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망친 백작 부인이 돌아왔다-52화 (52/232)

52.

밖에서 분주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알리시아가 일을 잘해준 모양이다.

레베카는 저택을 울리던 제플린의 통곡 소리를 떠올렸다. 제가 죽은 것도 아닌데 참 웃긴 일이었다.

지금 상황도 그랬다. 그녀가 불임이라는 엄청난 소식에도 누구 하나 레베카에게 제대로 된 설명을 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지나가는 하녀를 붙들고 물어봐도 그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나중에 다 아실 거라는 둥 모호한 답변만 남겼다.

‘이건 좀 외롭네.’

오늘따라 칸나가 보고 싶었다.

대충 듣자하니 칸나는 그레이스의 신뢰를 잔뜩 받은 모양이다.

덕분에 손이 부르트도록 빨래를 하는 일 없이 빨래방 하녀들을 감시하는 역할을 맡았다고 했다.

‘불행 중 다행이지.’

레베카가 저택 밖에서 일어나는 일을 열심히 상상해 보고 있을 때,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세심한 노크 소리의 주인을 레베카는 금방 알아차리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칸나!”

“레베카 님!”

칸나는 제가 들고 온 빨래 더미가 바닥에 쏟아지는 것도 모르고 레베카에게 달려갔다.

그녀를 놓지 않으려는 듯 칸나는 레베카를 거세게 껴안았다.

레베카가 즐거운 비명을 지르며 말했다.

“세상에. 숨 막혀, 칸나.”

“아! 죄송합니다.”

칸나는 화들짝 놀라며 레베카에게서 떨어졌다. 칸나의 얼굴은 기분 좋게 상기되어 있었다.

레베카는 칸나의 손을 잡고 부드럽게 물었다.

“여긴 어떻게 온 거야?”

“지금 저택에 난리가 난 탓에 저를 눈여겨보는 이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알리시아가 이곳에 들여 보내줬어요.”

“알리시아가?”

레베카는 의외라는 듯 눈을 둥그렇게 떴다.

일종의 보답이라는 건가. 꽤 귀여운 짓을 했네.

“당신이 어떻게!”

그 순간, 문밖으로 커다란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레베카는 문 쪽으로 시선을 두다가 이내 고개를 돌렸다.

파비올라가 저택에 온 모양이었다.

제플린의 비명과도 같은 외침과 파비올라의 흐느끼는 목소리로 모든 상황이 이해가 갔다.

레베카는 칸나에게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잘 되었지?”

칸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잠시 말이 없었다.

아무런 대화도 오고 가지 않았지만, 레베카는 칸나가 지금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거란 예감이 들었다.

곧 탈출할 수 있다는 희망과 현재 상황에 대한 역겨움.

레베카는 울분을 표출하는 대신 그 위를 잔잔한 미소로 덮기로 결정했다.

칸나는 위태롭게 웃는 레베카를 빤히 바라봤다. 그리고 제 손에 들어온 그녀의 손이 사라져 버릴까 봐 더욱더 세게 그러쥐었다.

손의 악력을 느낀 레베카가 말했다.

“칸나, 그만해. 내 손 닳겠어. 그리고 애써 세탁한 빨래가 더러워지겠다.”

“더러운 건 다시 씻으면 그만입니다. 레베카 님.”

어디서 많이 들어 본 말이었다.

레베카는 피식 웃으면서 칸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잘 버텨주어서 고맙구나. 이제 정말 얼마 남지 않았어.”

“끝까지 따르겠습니다.”

“아, 그렇지. 마가렛에게서 연락이 왔니?”

레베카의 물음에 칸나가 활짝 웃었다.

그러자 칸나의 콧잔등의 점이 찡긋하고 올라갔다.

이 상황에서 조금이라도 즐거울 만한 대답을 할 수 있어 퍽 기쁜 모양이었다.

“마가렛이 함께하겠다 했습니다. 리베르타 사람들의 교육도 마가렛이 맡아서 순조로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거 정말 기쁜 소식이구나.”

살롱 사업은 레베카가 믿을 만한 직원들이 필요했다.

그런 의미에서 구휼원의 사람들이 제격이었다.

레베카는 율리안에게 살롱 건물과 함께 직원들의 숙소도 함께 지어 달라고 부탁했다.

완공되자마자 모두 그쪽으로 이주시킬 계획이었다.

한 가지 걸리는 점이 있다면 구휼원 사람들의 행동거지였다.

귀족을 대상으로 하는 사업인 만큼 직원들도 귀족 사회의 예절을 몸에 익힐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은밀히 예절 선생을 고용하려 했는데 마가렛이 자청해서 그 역할을 맡았다니.

마가렛이 칼을 빼든 이상 일이 순조롭게 풀릴 것이 분명했기에 레베카는 안도했다.

“마님, 침대보를 갈아드리겠습니다.”

얼마 대화를 나누지도 못했는데 하녀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칸나는 원망스러운 듯 문을 노려봤다.

레베카는 그런 그녀의 손을 도닥거렸다.

“칸나, 이만 가봐. 누가 널 힘들게 하면 말하고.”

“일이 고단하진 않습니다. 감시하는 일이 어렵지는 않아서요.”

“넌 정말 어디서든 두각을 드러내는구나. 기특해.”

레베카의 감탄 어린 칭찬에 칸나가 수줍게 고개를 숙였다.

칸나는 이제 어느 정도 만족했는지 흩어진 빨래 더미를 주섬주섬 주워다 제자리에 가져다 놓았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다시 뵐 때까지 건강하세요.”

“그래. 다시 만나게 된다면 그 이후로 우리가 헤어질 일은 없을 거야.”

레베카는 수포의 통증을 참느라 잠시 미간을 찌푸렸지만 그녀의 입술만큼은 진실된 미소를 품고 있었다.

칸나는 레베카와 영원할 그날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벅찬 듯 잠시 말을 잃었다.

이윽고 그녀는 상기된 얼굴로 방을 나섰다.

* * *

“잠시 산책을 하고 싶구나.”

묵묵히 방을 정리하고 있는 하녀에게 레베카가 대뜸 말을 걸었다.

“아직 몸이 성하지 않으신데…….”

“오늘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나도 대강은 알고 있어. 그러니 산책이라도 해서 마음을 달래야겠는데, 이해하겠니?”

레베카의 담담한 얼굴에 하녀는 잠시 주춤했다.

기계처럼 행동하고 있었지만 그녀도 엄연히 감정이 있는 사람이었다.

하녀는 생각에 빠졌다.

멋대로 행동하게 두지 말라는 명령이 있었지만 저 몰골로 레베카가 도망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리고 퍽 가엾지 않은가.

칭송받는 백작 부인에서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잃었다.

그게 자신이었다면 진작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리라고 하녀들은 서로 속삭이곤 했다.

그녀의 감상 또한 다르지 않았다.

창문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유일한 낙인 듯 손을 뻗는 레베카를 보니 가슴 한켠이 찌르르 울렸다.

하녀는 옷장을 열어 숄을 꺼내왔다. 그리고 레베카의 어깨에 둘러주었다.

밥을 제대로 삼키지 못하는 탓에 원래도 말랐던 어깨가 더욱 앙상해져 있었다.

레베카는 따뜻하게 감기는 숄의 보드라운 감촉을 느끼며 웃었다.

“착한 아이구나.”

하녀의 눈이 잠시 흔들리더니 이내 침잠했다.

그녀는 레베카를 정원으로 이끌었다.

“어디로 가고 싶으십니까?”

“라일락 정원으로.”

날이 더워진 탓에 라일락은 이미 져버리고 그 자리엔 푸른 잎만이 무성히 자리 잡고 있었다.

제플린이 신경 쓰지 않는 정원이었기에 라일락 이외의 꽃은 이곳에 없었다.

보기 싫지 않게 다듬어 놓는 것만이 정원 관리의 전부였다.

하녀는 멀찌감치 떨어져서 레베카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그녀의 사색을 방해하지 않겠다는 의미인 것 같았다.

하녀의 배려에 레베카는 문득 그녀를 저택의 부속품 중 하나라고 여겼던 생각이 떠올라 조금 부끄러워졌다.

다행히 오늘 밤은 바람이 찼다. 찬바람이 그녀의 부끄러움을 조금 씻어 내렸다.

레베카가 숄을 벗자 그녀의 쇄골이 훤히 드러났다. 레베카는 화끈거리는 수포를 바람에 식혔다.

얼마나 걸었을까.

레베카의 눈앞에 뜻밖의 손님이 나타났다. 그도 밤 산책을 나온 듯했다.

레베카의 입가에 미소가 은은하게 번졌다.

“레오.”

검은 고양이가 유유히 그녀에게 걸어오고 있었다.

제플린은 동물이라면 모조리 싫어했다. 그가 유일하게 좋아하는 동물은 말뿐이었다.

그러니 이 삼엄한 경비를 뚫고 자유자재로 들어올 수 있는 고양이는 레오밖에 없을 것이었다.

레베카가 대리석 벤치에 앉자 레오가 기다렸다는 듯 폴짝 그녀의 무릎 위로 뛰어올랐다.

레베카는 레오를 쓰다듬으면서 그의 목에 걸린 함에서 서신을 빼냈다.

<힘내기를.>

서신에 무슨 말이 적혀 있을지 살짝 긴장하고 있던 레베카는 실소했다.

그리고 이내 이 몇 안 되는 글자를 적기 위해 끙끙대고 있었을 율리안을 상상하고 조금 크게 웃었다.

그러고 보니 그는 언제나 자신을 웃게 만들었다.

“네 반려가 이걸 쓰기 위해 얼마만큼의 종이를 버렸을까.”

레오는 잠시 일어나더니 레베카의 허벅지를 열 번가량 꾹꾹 눌렀다.

“열 번……?”

냐옹.

레오가 긍정의 의미로 크게 울었다. 그리고 다시 레베카의 손에 제 머리를 비벼댔다.

“넌 내 몸에서 나는 냄새가 싫지도 않은가 보구나.”

한참을 레오를 쓰다듬던 레베카의 손길이 멈추었다.

“율리안은……. 율리안은 지금의 내 얼굴을 보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레오가 갸르릉거렸다.

“분명 착한 사람이니까 대놓고 싫다고는 하지 않을 거야. 그래도 저도 남자니 흉측한 여인의 얼굴은 싫겠지. 그럴 거야.”

레베카는 질색하던 제플린의 표정을 떠올렸다.

율리안도 그런 엇비슷한 얼굴을 할 거라 생각하니 조금 슬퍼졌다.

“가끔 그 얼굴을 떠올리곤 나를 멀리할지도 모르지. 그가 아무렇지도 않았으면 하는 건 내 지나친 욕심일까.”

말을 마친 레베카가 다시금 레오를 쓰다듬으려고 손을 뻗자, 레오가 그녀의 손을 피했다.

“레오?”

그의 샛노란 눈동자는 대답 없이 레베카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쩐지 그녀를 질책하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정확한 의미를 헤아릴 수 없어 레베카는 멍해졌다.

“레베카?”

일순간 들려오는 목소리에 레오의 눈동자가 가늘게 좁혀졌다.

레오는 하악질을 하며 레베카에게 다가오는 제플린을 향해 이를 드러냈다.

레오는 영혼의 남은 한 조각까지 훑어보는 눈으로 그를 쳐다봤다.

고양이의 매서운 눈매를 마주한 제플린은 순간 누군가가 생각이 나 돌연 불쾌해졌다.

“감히 이곳에 들어온 고양이가 있을 줄이야. 당장 경비를 시켜서…….”

“길을 잃었나 봐요. 제가 담장 밖으로 내보낼 테니 신경 쓰지 말아요.”

레베카는 그가 레오에게 해코지라도 할까 봐 서둘러 레오를 내몰았다.

레오는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가 이내 풀숲 사이로 사라졌다.

고양이가 시야에서 사라진 걸 확인한 제플린은 그제야 인상을 풀고 말했다.

“레베카. 몸도 안 좋으면서 이 밤에 여긴 왜 나와 있어.”

“거동이 불편하지는 않아서 괜찮아요.”

“에취!”

제플린은 간질거리는 코를 손수건으로 감싸 쥐었다.

요즘따라 왜 이렇게 재채기가 자주 나는지 모를 일이다.

레베카는 그의 고급진 손수건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이곳을 지독히도 싫어하면서 웬일로 여기를 찾아주셨나요.”

레베카의 눈이 곱게 접혔다.

제플린은 문득 그녀의 얼굴이 본래의 빛을 찾은 것처럼 느껴져 눈을 잠시 비볐다.

하지만 잠시간의 환영일 뿐이었다.

눈앞의 레베카는 다시 고름이 맺힌 수포가 피어난 몰골로 돌아와 있었다.

제플린은 차갑게 내려앉은 얼굴로 길게 한숨을 내쉬고 레베카의 옆에 앉았다.

“라일락이 다 졌다기에 그 꼴을 보려고 온 것뿐이야.”

“아아…….”

잠시간 침묵이 흘렀다.

청량한 초여름의 밤공기가 둘 사이에 흐르는 악취를 잠시나마 가려주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