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
이대로 그를 보내기는 조금 아쉽지 않은가.
‘이별 선물이다. 개자식아.’
레베카는 주사위를 든 손을 치켜들었다. 그리고 온 힘을 다해 제플린을 향해 집어 던졌다.
주사위는 정확하게 제플린의 뒤통수를 가격했다.
따악-!
둔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적어도 혹이라도 났을 법한 큰 소리였다.
“악! 어떤 새끼가…….”
제플린이 뒤통수를 부여잡고 모난 눈으로 사방을 살펴봤다.
혹시나 레베카가 던졌나 싶어 그쪽을 바라봤지만, 이미 레베카는 살랑거리는 걸음걸이로 그의 시야에서 멀어진 뒤였다.
* * *
‘이걸로 만족할 수는 없지만. 꽤 통쾌한 걸.’
기분 좋은 웃음을 흘리고 있는데, 누군가가 레베카를 불러 세웠다.
“레베카 님.”
데스라치노 교황이 서글하게 웃으며 그녀에게 다가왔다.
그를 발견한 레베카가 서둘러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교황님을 뵈옵니다.”
“이혼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이게 축하할 일인가요?”
고개를 쳐든 레베카가 싸늘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녀의 반응에 데스라치노는 잠시 주춤했다.
“성녀가 되려고 이혼하신 거 아니십니까……?”
그는 당황했다.
레베카가 신병을 앓고 있다니 처음 그 소식을 들었을 때 그는 환호성을 질렀다.
레베카는 무릇 남성이라면 탐내는 게 마땅한 여인이었다.
데본셔 백작이 그렇게 빨리 잡아채지만 않았더라도 제 부인으로 삼을 수 있었을 텐데, 하고 그는 못내 아쉬워했다.
그런 그녀가 성녀가 되어준다면 이제 자신의 손아귀에 들어온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데스라치노는 탐욕으로 찌든 눈을 번들대며 레베카를 훑었다.
온몸을 가리고 있어도 그녀의 고운 태는 숨길 수 없었다.
‘이 더러운 작자가…….’
혼자의 몸이 되자마자 파리가 꼬여들다니.
우스워진 제 꼴에 레베카는 어이가 없어 웃음을 터뜨렸다.
“분명 성녀가 되지 않겠다고 사제님 편으로 전해드렸습니다만.”
“하지만 그건 데본셔 백작 부인으로 남기 위해 하셨던 말씀이 아닙니까?”
“아닙니다. 유감스럽게도 전 성녀가 될 생각이 없습니다.”
“새, 생각해 보십시오! 이혼한 당신이 선택할 것은 그리 많이 없습니다. 재혼을 하더라도 그저 그런 인물들일 게 뻔하지 않습니까. 듣자하니 당신의 친정도 사정이 썩…….”
“데스라치노 교황님은 한가하신가 보군요.”
“예?”
“일개 이혼녀를 위해 이렇게 귀한 시간을 내신 걸 보니 그렇습니다.”
“아, 그거야 뛰어난 신성력을 지닌 성녀님을 신전으로 모실 수만 있다면 제 시간 따위야 언제든지 내드릴 수 있지요.”
빙글빙글 웃는 데스라치노를 보고 레베카는 인상을 찌푸렸다.
율리안이 데스라치노에 대해 이야기할 때마다 왜 역겹다고 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는 그녀가 승낙할 때까지 계속 따라붙을 작정이었다.
레베카는 데스라치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환히 웃는 그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갑자기 훅 들어오는 악취에 데스라치노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당신이 제 몸뚱아리를 보고 무슨 추접한 상상을 하고 있는지 훤히 보인답니다. 더러운 눈길은 그만 버리시고, 부디 충실한 신의 종이 되시길 바랍니다.”
레베카는 짐짓 그의 발을 뾰족한 구두 굽으로 꾸욱 밟았다. 그리고 손으로 입을 가리고 말했다.
“이런. 실수.”
“이…… 이!”
데스라치노는 얼굴이 시뻘게져서 무어라 소리치려고 했으나 그를 알아보고 다가오는 신도들 때문에 분노를 삼켜야만 했다.
레베카는 혀를 한 번 차더니 그를 지나쳐 유유히 걸음을 옮겼다.
‘뭐가 행운의 여신이라는 거야. 불행만이 가득 찼는데.’
레베카는 쉴 틈 없이 신전 안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사람들을 쳐다봤다.
하나같이 충혈된 눈으로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한 번만……. 이번 한 번만 행운이 따른다면 되돌릴 수 있어.”
레베카는 손을 들어 두 귀를 막았다.
끊임없이 맴도는 주사위 소리에 자신마저 광기에 사로잡힐 것 같았다.
마침내 신전을 빠져나오자 레베카는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그녀의 앞으로 기다란 계단이 이어져 있었다. 레베카는 새하얀 층계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이곳에서 집까지 갈 방법을 생각하지 않았다.
마차를 부르기엔 지금 수중에 돈이 한 푼도 없었다.
그건 둘째 치고 발이 움직이지 않았다.
‘자유…….’
이제 그녀는 어디든지 갈 수 있었다.
심장 떨리는 탈출을 감행하지 않아도 발 닿는 대로 어디든 갈 수 있었다.
하지만 레베카는 신전 앞에 서서 하염없이 눈을 깜빡이기만 했다.
그가 정말 나를 떠난 건가.
나, 이제 다시 감옥 같은 그곳으로 돌아가지 않아도 돼?
허무했다. 이렇게 쉽게 헤어질 수 있는 거였다면 이전 생에 시도라도 해볼 것을 그랬다.
레베카는 허탈감 어린 웃음을 터뜨렸다.
평생 동안 매여 있던 개는 목줄을 풀어도 그곳을 벗어나지 못한다고 했던가.
레베카는 자신을 지독하게 옭아매고 있던 목줄이 풀렸는데도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하고 그 자리에 붙박여 서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머뭇거렸다.
정말 누구의 허락도 없이 앞으로 나아가도 될지.
계속해서 이 추악한 여정을 떠나도 되는 건지.
이제 시작인데 레베카는 벌써 지친 기분이었다.
“베키!”
순간 누군가 자신을 다정하게 불렀다.
“언니!”
“레베카! 내 딸아!”
내려다본 그곳엔 그녀의 가족이 서 있었다.
테오와 다나에, 그리고 쌍둥이 여동생까지 레베카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전 생에서 도망쳤을 때 먼발치에서밖에 볼 수 없었던, 만질 수조차 없었던 그녀의 보금자리가 레베카를 향해 손을 활짝 폈다.
다나에가 달려와 그녀를 끌어안았다. 곧 테오와 리비아, 헤레나가 레베카를 끌어안았다.
숨 막힐 듯한 애정 어린 포옹이 이어졌다.
따뜻한 가족의 품속에서 레베카가 그동안 누르고 또 눌렀던, 그래서 끝내 봉인해두었던 감정들이 미친 듯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어흐흑…….”
첫 번째로 울음을 터뜨린 건 테오였다.
그 다음으론 다나에가, 그리고 리비아와 헤레나가 울기 시작했다.
‘큰일이네.’
이제 그녀는 더 이상 감정을 누를 수 없었다.
그럴 힘도 없거니와 이제 그럴 필요도 없었다.
레베카는 깊숙한 곳부터 터져 나오는 폭풍우에 온몸을 맡겼다.
솔직하게 모든 걸 내려놓았다.
그녀의 눈에서 마르지 않는 샘처럼 눈물이 솟았다.
행인들이 흘깃거리며 이상한 눈으로 오벨리아 일가를 쳐다봤으나 그런 시선 따위는 이 가족에게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다나에가 눈물을 닦고 말했다.
“베키, 이제 집으로 가자. 우리 집으로.”
마차 안에서도 그녀가 갑자기 사라져 버릴까 봐 가족들은 내내 레베카의 몸이나 옷가지 어딘가를 붙잡고 있었다.
레베카는 그들에게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나, 어디 안 가.”
“하지만 언니…….”
레베카는 제 팔을 꼭 쥐고 있는 헤레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물기가 가시지 않은 퉁퉁 부은 눈으로 사탕을 먹듯 입 안에서 ‘우리 집’이란 단어를 오랫동안 굴려 보았다.
달콤했다.
* * *
<특보! 데본셔 백작 부부 이혼 결정>
막힘없이 나아가는 마차 안에서 율리안은 몇 분째 미동도 없이 신문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원래라면 거들떠보지도 않을 삼류 가십지였지만 대문짝만하게 찍힌 레베카의 모습을 발견하자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검은 베일로 얼굴을 가려 제대로 알아볼 수 없었을 텐데도 기사는 사진 속 인물을 레베카로 특정했다.
아마 이 버러지 같은 가십지의 기자는 백작저에서부터 레베카를 미행한 게 틀림없었다.
기사의 내용은 볼 것도 없이 형편없는 추측 글로 버무려져 있었다.
아직 조정 기간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기사는 이혼이 성사된 것마냥 떠들어대고 있었다.
율리안은 내용을 대강 훑어보곤 사진 속 레베카를 바라봤다.
붙박인 듯 두 손을 꽉 쥔 채 그 자리에 얼어붙어 있는 그녀를.
“하아…….”
율리안은 신문을 접어두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입술이 샐쭉하게 올라갔다.
생전 남의 마음에 공감한 적이 없는데, 이 작은 사진 한 장만으로 레베카의 기분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더러웠다.
분명 원하는 대로 됐지만 끔찍하게도 더러운 그 기분을 율리안은 잘 알았다.
아버지가 죽었으면 하고 평생을 소원했지만 정작 그의 아버지가 죽었을 때의 그 느낌.
아버지가 릴리를 가진 셋째 부인의 배를 쓰다듬다 죽은 걸 알았을 때의 기분.
그자가 종족 번식의 역할을 다했다는 만족스런 얼굴로 관 속에 누워 있는 걸 보았을 때의 이루 말할 수 없는 그 더러운 감각.
그리고 아버지의 발자취를 이제 꼼짝없이 따라야만 한다는 걸 알았을 때, 그때의 자신처럼 레베카는 서 있었다.
‘왜 자꾸만 당신은…….’
돌아보게 할까.
기어이 과거를 헤집고, 되짚어 보고 결국엔 이렇게 고통스럽게 할까.
그런데도 율리안은 그녀에게서 눈을 뗄 수 없는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와 제대로 말을 튼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다. 게다가 얼굴을 맞댄 건 손에 꼽을 정도였다.
레베카와 율리안은 대부분 서신으로 연락을 주고받았다. 요즘 유행한다는 서신 친구라도 된 것 같았다.
그런데도 그녀를 만나면 이상하게 마음이 편했다.
마치 오래된 친구를 만나는 것처럼 즐겁고 설렜다.
오늘도 그랬다.
어차피 가 봤자 최근 며칠간 그랬던 것처럼 레베카는 목소리도 들려주지 않을 게 뻔한 데도 율리안은 무엇에 홀린 것처럼 마차에 올랐다.
어느새 너른 들판이 눈에 들어왔다.
율리안은 창문을 열었다.
들판의 풀내음을 가득 실은 시원한 바람이 그의 머리칼을 간지럽혔다.
바람에 스치는 풀 소리가 마치 감미로운 노랫소리 같아 그는 살며시 눈을 감았다.
헤레나와 리비아가 새로운 오벨리아가의 저택을 들판의 노래라고 부르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레베카가 제플린과 신전을 향했던 전날, 오벨리아가는 요하네스 공작령으로 거처를 옮겼다.
조금 외진 곳에 있었지만 푸른 들판이 내려다보이는 아담한 저택이었다.
레베카가 타니샤에게 일러주었던 사업들은 승승장구했다.
덕분에 다나에는 제플린에게 빚진 돈을 갚고도 남을 만큼의 수익을 얻었다.
하지만 공작령의 집값은 이렌시아보다 몇 배는 비쌌다.
이렌시아에 있던 그들의 저택보다는 규모가 현저히 작은 집밖에 구할 수 없었다.
율리안은 더 좋은 저택을 마련해 주겠다고 제안했지만 다나에가 한사코 거절했다.
‘같은 일을 두 번 반복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다나에의 얼굴에 후회의 기운이 얼핏 스쳐 지나갔다.
율리안은 다나에의 뜻을 존중하곤 재차 권유하지 않았다.
소박하지만 따뜻했다. 레베카의 가족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느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