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망친 백작 부인이 돌아왔다-58화 (58/232)

58.

일이 복잡하게 흘러가는 건 사양이었다.

레베카는 부디 그가 마음을 고쳐먹지 않길 바라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왜! 무슨 일 있니?”

테오가 갓 구운 쿠키를 내오다 말고 화들짝 놀라 물었다.

집에 돌아온 뒤로 처음으로 자신에게 말을 거는 테오였기에 레베카는 놀라서 눈을 둥그렇게 떴다.

의문이 가득한 레베카의 눈빛에 테오는 움찔했다.

하지만 뭔가 단단히 결심한 듯 접시를 테이블 위에 올리고 말했다.

“내일이면 정말 이혼이구나. 그것 때문에 심란해서 그러니?”

“이혼이라…….”

레베카는 슬쩍 웃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곳에서 보내는 시간이 너무나 즐거워서 방금 전까지만 해도 이혼에 대해선 깜빡 잊고 살았다.

백작저에 갇혀 살았던 세월이 마치 오래된 꿈처럼 느껴져 당황스러웠다.

고통스러웠던 기억은 여전히 생생하게 남아 있었지만 성가실 정도로 떠오르지 않았다.

때때로 평온한 일상에 복수가 무슨 의미가 있나 생각을 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녀는 마음을 다시 다잡았다.

이전 생을 생각하면 피가 다시 거꾸로 솟았다.

게다가 자신의 몸에서 중독 증상이 사라진다면 제플린의 집착이 다시 시작될 가능성도 있었다.

오히려 그의 미친 짓이 한층 더 발전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레베카는 로버트를 생각했다. 그리고 그녀에게 충성을 맹세한 사냥개들을 떠올렸다.

알리시아를 생각하고, 손목에 감겼던 수갑을 생각했다.

그리고 그녀의 눈앞에서 빼앗겨 버린 제 자식을, 소중한 딸을 생각했다.

용서할 수 없었다.

이런 행복한 일상을 대가로 주어서라도 제플린을 응징해야만 했다. 그래야만 했다.

레베카의 주먹이 다부지게 쥐어졌다.

테오는 눈시울이 붉어진 채 골똘히 고뇌하는 딸을 내려다보았다.

“내가…… 내가 잘못했다. 레베카.”

테오가 레베카의 앞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레베카가 깜짝 놀라 테오를 일으키려 했다.

당황한 레베카는 멀리서 잠자코 지켜보는 다나에에게 시선을 보냈다.

테오와 마찬가지로 눈에 눈물을 머금은 다나에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테오는 무릎을 꿇은 채로 딸에게 읍소했다.

“눈이 멀었다. 너를 생각하지 않았어. 반항이라도, 하다못해 황제께 항의서라도 올려야 했어. 그렇게라도 해서 너를 그곳에서 빼냈어야 했다.”

“다 지나간 일이에요. 아버지.”

“아니다. 난 너를 모른 척했어. 어쩔 수 없다고, 누군가가 희생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어. 모두 내 탓으로 벌어진 일을 네게 떠넘긴 꼴이지. 네가 날 아비라 여기지 않아도 상관없다. 그저, 그저 미안하다고 하고 싶었어. 여전히 널 사랑한다는 말을…….”

레베카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어 아버지를 껴안았다.

그가 모르는 곳에서 훌쩍 커버린 딸의 어깨를 붙들고 테오가 흐느꼈다.

“딸아, 부디 나를 용서하지 마라. 용서할 수도 없을 게다. 하지만 가족이 있다는 사실만은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이제 다시는 너를 잃지 않게 모든 걸 걸 수 있어. 네 행복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어. 미안하다. 내가 정말 미안해…….”

어느새 그녀의 등 뒤로 천둥이 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테오의 울음소리가 좀 더 컸다.

그의 울음소리는 맹렬히 짖어대는 천둥소리를 뚫고 처절하게 울려 퍼졌다.

레베카는 그의 어깨 너머로 울음을 참고 있는 헤레나와 리비아, 그리고 다나에를 바라봤다.

테오의 말대로 레베카는 그들을 용서할 수 없었다.

하지만 잊고 살기로 했다.

더러운 기억은 묻어두고, 그들이 앞으로 레베카에게 선사할 아름다운 행복을 그 위에 덧칠하기로 했다.

테오의 울음이 점차 잦아들자 레베카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 약속, 지키셔야 해요. 제 행복을 위해 무엇이든 다 할 거란 약속.”

테오가 반색을 하며 레베카의 얼굴을 바라봤다.

“당연하지. 우리 딸. 네 덕분에 우리가 살았으니 이제 우리가 갚아야 할 차례다.”

레베카는 다음 대답을 할 수 없었다. 다나에가 득달같이 달려와 레베카를 껴안았기 때문이었다.

헤레나와 리비아는 서로 손을 꼭 잡고 그 광경을 쳐다봤다.

솔직히 말하자면 둘에게 레베카에 대한 기억은 별로 없었다.

쌍둥이는 늦둥이였다.

그들이 제대로 된 문장을 겨우 구사할 때 즈음, 레베카는 데본셔 백작 부인이 되었다.

때문에 정말 특별한 일이 아니고선 레베카와 자매가 추억을 쌓을 일은 별로 없었다.

하지만 둘은 알고 있었다. 귀여운 드레스와 달콤한 케이크는 모두 레베카의 희생으로 얻은 것이란 걸.

그래서 헤레나와 리비아는 다짐했다. 레베카가 돌아온다면 그녀에게 잘해주기로.

조금 어색할 순 있어도 마지막 남은 쿠키 하나는 그녀에게 양보하자고.

두 소녀는 손을 마주 잡고 흐르는 눈물을 가까스로 참아내고 있었다.

하지만 막상 집으로 돌아온 레베카를 보니 둘의 생각은 달라졌다.

그녀는 잘 대해주고 싶은 낯선 사람이 아니었다.

잔뜩 지친 기색이었지만 아낌없이 그들에게 미소 짓는 레베카는 오벨리아의 사람이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어색한 곳 없이 완벽한 우리의 가족이었다.

두 소녀는 마주 잡은 손을 풀고 레베카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그녀를 으스러지도록 껴안았다.

이어지는 네 명의 무시무시한 악력에 레베카는 잠시 비명을 질러야 했다.

하지만 행복한 비명이었다.

“이런, 제가 때를 잘못 맞춰 찾아온 모양이군요.”

율리안이 머쓱한 얼굴로 한데 뒤엉킨 오벨리아 가족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나에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눈물을 닦아냈다.

“아, 아닙니다. 응접실로…….”

다나에는 순간 흠칫하고 레베카를 바라봤다.

레베카의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

그녀는 율리안을 공포에 가득 찬 얼굴로 올려다봤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지금 그녀의 얼굴을 가리고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레베카의 손이 달달 떨렸다.

들켰다. 그에게 들켜버렸다.

율리안은 레베카와 눈이 마주치자 반가운 마음을 숨길 수 없어 저도 모르게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레베…….”

하지만 그의 목소리가 레베카에게 닿기도 전에 그녀는 도망쳤다.

레베카는 필사적으로 이층으로 뛰어 올라갔다.

“레베카!”

율리안이 곧바로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

테오가 다급히 그를 막아서려 했지만 다나에가 테오를 말렸다.

“레베카도 이제 그늘에서 나와야 하지 않을까요.”

그녀의 말에 테오는 멈춰 섰다. 그리고 걱정스런 눈으로 율리안이 사라진 계단을 올려다봤다.

* * *

하늘이 흐렸다.

마치 지금 그의 기분처럼 잿빛으로 가득한 하늘을 제플린은 잠잠히 올려다봤다.

내일은 조정 기간의 마지막 날이었다.

수도에 도착하는 시간까지 계산해보면 오늘 안으로 이혼 서류를 황궁으로 보내야 했다.

그러면 그는 완벽히 레베카와 이혼하는 것이었다.

일찍이 보낼 수도 있었지만 어쩐지 제플린은 계속해서 망설였다.

현실감이 없었다. 그녀가 이곳에 없다는 것이.

‘레베카…….’

제플린은 고개를 떨구었다.

아니다. 그녀 없이도 괜찮아.

그렇게 주문을 외우듯 제플린은 정원 한복판에 서서 연신 중얼거렸다.

그녀가 없으면 숨도 쉴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보아라. 그녀가 없어도 그동안 얼마나 보란 듯이 잘 살았는가.

새로 확장한 사업은 날개 돋친 듯 순항하고 있었고, 최근 들어 소란이 끊이지 않던 저택도 다시 원래의 평온한 모습을 되찾았다.

괜찮았다. 그녀가 없이도 충분히 살 수 있었다.

그리고 옥타비오가 보내준 레베카의 대체 목록도 나쁘지 않았다.

그의 말대로 레베카만큼, 아니 그녀보다 아름다운 사람은 언젠가 찾아낼 수 있으리란 희망이 보였다.

그리고 알리시아.

알리시아가 품은 제 씨앗이 무럭무럭 자라나는 걸 보는 것은 생각보다 흐뭇한 일이었다.

자신을 꼭 닮은 아이라면 열과 성을 다할 정도로 아끼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싫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런데 왜 발이 얼어붙은 듯 움직이지 않을까.

제플린은 레베카가 지금 어떻게 지낼지 상상했다.

오벨리아, 그 구질구질한 집 안에 외로이 누워 있을 레베카를 생각하니 가슴이 잠시 저려 왔다.

과거의 영광을 되돌아보며 눈물로 밤을 지새우겠지. 자신을 그리워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래, 틀림없이 나를 그리워하고 있을 거야.

그리고 보니 오벨리아가의 채무는 어떻게 해야 할까.

그녀의 처지를 생각하면 탕감해 주는 게 맞았다. 하지만 딸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한 죄를 물어야 하지 않을까.

제플린이 상념에 빠져 있는 사이, 옥타비오가 천천히 다가왔다.

“백작님, 황궁으로 보내야 할 서류가 있지 않습니까?”

그는 빛이 사라진 눈동자를 들어 옥타비오를 바라봤다.

옥타비오는 싱긋 웃으며 제플린의 어깨를 다독였다.

“버릴 건 버리고, 취할 건 취하십시오. 그래야 앞으로 나아가실 수 있습니다.”

그의 말에 제플린은 힘없이 웃었다.

“그래. 자네 말이 맞아.”

제플린은 비척거리며 서재로 향했다.

쿠르릉-

먹구름을 키워낸 하늘이 그에게 경고하듯 나지막하게 으르렁거렸다.

제플린은 그 소리에 흠칫 어깨를 떨었다.

* * *

“레베카! 잠시만, 잠시만 나를 봐!”

잔뜩 겁에 질린 표정으로 방 안으로 사라지려는 레베카를 율리안은 가까스로 따라잡았다.

레베카의 방 안으로 들어온 율리안은 레베카의 손목을 잡고 그녀를 제 앞으로 돌아 세웠다.

율리안의 등 뒤로 문이 자연스레 닫혔다.

“당신이 뭘 두려워하는지는 알겠어. 하지만 아니야. 난 아니야.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제발 가. 날 보지 말아줘.”

레베카는 필사적으로 제 얼굴을 가렸다. 눈물이 쉴 새 없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녀는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지금 율리안이 짓고 있는 그 어떤 표정도 보고 싶지 않았다.

율리안이 팔을 놓지 않자 레베카는 그를 밀치고 방 한가운데로 도망쳤다.

그리고 고집스레 바닥에 앉아 무릎에 얼굴을 파묻었다.

레베카는 지금 이 순간 자신이 사라져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레베카…….”

율리안은 기다시피 레베카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는 흐느끼는 레베카의 가냘픈 어깨를 이를 악물고 지켜봤다.

율리안은 멍청하게 아무 말도 떠올리지 못하는 지금의 자신이 한심해서 견딜 수 없었다.

울고 있는 레베카를 보니 큰 실수를 한 것 같았다.

따라오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녀가 아무리 보고 싶어도 억지로 손을 잡고 얼굴을 돌렸으면 안 됐었는데.

그렇지만 언제까지고 이렇게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은가.

자신과 레베카는 앞으로 나아가야만 했다. 그것도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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