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
제플린은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고즈넉한 밤은 평소에 차마 하지 못한 말을 내뱉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내가 왜 여길 싫어하는지 알아?”
“글쎄요.”
“여긴 아버지에게 처음으로 맞은 곳이지. 그날은 유난히도 라일락 향기가 지독했어. 그때 내 나이가 고작…….”
“궁금하지 않아요.”
제플린이 고해성사하듯 고통에 찬 과거를 겨우 끄집어내려고 했다.
하지만 레베카는 축객령을 내리듯 그의 말을 잘라냈다.
날 선 미소가 그녀의 입가에 고였다.
“제플린, 당신의 이야기 따위 전혀 알고 싶지 않아요. 당신이 불임이 된 내 심정을 궁금해하지 않는 것처럼.”
고저 없이 나긋한 목소리였다.
순간 제플린은 레베카가 자신을 질타하는가 싶었다.
하지만 그녀의 눈에는 어떠한 증오도 원망도 보이지 않았다.
영혼을 파먹힌 사람처럼 레베카의 눈빛은 텅 비어 있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이 낯설었다.
그는 레베카가 언제나 그런 얼굴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멍하니 레베카의 공허한 눈동자를 바라봤다.
“알고…… 있었나.”
“모를 리가 없겠죠. 파비올라, 당신의 어머니가 저택이 떠나가라 소리를 질렀는데.”
제플린은 낮의 일이 떠올라 질끈 감은 눈을 손으로 꾹꾹 눌렀다.
그 여자, 이제 어머니라고 부르기도 역겨워진 그 여자는 순순히 제 죄를 인정했다.
‘네가…… 네가 나를 봐주지 않으니까. 아이가 태어나면 네가 나를 어떻게 할지 뻔하지 않겠니?’
뻔뻔하게도 그 여자는 끝까지 모든 걸 제 탓으로 몰아갔다.
한때는 동정심을 가졌던 적도 있었다. 그녀가 아버지와 결혼한 건 그녀의 의지가 아니었으니까.
제플린은 파비올라가 연인과 야반도주를 시도했지만 실패하고 아버지에게 팔려오다시피 결혼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달랐다. 파비올라도 아버지와 별반 다를 바 없는 사람이었다.
내가 사랑하는 것을 앗아가려는 무뢰배 같은, 기꺼이 제거해야 할 대상.
제플린은 형형한 눈빛을 담은 채로 눈을 떴다.
그는 파비올라를 데본셔 백작가에서 영원히 내쫓았다. 그녀에게 주었던 저택과 휘황찬란한 사치품도 모조리 회수했다.
그 여자가 어디서 떠돌다가 비명횡사하든지 그가 알 바 아니었다.
제플린은 레베카를 흘깃 쳐다봤다.
레베카는 둘 사이에 흐르는 공기만큼이나 초연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심약한 그녀가 이 사실을 알면 무너져 내릴 줄 알았다. 그래서 말하지 않았다.
저런 몰골로 그의 앞에서 울부짖기라도 하면 도저히 견딜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은 차라리 그녀가 자신에게 화를 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인형 같은 사람을 원했지, 사람 같은 인형을 원한 게 아니었다.
제플린은 얼굴을 쓸어내리고 그녀에게 물었다.
“왜…… 아무렇지도 않지?”
“무엇이 말인가요.”
“당신과 나 사이의 꿈이 부서져 버렸어. 그런데 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느냐 말이야.”
레베카는 하마터면 조소를 머금을 뻔했다.
너와 나의 꿈이라니.
당신과 나는 한 번도 같은 곳을 바라본 적이 없었다. 우리라는 말로 엮인 적조차 없었다.
레베카는 찬찬히 얼굴을 돌렸다.
“화내고 울면 뭐가 달라지나요?”
“뭐?”
“시간을 되돌리지 않는 한 내게 일어난 일은 사라지지 않아요. 아, 시간을 돌리더라도 똑같으려나…….”
“레베카!”
그녀가 곧 사라져 버릴 것 같은 표정을 지었기에 제플린은 잔상을 붙잡듯 레베카의 어깨를 두 손으로 잡았다.
하지만 얇은 옷감을 뚫고 올라오는 수포의 열기가 손바닥에 느껴져 제플린은 화들짝 두 손을 떼었다.
“아.”
제플린은 당황한 얼굴로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녀를 만지기 싫어한다는 걸 면전에서 보여주었다는 사실이 당혹스러웠다.
그리고 동시에 그녀의 몰골을 향한 혐오감이 떠올라 그는 당최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라 난감했다.
제플린의 이마에 흐르는 한 줄기의 식은땀을 본 레베카가 빙그레 웃었다.
“그만 인정하세요. 당신이 사랑했던 나는 이제 없다는 걸.”
레베카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의 발 앞에 무릎을 꿇고 애원했다.
“그러니 나를 버려주세요.”
“레베카, 그게 무슨 말……. 내가 당신을 어떻게 버려!”
“아니요. 당신은 할 수 있어요. 제플린. 사랑하니까, 당신을 사랑하니까 기쁘게 떠나줄게요.”
여전히 초점 없는 눈빛으로 레베카는 읊조렸다.
사랑을 속삭이는 그녀의 목소리는 기계에 녹음된 소리가 흘러나오는 것처럼 무의미하게 울렸다.
“내 사랑. 당신을 지키기 위해 나를 당신에게서 앗아가야겠어요. 이만 나를 폐기해 주세요.”
제플린 데본셔를 사랑했던 레베카 데본셔는 이전 생의 마지막 날처럼 맹렬히 타오르고 있었다.
망연히 자신을 바라보는 제플린의 푸른 눈동자 안에서 레베카는 재가 되어 사라지길 바랐다.
지옥 속에서 깨어난 제플린은 기다란 속눈썹을 깜빡였다.
그의 눈 밑에 드리운 그림자가 깊었다. 정원에서 돌아온 후 그만 까무룩 잠든 모양이었다.
“깨어나셨습니까.”
옥타비오가 빙그레 웃으며 그를 맞았다.
제플린은 아직 잠에 취한 몽롱한 눈을 깜빡이며 더듬더듬 말했다.
“끔찍한 꿈을 꾸었다. 레베카가 불임이라더군. 그럴 리가 없지 않는가. 내 완벽한 부인이 그럴 리가 없어.”
“유감스럽게도…….”
옥타비오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제플린의 귀에 새길 기세로 또박또박 말했다.
“꿈이 아닙니다. 이제 레베카 님을 통해 후사를 보실 수 없습니다.”
“거짓이다!”
제플린은 눈을 질끈 감았다.
꿈이어야 했다. 꿈이어야만 했다.
‘나를 버려주세요.’
레베카가 속삭이던 그 목소리도 전부 꿈이다.
내일 아침 해가 뜨면 레베카는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아름다운 미소로 그를 반겨줄 것이다.
그래야만 하는데…….
제플린이 흐느끼듯 말했다.
“난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그녀가 없는 삶을 상상한 적조차 없다. 옥타비오, 자네는 언제나 현명한 조언을 해주었으니 이번에도 방법을 알고 있겠지?”
옥타비오의 입술에 간교한 미소가 스며들었다.
그는 자신이 제플린의 어두컴컴한 인생에 비춰든 단 한줄기의 빛이길 바랐다.
레베카를 만난 뒤로 제플린은 양지바른 곳에 누워 있는 소년같이 웃곤 했다.
옥타비오는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영원히 존재할 것 같던 태양이 지고 있었다.
바야흐로 밤의 시대가 찾아올 것이다.
옥타비오는 램프의 줄을 잡아당겼다.
전구가 몇 번 점멸하더니 이윽고 환하게 켜졌다. 빛이 갓등을 거쳐 은은한 다홍빛을 뿜어냈다.
제플린은 갑작스레 찾아온 빛에 괴로운 듯 눈살을 찌푸렸다.
“백작님은 평소대로 하시면 됩니다. 제가 가르쳐드린 것처럼요.”
“레베카를 버리란 말인가.”
“원래 사람이든 사물이든 그 쓰임을 다 하면 없애는 게 순리지요. 눈에 거슬리면 치워버리면 그만입니다. 새로운 것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제플린은 팔뚝으로 눈을 가렸다.
그는 망설임이 진득하게 묻어 있는 어투로 말했다.
“하지만, 난 레베카를 사랑하는걸. 사랑을 무엇으로 대체한단 말이야.”
옥타비오는 비웃음을 삼키며 차분하게 대답했다.
“당신은 레베카의 어떤 점을 사랑했습니까.”
그의 질문에 제플린은 기억을 되새겼다.
어느새 아득해져 버린 빛바랜 기억이지만 그가 미소를 짓기엔 충분했다.
“햇빛에 부서지는 머리칼, 내 이름을 부르는 어여쁜 목소리, 나를 닮은 완벽한 코와 입술, 그리고 넋을 잃고 바라볼 수밖에 없는 그 눈동자…….”
“감동적이군요. 헌데 그건 지금 다 어디로 갔습니까.”
“…….”
“백작님은 레베카를 사랑하는 게 아닙니다. 사랑했던 거죠. 과거가 되어 버린 사랑 또한 제 쓸모를 다 했으니 마땅히 버려야만 합니다. 그래야 앞으로 나아가실 수 있습니다.”
“내 미래는 항상 레베카였어. 어디로 나아가란 말이야.”
“아닐 텐데요. 레베카가 아니라 당신만의 아름다운 왕국이 꿈이 아니었습니까? 제 부족한 소견으로 말씀드리자면 레베카보다 아름다운 여자는 분명히 존재합니다. 시간이 좀 걸릴 테지만 제가 구해드리지요.”
제플린은 잠시 말이 없었다.
옥타비오는 그를 재촉하지 않았다. 조용히 입가에 교활한 미소를 머금고 그가 삼키기 알맞은 형태를 갖출 때까지 기다렸다.
“그래도 당장은…… 필요 없을 것 같군.”
“그렇지요. 지금은 하실 일이 많지 않습니까. 그리고 곧 태어나실 아기님도 있고요.”
“내 아기…….”
“혹시 모를 일입니다. 알리시아가 당신을 빼닮은 딸을 낳을지.”
“레베카가 낳은 아기가 아닌데도?”
“잠시 빌린 태의 출신이 무슨 소용입니까. 백작님의 피가 흐른다는 게 중요하지요. 상상해 보십시오. 당신과 똑같은 아름다운 생명체가 이 세상에 하나 더 존재한다는 사실을.”
어느덧 제플린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꼭 레베카의 아이가 아니더라도 자신을 닮은 2세의 손을 잡고 제 왕국을 거니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그의 미소를 보고 옥타비오는 한쪽 무릎을 굽혔다.
그는 이불을 목까지 끌어 올려주고 제플린의 귀를 두 손으로 막았다.
어릴 적부터 천둥을 무서워하는 제플린이 겁에 질릴 때마다 옥타비오가 했던 행동이었다.
어린아이 취급에도 이상하게 화가 나지 않았다.
제플린은 멍하니 옥타비오를 올려다봤다.
옥타비오는 유난히 뾰족한 송곳니 하나를 드러내며 웃었다.
“마음을 단단히 여미십시오. 누구도 그 문을 열 수 없도록. 원한다면 가지면 되고, 필요 없다면 버리면 됩니다. 만약 가질 수 없다면 부숴버리십시오. 감히 누구도 그걸 소유할 수 없게.”
“필요 없다면 버리면 돼…….”
제플린은 이불 안으로 파고들었다.
겹겹이 둘러싸인 화려한 이불 속으로 숨은 그는 먹음직스러운 메인 디시처럼 보였다.
옥타비오는 제 입술을 핥으며 향초에 불을 붙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은은한 향이 방 안을 자욱하게 메웠다.
곧이어 색색거리는 제플린의 숨소리가 들려왔다.
옥타비오는 향초가 다 타들어 갈 때까지 그를 감싼 이불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걸 지켜봤다.
언제 보아도 질리지 않는 광경이었다.
* * *
해가 비춰들어 제플린은 눈을 떴다. 간만의 늦잠이었다.
그는 잠시 멍한 얼굴로 침대 끄트머리에 걸터앉았다.
현실감각이 무뎌진 기분이라 손을 여러 번 쥐었다 폈다 했다.
이윽고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습관적으로 거울 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제 꼴을 보고 기함했다.
눈부신 외모는 여전했지만, 그의 눈엔 제가 손에 쥔 아름다움보다 잃은 것이 더 잘 보였다.
뾰루지 하나가 턱밑에 불쑥 솟아올라 있었다.
제플린은 덜컥 겁이 났다.
레베카의 병이 전염병이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이 앞섰다.
단순한 뾰루지일 뿐이었지만 그는 사춘기 때에도 잡티가 난 적이 거의 없었기에 이건 재앙이나 다름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