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망친 백작 부인이 돌아왔다-57화 (57/232)

57.

율리안은 손을 들었다.

그가 노크를 하려는 찰나, 또다시 레베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지 마.”

“내가 뭘 하려는 줄 알고.”

“노크하지 마. 율리안.”

“…….”

“당신이 들여보내 달라 하면 난 거절할 수 없어. 그러니 내게 부탁하지 마. 지금의 난 도저히 널 만날 수 없어.”

“레베카…….”

“미안. 은혜를 입었는데 이런 식으로 갚네. 다 나으면……. 내가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오면 그때 만나자. 그때의 나는 네가 아는 레베카일 거야.”

“지금의 너도 레베카야.”

“잘 가. 율리안.”

율리안은 노골적인 작별 인사에 입을 다물었다.

라일락 정원에서 레베카가 레오에게 속삭이던 말이 떠올랐다.

‘율리안은……. 율리안은 지금의 내 얼굴을 보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그녀가 이러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는 괜찮다고, 네가 무슨 모습을 하든 나는 상관없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의 그녀에게 이런 말도 상처가 될 것 같아 율리안은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동정한다고 여길 수도 있었으니.

율리안은 노트를 구겨 쥐었다. 그리고 하고 싶은 말을 애써 누른 다음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또 올게. 일지를…… 받으러 와야 하니.”

방 너머로는 아무런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율리안은 그걸 무언의 긍정으로 받아들이고 진심을 담은 한마디를 건넸다.

“그러니 그때까지 아프지 마.”

율리안의 기척이 멀어지자 숨죽이고 문에 귀를 대고 있던 레베카는 주르륵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다시 또 온다니.

그 말이 끔찍하게 싫으면서도 그 말을 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니 또 가슴이 아려왔다.

레베카는 조용히 화장대 앞으로 가서 앉았다.

증상이 많이 호전되었다고 해도 얼굴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아!”

이전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며 얼굴을 더듬던 그녀의 손길에 수포 하나가 터져 나왔다.

밀려오는 쓰라림에 레베카의 미간이 깊게 패였다.

레베카는 휴지를 가져와 수포를 눌러 닦아냈다.

피가 맺힌 휴지를 멍하게 보며 레베카는 실소를 터뜨렸다.

한때는 제 아름다운 얼굴을 사랑했던 적이 있었으나 어느 순간부터 그녀는 제 황홀한 얼굴을 저주처럼 생각했다.

평범했더라면, 그저 눈여겨보지 않고 지나칠 정도로 평범한 외모였더라면 그녀가 죽음에서 살아 돌아올 이유도 없었을 테니.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었다.

변해버린 제 모습을 보고 질색하는 사람들의 반응이 퍽 재밌기까지 했다.

그런데 왜, 율리안이 그들과 같은 반응을 보일 거라 생각하면 견딜 수가 없을까.

이전 생에서, 제플린이 수포로 가득한 그녀를 보고 비명을 질렀을 때조차 이 정도로 아프지 않았다.

‘예뻐 보이고 싶어.’

세상 모든 사람이 그녀를 흉하다고 손가락질 해도 율리안 그만큼은 자신을 어여쁘다 여겨주었으면 했다.

그래서 자신을 향해 열기 어린 황금빛 눈동자를 빛내고, 저를 쓰다듬어 달라 부드러운 머리칼을 제 손에 가져다 대고, 그리고 자신의 이마에 뺨에 입술에 아니, 온몸에 그의 뜨거운 입술을 맞대어주었으면 했다.

레베카는 눈을 질끈 감았다.

“욕심이다.”

버려야 할 욕심인 걸 알면서도 도무지 멈출 생각을 하지 않는 제 마음이 원망스러웠다.

생각만, 혼자서 몰래 상상만 하는 건 괜찮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언젠가 자신이 그걸 실제로 옮길까 봐 두려웠다.

그래서 걷잡을 수 없이 그에게 빠져들고 상처받고 또 상처를 입히고.

“안 되지, 안 돼.”

안 될 노릇이다.

어차피 그와는 끝까지 함께할 수 없는 운명이다.

시작조차 하지 않는 게 옳았다.

레베카는 천천히 창문가로 다가갔다.

들판의 노래가 들려왔다.

청정한 바람 소리와 더불어 환한 웃음소리도 그녀의 창문을 넘어왔다.

율리안이 집을 방문할 때마다 아래층의 웃음소리가 더욱더 커지곤 했다.

그는 마치 마법을 부리는 것 같았다. 그녀가 행복해질 것들만 골라서 피워내는 마법사.

레베카는 힘없이 창문에 머리를 기대었다.

가족들, 그리고 그와 함께하는 제 모습을 가만히 그려보고는 눈을 질끈 감았다.

* * *

“어쩜! 너무 아름다우세요!”

산드라가 손뼉을 치고는 감탄을 내뱉었다.

그녀의 말은 빈말이 아니었다.

제 머리색과 똑같은 연보라색 드레스를 입은 알리시아는 무척이나 사랑스러웠다.

“정말요? 제게 잘 어울리나요?”

알리시아의 뺨이 상기된 채 붉게 물들였다.

산드라는 대답 대신 고개를 연신 끄덕이며 드레스에 장식할 비즈를 가져와 여기저기 대보았다.

이곳 산드라의 의상실은 현재 수도에서 가장 성행하는 곳이었다.

예약을 잡으려면 석 달 전에는 연락을 해야 했다. 그마저도 선착순이라 경쟁이 치열했다.

하지만 데본셔 백작가는 예외였다.

레베카는 산드라에게 있어서 뮤즈와 같은 존재였다.

그녀의 드레스를 만들 수 있다면 황녀의 일정까지 미뤄버릴 정도였다.

그래서 데본셔 백작가에서 맞춤 드레스를 의뢰한다고 했을 때 그녀는 설렜다.

제플린과 레베카가 이혼했다는 세간의 소문은 아무래도 거짓인 모양이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알리시아예요.”

그러나 데본셔 백작의 마차에서 내린 건 뜻밖에도 알리시아였다.

산드라는 기함했으나 예약을 물릴 수 없는 노릇이기에 어쩔 수 없이 알리시아를 가게 안으로 들였다.

그녀의 우려와는 달리 알리시아는 꽤 괜찮은 고객이었다.

평민이라 그런지 모든 물건에 호기심이 많았다. 반짝거리는 순진한 눈매에 절로 미소가 지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레베카가 그리웠다.

그녀의 몸에 꼭 맞는 드레스를 만들었을 때의 희열감은 억만금을 줘도 아깝지 않은 것이었다.

산드라는 자신을 장사치이기 전에 예술가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오늘 알리시아와 함께 동행한 제플린을 보고 산드라가 남몰래 한숨을 흘리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둘 사이는 퍽 좋아 보였다.

‘아무래도 이혼설이 사실인가 보네.’

환상적인 커플이었던 백작 부부의 이혼설은 사교계를 뜨겁게 달구고 있었다.

어딜 가나 그 이야기뿐이었다.

오늘 오전에 방문한 페튜니아 후작 부인도 내내 그 이야기를 떠들다 갔다.

제플린을 이해한다는 쪽과 레베카를 동정하는 쪽으로 의견이 나뉜 모양이다.

산드라는 레베카가 친정으로 돌아가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오벨리아가는 가세가 기운 후로 사교계에 거의 나오지 않았으니 사람들이 떠드는 자세한 이야기를 그녀가 듣지 못할 터였다.

가녀린 레베카의 심장은 사교계의 칼날 같은 이야기들을 견디지 못할 것이었다.

어쨌거나 앞으로 레베카를 볼 수 없다는 건 기정사실인 듯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산드라의 안색이 조금 어두워졌다.

“저, 산드라 님?”

“아, 네.”

알리시아의 꾀꼬리 같은 목소리에 산드라는 상념에서 퍼뜩 깨어났다.

그녀는 얼른 비즈니스적 미소를 머금고 알리시아를 바라봤다.

“이 드레스가 금발일 때도 어울릴까요?”

“네?”

“혹시나 나중에 기분 전환으로 염색을 할 수도 있잖아요.”

“아. 물론입니다. 이 드레스는 부인의 눈동자 색하고도 잘 어울리니까요.”

산드라의 대답에 알리시아는 잠시 제플린을 흘깃 쳐다봤다.

그는 화려한 응접 테이블 위에 서류 더미를 가득 쌓아놓고 정신없이 서류를 훑고 있었다.

자신을 제대로 바라보지 않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수도에 그와 함께 온 것만으로도 알리시아는 이미 만족했다.

레베카와 신전에서 이혼 도장을 찍은 뒤, 제플린은 평소와 다를 바 없는 하루를 보냈다.

아니, 평소보다 배는 더 바쁘게 지냈다.

포도 농장 일을 수습하고, 호텔 사업도 확장했다.

그는 일에 미친 사람마냥 사업에 열중했다.

모든 게 순조로웠다. 레베카가 없는 삶도 꽤 평화로웠다.

가끔 이혼 사실 여부를 물어오는 사람이 평화를 깨뜨리긴 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제플린은 빙긋 웃을 뿐 대답을 회피했다. 그러면 다시 평화가 찾아왔다.

“백작님, 마음에 드시나요?”

알리시아가 사르르 녹아드는 미소를 지으며 한 바퀴 빙그르르 돌아 보였다.

제플린이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봤다.

알리시아는 포르르 날아드는 참새 같은 걸음걸이로 제플린의 뒤로 다가갔다.

그녀는 잔뜩 긴장해 있는 제플린의 어깨를 주물렀다.

요즘 들어 알리시아는 그의 마음에 드는 짓만 골라서 했다.

제플린이 알리시아의 배를 쓰다듬었다.

꼼지락거리는 태동이 느껴지자 그의 입가에 미미한 웃음이 퍼졌다.

“예쁘네.”

그 한마디면 충분했다.

알리시아는 흡족한 얼굴로 산드라에게 다른 드레스의 디자인을 요구했다.

레베카가 사라지자 알리시아는 백작저에 온 뒤로 처음으로 행복을 느꼈다.

제플린은 자상한 아버지가 될 것처럼 굴었고, 고용인들은 예전처럼 알리시아를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

이제 그녀가 원하는 건 무엇이든 가질 수 있었다.

하지만 이따금 숨길 수 없는 불안감이 찾아왔다.

섬뜩할 정도로 예리한 직감이 알리시아를 떨게 했다.

예를 들어, 레베카의 것이었던 방을 텅 빈 눈동자로 쫓는 제플린을 발견할 때라든가.

지금처럼 멍청한 발언을 할 때라든가.

“그렇지. 그 드레스에 어울리는 장신구를 사야겠어. 이곳을 나가면 모퉁이에 있는 보석상으로 가지.”

제플린의 말에 알리시아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네? 모퉁이의 보석상은 방금 갔다 왔잖아요. 혹시 그곳에 다른 보석상이 또 있는 건가요?”

제플린은 멈칫했다.

요즘 들어 기억이 점멸하는 전구처럼 이어졌다가 끊어졌다가 했다.

그는 잠시 멍하게 오늘 제 일정을 더듬어 보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아. 레스토랑을 말한다는 게 말이 헛나왔나 보군. 알리시아, 이 근방에 괜찮은 레스토랑이 있으니 오늘 그곳에서 저녁을 먹도록 하지.”

그는 멋쩍게 웃었다.

알리시아는 그의 웃음에 불안한 눈빛을 보냈다.

하지만 이내 산드라가 들고 온 화려한 드레스가 그녀의 불안을 씻겨냈다.

* * *

“비가 오네.”

레베카는 정원이 내다보이는 거실의 커다란 창문 앞에 앉아 책을 읽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태양이 작열하더니 금세 먹구름이 몰려와서 세찬 비를 뿌려대고 있었다.

바람이 심상치 않은 걸 보니 천둥 번개라도 칠 기세였다.

그러고 보니 제플린은 천둥이 칠 때마다 제 방에 처박혀 나오질 않았다.

들리는 소문으론 그가 천둥을 무서워한다고 했다.

그 넓은 방 안에서 떨고 있을 그를 상상하다 레베카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런 감상은 아무 도움도 되지 않았다.

시간은 참 속절없이도 흘러갔다.

내일이면 조정 기간의 마지막 날이었다.

그녀는 일찌감치 마지막 이혼 서류를 황궁에 보냈지만, 제플린 편으로는 아직 서류가 당도하지 않았다고 했다.

설마 번복하지는 않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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