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
율리안은 처음 오벨리아가를 방문했을 때의 충격을 잊지 못했다.
작은 응접실에 옹기종기 모인 식구들이 그를 환하게 맞이해주었다.
조금씩 다르지만 조금씩 닮은 상냥한 얼굴이 그를 향해 동시에 웃었다.
집 안에는 항상 먹음직스러운 음식 냄새가 가득했다.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그들은 무척 사소한 일에도 싸우고 화를 냈다.
율리안은 체스가 자매끼리 험악한 말을 늘어놓을 만큼 위험한 놀이일 수 있다는 걸 오벨리아가에서 처음 알게 되었다.
하지만 불같이 타오르던 맹렬한 싸움도 푸짐한 식탁 앞에선 금세 잦아들곤 했다.
언제 그랬냐는 듯 그들은 다시 서로의 얼굴을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오벨리아가는 책에서만 보던, 율리안이 막연하게나마 상상해 보았던 이상적인 가족이었다.
오벨리아가만큼 가족이란 단어가 어울리는 가족은 없을 것이었다.
율리안은 이곳에서 레베카의 힘의 원천을 보았다.
어떤 시련에도 끊임없이 분출하는 그녀의 열정의 씨앗은 그녀의 가족에게 숨겨져 있었다.
그래서 율리안은 슬펐다.
자신은 평생 강해질 수 없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어서.
레베카가 가진 힘은 겉보기에만 단단한 껍질을 가진 자신과 전혀 다른 힘이었다.
껍질이 깨지면 결국 연약한 알맹이만 남을 자신이 결코 가질 수 없는 강함이었다.
현관문을 두드리기 전, 율리안은 심호흡을 내쉬었다.
긴장한 까닭에 그의 목이 뻣뻣하게 굳었다. 율리안은 굳은 목을 이리저리 돌렸다.
한 번도 다정한 가족을 가져본 적 없는 소년처럼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는 고급스런 옷으로 무장하고 비싼 선물을 무기처럼 양손에 들었다.
“어서 오세요, 공작님!”
그가 노크를 하기도 전에 문이 벌컥 열렸다.
다나에가 환한 미소로 그를 반겼다.
율리안은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선물 상자가 담긴 종이가방을 흔들었다.
“공작님께 인사드립니다.”
헤레나와 리비아가 치마를 살짝 들고 예의 바르게 인사를 했다.
율리안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잠시 멍하니 있었다.
보통이었다면 쌍둥이가 누구 먼저랄 것도 없이 달려 나와 그의 손에 들린 선물을 낚아챌 순서였다.
하지만 오늘은 처음 보는 사람을 대하는 것처럼 그에게 깍듯이 굴었다.
대번에 율리안의 얼굴이 하얘졌다.
나를 어색하게 대하기로 결정한 건가?
지난번 방문 때 실수라도 한 걸까.
수만 가지 생각이 그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곧 장난스러운 웃음을 애써 참고 있는 쌍둥이를 발견하자 율리안은 안도했다.
율리안이 과장스럽게 예의 바른 인사를 건넸다.
“밤하늘의 빛나는 별보다 아름다운 숙녀 두 분을 만나 뵐 수 있어 큰 영광입니다.”
레베카의 두 동생이 꺄르륵 웃음을 터뜨렸다.
그 모습에 율리안의 긴장된 입매가 조금 풀어졌다.
이상하지 않았다. 이방인 같아 보이지 않았다.
이곳에 녹아든 것처럼 보였다.
그는 잠시 이곳에 레베카가 없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똑똑한 레베카라면 자신이 이들과 어울리기 위해 얼마나 안간힘을 쓰고 있는지 알아차렸을 테니.
“공작님! 존댓말하시는 거 너무 어색해요.”
“맞아요. 역시 공작님은 버릇이 나빠야 매력 있어요.”
“그러니까요. 공작님의 그 나쁜 말투가 친구들 사이에서 인기가 얼마나 많냐면요…….”
“리비아! 헤레나!”
다나에가 허리에 손을 얹고 대경실색해서 소리쳤다.
“오늘은 예의 있게 행동한다고 했잖니!”
“하지만 엄마! 너무 불편하다고요. 밖에서는 잘할게요. 네?”
율리안이 그런 다나에를 말렸다.
“괜찮습니다. 저도 이렇게 스스럼없이 대하는 편이 편합니다.”
다나에는 멋쩍게 붉어진 뺨을 한 손으로 가렸다.
“그래도 이제 내년이면 사교계에 데뷔할 나이인데,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에요.”
“때가 되면 알아서 잘할 겁니다. 집에서만큼은 마음이 편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말도 일리가 있네요.”
율리안이 다나에에게 선물을 건네는 사이, 헤레나가 쪼르르 달려와 율리안의 팔을 끌었다.
그녀는 율리안을 소파에 앉혔다.
“공작님, 이번에 공작님께 들려드리려고 저랑 리비아가 연습한 곡이에요. 저번보다는 나을 거예요!”
리비아가 피아노 앞에서 비장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이윽고 맑은 피아노 선율이 들리더니 헤레나가 노래를 하기 시작했다.
재주라고 하기에는 민망한 수준의 실력이었지만 율리안은 그 소리가 듣기 좋았다.
두 딸을 바라보는 다나에의 눈빛에서, 부엌문에 비스듬히 서서 밀가루를 손에 묻힌 채 노래를 흥얼거리는 테오의 얼굴에서 믿기 힘들 정도로 훌륭한 하모니가 흘러나왔다.
이 한복판에 자신이 앉아 있다는 사실이 율리안은 불편하고 어색했다.
하지만 악착같이 붙어 있고 싶었다.
율리안은 레베카가 아름다운 노래를 듣고 이층 계단을 타고 내려와 자신의 옆에 앉는 상상을 했다.
그리고 그의 어깨에 기대고 그와 미소를 주고받고, 그를 비로소 완전히 이 가족 안에 스며들 수 있게 도와주기를 바랐다.
연주가 끝나자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헤레나는 관중을 향해 공손하게 인사를 했다.
리비아가 대뜸 한숨을 내쉬었다.
“베키 언니도 여기에 있으면 좋을 텐데.”
그 말에 다나에가 율리안의 안색을 잠시 살폈다.
율리안의 얼굴에 잠시 그늘이 졌다가 이내 사라졌다.
“오늘 레베카는 좀 어떻습니까?”
“많이 좋아졌어요. 이제 열이 오르지 않더라고요. 하지만 여전히 수포는 아물지 않네요.”
“그래도 다행입니다.”
“저…… 공작님. 그 아이의 목소리라도 들으시겠어요?”
“안 돼!”
다나에의 말에 부엌에서 테오가 득달같이 뛰어나왔다. 그의 등 뒤로 고소한 버터 냄새가 따라붙었다.
“다나에, 레베카가 원하기 전까지 절대 아무도 만나지 못하게 할 거라 약조했잖소.”
“하지만 이렇게 찾아오실 때마다 문전박대하는 건 예의가 아니잖아요.”
“그래도 안 돼. 죄송하지만 공작님, 집에 찾아오시는 건 저도 반대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원하지 않는 걸 그 아이에게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 설사 공작님이라 하더라도요.”
율리안은 차가운 테오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레베카와 같은 진한 꿀 색의 금발을 찬찬히 살폈다.
아, 이 얼마나 따뜻한 냉대인가.
율리안은 고요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습니다. 저도 그건 원치 않습니다.”
그의 말에 테오의 얼굴이 약간 밝은 빛을 띠었다.
테오는 순간 내뱉은, 제 비난하는 어투에 머쓱해졌는지 쫓기듯 부엌으로 다시 들어갔다.
한바탕 요란하게 고기 굽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나에는 먹먹한 표정으로 테오가 사라진 쪽을 바라보았다.
“그이는 미안해서 레베카에게 말도 못 걸어요. 다 자기 잘못이라 생각하는 거죠. 뭐,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러니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 마세요.”
“담아두지 않습니다. 보기 좋은 걸요.”
“네?”
“보기 좋아요.”
담담히 내뱉는 그의 어조에는 깊은 슬픔이 묻어 있었다.
처량하게 떨리는 그의 입매를 보고 다나에는 놀라 두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그녀의 감상은 곧이어 시작된 두 딸의 싸움으로 지워졌다.
“야! 그거 내 거잖아! 당장 돌려줘!”
“잠시만 보고 돌려준다니까!”
“너는 머리띠 있잖아! 당장 내놔, 헤레나 오벨리아!”
율리안이 선물로 가져온 리비아의 머리핀을 헤레나가 낚아채서 이층으로 도망쳤다.
“아니! 얘들이 정말!”
다나에가 눈을 부릅뜨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금방이라도 아이들을 쫓아가 등짝을 내리갈길 기세였다.
율리안은 쿡쿡 웃으며 다나에를 만류했다.
“괜찮습니다. 아직 아이들이니까요. 제가 원인을 제공한 셈이니 제가 말려보겠습니다.”
“하지만 공작님…….”
다나에의 만류에 율리안은 그녀를 안심시키려는 듯 눈을 곱게 접어 보였다.
아름다운 그의 모습에 다나에는 잠시 말을 잃다가 이내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율리안은 조심스럽게 계단을 올랐다.
계단의 벽면에는 다나에의 취향을 반영한 태피스트리가 줄지어 걸려 있었다.
따듯한 색감의 퀼트 태피스트리는 그녀가 직접 만든 듯했다.
테오의 얼굴과 장난스런 두 쌍둥이의 모습이 수놓아 있었다.
계단 끝에 다다랐을 때 율리안은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어린 소녀의 모습이 수놓아진 태피스트리가 그의 시선을 빼앗았다.
“레베카구나.”
그는 작품이 닳기라도 할까 차마 손으로 쓸어볼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태피스트리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스쳐 지나가다 보아도 꽃이 만발한 화원 속의 소녀는 레베카였다.
그녀의 발밑에 새끼 고양이들이 노니고 있었고, 한구석에는 다나에와 테오로 보이는 한 쌍의 연인이 그녀를 다정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율리안은 문득 찾아온 고통에 숨이 멎는 듯했다.
악마의 발톱을 움켜쥐던 레베카의 차갑게 가라앉은 얼굴이 떠올랐다.
그녀는 봄날의 햇볕만을 받고 자란 것처럼 어여쁘게 웃는 소녀였다.
하지만 그 소녀는 갈기갈기 찢어진 마음을 냉랭한 조소로 숨겨버리는 여인으로 성장했다.
그녀가 맨발로 걸어왔을 날카로운 얼음 조각이 흩뿌려진 과거를 연상하자 율리안은 끓어오르는 분기를 참을 수 없이 이를 세게 악물었다.
단단히 다문 그의 잇새 사이로 그녀를 행복하게 해주고 싶다는 소망이 새어 나왔다.
탁.
순간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율리안이 고개를 돌리자 방문 앞에 노트 한 권이 놓여 있는 게 보였다.
율리안은 천천히 다가가 노트를 집어 들었다.
노트에는 악마의 발톱을 처음 먹었을 때부터 지금까지의 증상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유스타프가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을 거야.”
방 너머로 낭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행히 레베카의 목소리는 어디 아픈 기색 없이 맑았다.
오랜만에 듣는 그녀의 음성에 율리안은 하마터면 문을 벌컥 열 뻔했다.
하지만 그를 향해 매섭게 치켜뜨는 테오의 눈매가 떠올라 율리안은 멋대로 나가려는 제 손을 꾹 잡았다.
수포의 모양까지 세세하게 그려 넣은 일지를 살펴보던 율리안은 유스타프가 레베카의 증상을 한 번만이라도 보게 해달라고 애원하던 걸 떠올렸다.
대체 이 여자는 어디까지 앞서 보는 걸까.
그녀의 혜안을 자기가 따라잡지 못하고 방해만 될까 싶어 덜컥 겁이 났다.
율리안은 유려한 레베카의 글씨를 찬찬히 손으로 짚었다.
담담하게 쓰여 있었지만 이런 증상을 겪었다면 무척이나 괴로웠을 것이다.
홀로 백작저에서 고통을 감내했을 그녀를 생각하니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레오를 통해서 바라본 그녀는 무척이나 지쳐 보였다.
하지만 레베카는 레오에게조차 아프다는 소리를 내뱉지 않았다.
화가 났다.
왜 기대지 않을까. 한 번쯤은 아프다고 자신에게 소리를 질러도 될 텐데.
누구보다 의지할 자격이 충분하면서도 그녀는 고집스럽게 모든 아픔을 혼자 집어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