벌인 건가?”

“아니. 내가 앞날을 보지 않고 사는 거 당신도 잘 알잖아.”

옥타비오는 슬쩍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는 파비올라를 화장대 앞에 앉히고 빗을 들었다. 그리고 그녀의 머리카락을 마저 빗기 시작했다.

한껏 엉켜 있던 파비올라의 머리칼이 옥타비오의 손에서 비단결처럼 부드럽게 변했다.

“그럼 내 말만 들어. 내가 다 알아서 할게. 모든 게 잘 될 거야. 그럴 거야, 파비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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