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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친 백작 부인이 돌아왔다-54화 (54/232)

54.

‘필요 없는 건 버리십시오.’

옥타비오의 말이 주문처럼 머릿속을 휘저었다.

레베카를 잃어버릴까 제 손에 꽉 쥐고 있던 지난날이 무색하게도, 그를 움직이게 한 건 작은 뾰루지 하나였다.

그래, 레베카도 자신을 버려 달라고 어제 청하지 않았는가.

제플린이 비장하게 하인을 불렀다.

그가 기침 소리만 내어도 문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세 명의 하인이 득달같이 달려왔다.

그는 하인들에게 옷장을 열라 명했다.

제플린은 길게 늘어선 옷장 안을 세심하게 훑었다.

오늘 같은 날 입을 만한 마땅한 옷이 없어 혀를 찼다.

하인들이 분주하게 옷을 꺼내 들어 제플린에게 보였다.

연신 고개를 내젓던 제플린의 눈에 벽 한 면에 걸려 있는 턱시도가 들어왔다.

레베카에게 청혼했던 날 입었던 옷이었다.

상징적인 의미가 있어 그날 한 번 입은 뒤 전시하듯 고이 모셔둔 옷이었다.

제플린은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처음과 끝을 장식할 완벽한 의상이었다.

* * *

“오늘도 나를 찾아왔구나.”

“그래, 나를 걱정했다고? 참 사려 깊기도 하지.”

“……라고 전해주렴.”

유려한 황금색 문고리를 잡아 돌리려던 제플린은 부드러운 레베카의 목소리에 멈칫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여전했다. 여전히 달콤하고 우아하고 사랑스러웠다.

그녀를 저버리기로 단호히 결심했건만, 추억의 찌꺼기가 그의 발을 끈질기게 붙잡았다.

제플린은 애써 그것을 짓밟아버리고 방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제플린?”

레베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봤다.

제플린은 레베카에게 다가가려다 눈을 찌푸렸다.

부쩍 더워진 날씨에 그녀에게서 나는 악취가 더욱 심해진 것도 이유였지만, 그녀의 품 안에 안겨 있는 검은 고양이를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또 고양이야? 좀 더 철저히 방역을 하라고 명해야겠군.”

레베카는 서둘러 레오를 창밖으로 내보냈다.

그리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옷매무새를 살피고 몸을 꼿꼿하게 세웠다.

“고작 고양이 한 마리에 그렇게 날 세울 건 없잖아요.”

둘 사이에 잠시간 침묵이 흘렀다.

콧잔등이 간지러워 제플린은 코를 손수건으로 막았다.

그는 손수건에서 묻어나는 향수 냄새를 한껏 들이마신 뒤 손수건을 주머니에 다시 챙겨 넣었다.

레베카는 그런 그의 행동 하나하나를 뜯어보며 싱긋 웃었다.

“무슨 할 말이라도 있으세요?”

“이 옷 기억나?”

제플린은 제가 입은 옷을 레베카에게 보였다.

그녀는 표정 없는 얼굴로 그 꼴을 지켜봤다.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제가 스스로 관 속으로 걸어 들어갔던 그날을.

레베카는 그날 제플린의 숨소리까지 기억하고 있었다.

“그럼요. 당신이 내게 청혼할 때 입었던 옷이 아닌가요? 아, 그립네요. 그 시절이.”

레베카는 진심으로 그리웠다.

차라리 그때로 돌아갔다면 이런 해괴한 짓거리를 하지 않아도 될 텐데.

그의 청혼을 거절하고 평온한 오벨리아가의 철없는 첫째 딸로 살아갈 수 있었을 텐데.

제플린은 지난날을 더듬는 레베카의 눈을 보고 고개를 떨구었다.

레베카를 덮친 수포 무리는 점점 더 흉측한 모습이 되어 가고 있었다.

이제 인정해야만 했다.

그의 사랑스러운 연인은 영영 망가져 버렸다.

“괴롭지 않아, 레베카?”

서글픈 제플린의 하늘색 눈동자에 레베카는 잠시 움찔했다.

그가 이런 식으로 자신을 걱정해 주는 건 거의 처음이었다.

괴롭지 않냐고?

평생을, 단 한 번도 괴롭지 않았던 날이 없었어. 당신 때문에.

목구멍까지 진실이 차올랐지만, 레베카는 다른 말을 내놓았다.

“이것이 내 운명이라면, 어쩔 수 없죠.”

“그래. 운명. 운명의 탓을 하자, 우리.”

“무슨 뜻인가요?”

“성녀가 돼. 레베카.”

레베카는 대답 대신 눈을 한번 크게 떴다가 다시 가늘게 좁혔다.

무슨 의미냐고 묻는 듯했다.

제플린은 잠시 미간을 찌푸렸다가 한숨을 내쉬고 담담히 내뱉었다.

“이혼해. 네가 여기서 더 망가지는 걸 지켜볼 수 없어.”

“결정하셨군요.”

레베카는 힘없이 웃었다.

이혼. 드디어 그가 제 입으로 그 말을 꺼냈다.

“제가 요청한 일이지만 막상 들으니 속이 쓰린 건 어쩔 수 없군요.”

한 번쯤은 잡아줘야지.

원래의 레베카라면 미련을 보이는 게 마땅했다.

레베카는 기쁨을 집어삼키며 울상인 표정으로 그의 팔을 살며시 잡았다.

“다시 생각해 볼 계획은 없으신 거겠죠?”

제플린은 잔뜩 찡그린 얼굴로 제 몸과 닿은 레베카의 손을 바라보았다.

그는 불에라도 덴 듯 레베카의 팔을 매정하게 쳐냈다.

그녀의 팔에는 터질 듯이 부풀어 오른 수포가 퍼져 있었다.

레베카는 퍽 상처받은 얼굴로 그가 쳐낸 제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제플린은 그 모습이 가엾다 생각했지만 마음을 바꿀 생각은 없었다.

아니, 오히려 확신이 들었다.

나, 제플린 데본셔는 지금의 레베카를 사랑하지 않는다.

동정은 사랑이 아니니까.

제플린은 레베카를 거울 앞에 앉혔다.

“잘 봐, 레베카. 이게 지금 네 모습이야.”

레베카는 금방 사라져버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흉측하군요.”

“그래, 흉측하지. 이런 얼굴을 반길 남편이 세상에 어딨겠어. 그리고 당신, 불임이잖아.”

“…….”

“후사도 낳지 못하고, 끔찍한 병에 걸린 아내를 데리고 살 만큼 내 인내심은 강하지 않아. 그러니 나와 이혼해 줘야겠어. 레베카.”

레베카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좀 더 확실한 대답을 받아내고 싶었다.

“그럼 나를 버리는 건가요, 제플린?”

레베카의 짙은 푸른 눈이 어느 때보다 맑고 깨끗했기에 제플린은 머뭇거렸다.

그러나 곧 그녀의 이마에서 풍겨오는 고약한 냄새가 그를 일깨웠다.

“그래. 날 원망해도 어쩔 수 없어. 하지만 이건 기억해. 당신이 날 버린 거나 마찬가지야. 날 두고 망가져 버렸잖아.”

어쩔 수 없다라. 참 이 집안 사람들은 어쩔 수 없는 일들이 이렇게도 많을까.

끝까지 자신 탓만 하는 제플린에 레베카는 헛웃음을 지었다.

제플린은 등을 돌렸다.

더 이상 그녀를 보고 싶지 않았다.

제 마음이 언제 바뀔까 싶어 그는 종종걸음으로 방문을 열었다.

제플린의 너른 등에 대고 레베카가 소리쳤다.

“날 버린 건 당신이야. 후회해도 소용없어.”

제플린은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지 않은 채 말했다.

“후회하지 않아.”

거세게 닫힌 문 뒤로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터뜨리는 레베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플린은 그것을 울음이라 생각했으나 실상은 웃음이었다.

기쁨을 주체하지 못한 웃음소리였다.

‘해냈다. 드디어 여길 벗어날 수 있어.’

하지만 기쁨에 겨웠던 발재간이 서서히 멈춰들었다. 레베카는 고개를 쳐들고선 한탄 섞인 숨을 내뱉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기분이 더러울까.”

분명 간절히 원했던 일이었다.

혹시라도 제플린이 일을 그르칠까 봐 어젯밤 우연히 마주친 그에게 확인 사살하듯 빌기까지 했다.

그런데 왜 이런 끔찍한 기분이 드는 건지…….

황홀한 해방감보단 역겨움이 더 컸다.

“우욱…….”

레베카는 헛구역질을 했다. 먹은 게 없으니 아무것도 올라오지 않았다.

비릿한 위액 냄새를 맡으며 레베카는 황망하게 주저앉았다.

지난 생의 마지막과 달리 망설임이 묻어나던 제플린의 눈빛 때문이었을까.

그것도 아니라면 정말 그가 제 몸뚱이만을 좋아했던 걸 확인해서였을까.

톡- 톡-

허망하게 웃고 있던 레베카의 시선에 창문을 두드리는 레오가 들어왔다.

“레오, 아직 안 갔어?”

레베카가 창문을 열자 레오가 입에 꽃 한 송이를 물고 들어왔다.

“이건……. 축포 꽃이구나.”

축포 꽃은 푸른색과 붉은색, 그리고 노란색의 꽃잎이 한데 뒤섞여 피어나 마치 불꽃놀이를 연상하게 하는 꽃이었다.

제국민들은 축하할 일이 생길 때마다 이 꽃을 서로 주고받고는 했다.

활짝 핀 꽃만큼 환한 미소가 레베카의 입가에 번졌다.

지금은 철도 아니라 구하기 힘든 꽃일 텐데 어디서 구해 왔는지 모를 일이었다.

야옹.

레오는 한 번 더 꽃을 레베카 앞에 들이밀었다. 마치 그녀를 칭찬하는 듯한 행동이었다.

레베카는 기꺼이 레오의 축하를 받아들였다.

“네 말이 맞아. 마땅히 축하할 일이야.”

레베카는 레오를 꼭 끌어안았다. 레오가 골골 소리를 냈다.

그 소리는 율리안을 쓰다듬을 때마다 그가 내고는 하던 얕은 신음과 닮아 있었다.

* * *

다음 날 아침, 데본셔 백작저 앞에는 두 대의 마차가 준비되어 있었다.

“가지.”

제플린이 한 대의 마차에 오르면서 말했다.

레베카와 같은 마차에 타기도 싫다는 얼굴이었다.

목까지 올라오는 검은 드레스를 입고 베일로 얼굴을 가린 레베카는 흡사 장례식에 참석하는 것 같은 차림새였다.

그녀를 배웅하는 사람은 없었다.

저택 안에선 레베카의 장신구와 옷가지 따위를 처리하느라 분주했기 때문이었다.

그레이스만이 창문으로 레베카의 뒷모습을 허망하게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레베카는 자신의 몫의 마차 위에 올랐다.

들어올 때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게 없었으니, 나갈 때도 아무것도 쥐고 가지 않는 게 도리였다.

제플린이 어느 정도의 위자료를 쥐여 주겠다고 했지만 레베카가 거절했다.

그에게 속한 건 아무것도 가지고 싶지 않았다.

대신전으로 가는 길은 평탄하기 그지없었다.

이혼 절차는 생각보다 간단했다.

데프리아 여신의 이름 아래 언약한 맹세임으로, 이혼할 때도 신관의 허락이 필요했다.

레베카가 성녀란 것과 신병에 걸렸단 소문이 제국에 파다하게 퍼졌다.

이혼 사유는 누가 들어도 고개를 끄덕일 만큼 적절한 것이었다.

신관은 서류 두 장에 도장을 찍어 레베카와 제플린에게 각각 건넸다.

보름 동안 숙려 기간을 가진 뒤 황실의 담당 부서로 서류를 보내면 둘은 그날부터 부부가 아니었다.

“끝이군.”

“끝이네요.”

기나긴 결혼 생활이 짧은 순간에 끝이 났다.

둘은 잠시간 말이 없었다.

제플린은 레베카를 흘깃 쳐다보았다. 검은 베일로 얼굴을 가린 레베카의 표정은 읽을 수 없었다.

“부디 그대가 행복했으면 좋겠군.”

통상적인 인사였다. 진심이었기도 했다.

제플린은 레베카의 대답을 기다렸지만 되돌아오는 건 그녀의 무거운 침묵뿐이었다.

‘그래. 난 행복해질 거야. 그리고 당신의 불행은 이제 시작이야.’

레베카는 베일 속에 그를 향한 비릿한 웃음을 숨겼다.

레베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것 같자 제플린은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그럼 이만…….”

그는 떠났다. 레베카를 홀로 남겨두고 떠났다.

그 사실이 믿기지 않아 레베카는 눈을 깜빡거렸다.

그 순간 도르륵, 하고 커다란 주사위 하나가 그녀의 발치로 굴러들어왔다.

“이건…….”

레베카는 단단한 철로 만든 주사위를 주워들었다.

아마 흥분에 못 이긴 누군가 집어던진 것 같았다.

레베카는 묵직한 주사위를 들고 멀어져 가는 제플린의 뒤통수를 응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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