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
율리안은 그녀의 앞에 앉아 울음이 잦아들길 기다렸다.
고통의 시간이었지만 얼마든지 견딜 수 있었다.
얼마 후, 한참을 울던 레베카는 여전히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율리안에게 더듬더듬 말문을 열었다.
“이쯤하면 됐어. 내게서 고약한 냄새가 날 거야. 애써 참을 필요 없이 이만 나가, 율리안. 지금의 나는 당신과 어울리지 않아.”
“글쎄, 난 후각이 그리 좋지 않아서 잘 모르겠는데.”
“장난 그만하고 진짜 나가. 이건 내 자존심 문제야.”
“그거 영광이군. 당신의 자존심을 건드릴 정도의 인물로 평가를 해주다니.”
“그렇게 말해도 내 얼굴을 보면 소스라치게 놀라 도망쳐 버릴걸. 내가 정말로 흉측한 얼굴을 들이밀기 전에 얼른 나가.”
자조적인 레베카의 말에 율리안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대체 왜 저런 말을 하는 건지 이해할 수 없어 화가 났다.
레베카의 모습은 레오의 기억을 읽으면서 일찌감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뭐 어때서.
그녀는 아픈 것뿐이었다.
아픈 사람을 두고 망발을 내뱉을 그런 작자로 여길 만큼 자신이 못 미더운 걸까.
그래도 자신이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는데 이런 취급은 조금 억울했다.
율리안은 발끈해서 퉁명스레 대꾸했다.
“보여줘야 알지. 해보지도 않고 왜 나를 네 멋대로 판단해.”
“해보지 않아도 아는 일이 있잖아.”
“아니, 세상에 그런 건 없어.”
“있거든.”
유치한 공방이 한참 이어졌다.
그러다 레베카가 먼저 웃음을 터뜨렸다.
“이래서는 우리 집 쌍둥이랑 다를 게 없네.”
율리안도 그녀를 따라 잔잔하게 웃었다.
조금은 마음이 풀린 걸까?
희미하게 희망이 샘솟았다.
그는 잠시 멈칫거리다가 말을 이었다.
“네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든 넌 레베카야.”
“…….”
“당신은 말이야, 감히 요하네스 공작에게 춤을 청해 달라고 한 사람이야. 그리고 맹랑하게 계약 결혼을 제시하고, 제 한 몸을 기꺼이 높은 계단에서 던졌어. 그 끔찍한 제플린 데본셔의 손에서 스스로 벗어난 대단한 사람이라고. 그리고…….”
율리안은 숨을 들이마셨다.
“나와 결혼할 여자. 내가 선택한 여자. 그게 너야. 레베카.”
레베카가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침묵이 길어지자 율리안은 고개를 숙였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해야 할 것 같았다. 더 했다간 그녀가 상처를 받을 것만 같았다.
율리안은 자신에게 상처받을 레베카를 지켜볼 자신이 없었다.
“율리안.”
그가 거의 자포자기한 채로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는 찰나, 레베카의 물기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율리안은 얼굴을 번쩍 들어 레베카를 바라봤다.
레베카가 서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율리안은 멍하니 바닥에 앉아 레베카를 올려다봤다. 아직 한낮이었지만 날이 흐린 탓에 방 안은 어두웠다.
어둠 속에서 푸른 눈동자가 별처럼 반짝였다.
“나, 흉측하지?”
레베카는 아직 온전한 빛 밑에서 얼굴을 드러낼 자신은 없었다.
하지만 확인하고 싶었다.
아름다움을 잃은 자신이, 인형으로써 가치가 없어진 자신이 여전히 레베카로 살아갈 수 있을지.
그동안 변해버린 그녀의 얼굴을 두고 사람들이 보이는 반응은 가지각색이었다.
제플린처럼 혐오하거나, 옥타비오나 알리시아처럼 즐기거나, 아니면 칸나나 가족들처럼 슬퍼하거나.
그럴 때면 레베카는 자신을 잃어버린 기분이 되고는 했다.
미색을 잃은 게 이렇게까지 안타까워할 일인가 싶었다.
난 여전히 나인데. 나는 여전히…….
율리안과 눈을 마주친 레베카의 눈매가 부르르 떨렸다.
율리안은 미동도 없이 새까만 눈을 깜빡이고 있었다.
“아니. 여전히 레베카야.”
율리안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울고 있는 레베카의 얼굴로 손을 뻗었다.
레베카는 다가오는 율리안의 눈동자에 비치는 자신을 보았다.
형편없이 겁에 질린 모습이었다.
그다음 이어지는 행동은 율리안이 스스로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행동이었다.
그의 머릿속엔 오로지 한 생각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그녀의 눈물을 멈추고 싶었다.
율리안은 천천히 레베카의 목덜미와 머리를 잡아끌었다.
이윽고 율리안의 입술이 떨리는 레베카의 입술과 맞닿았다.
레베카는 당황한 채로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그를 밀어내야 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냉철한 그녀의 이성은 곧이어 얽혀 들어오는 그의 진득한 입맞춤에 잠시 밀려났다.
‘어디서 이런 걸…….’
저도 모르게 온 신경이 입 안으로 집중되고 숨이 가빠오기 시작했다.
그와 맞닿는 감각 이외엔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레베카는 손을 뻗어 율리안의 목을 감싸 안았다. 저보다 훨씬 큰 키 때문에 목 뒤가 아려왔다.
율리안은 지칠 줄 모르고 난생처음 맛본 황홀한 입맞춤을 정신없이 탐했다.
하지만 전혀 거칠지 않았다. 오히려 어린 병아리를 어루만지듯 조심스러웠다.
그는 기울어진 고개를 다른 쪽으로 돌리면서 레베카의 허리를 잡아 제 쪽으로 바싹 붙였다.
두 사람의 농밀한 살덩이가 어둠 속에서 열렬히 뒤엉켰다.
뜨겁게 뛰는 그의 심장이 고스란히 레베카의 가슴으로 전해져왔다.
이 순간 레베카는 잠시나마 모든 걸 잊었다.
제플린도, 오벨리아가도, 흉측하게 변해버린 제 얼굴도, 그리고 복수까지도.
그녀의 머리를 끝없이 어지럽히던 생각의 굴레들이 멈춰 섰다.
마치 시간이 멈춰버린 세상에 둘만이 존재하는 것 같았다.
* * *
“그래, 잘된 거야…….”
제플린은 피곤한 얼굴로 의자에 기대었다.
밖에 세찬 소나기가 쏟아지고 있어 그의 기분을 한층 더 울적하게 만들었다.
발이 빠른 사냥개를 보냈으니 내일 오전에는 별문제 없이 서류가 전달될 것이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꺼림칙한 기분이 드는 걸까.
길게 숨을 들이셨다가 내쉰 제플린은 향초의 불꽃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천둥이 칠 것 같아 옥타비오가 피워둔 향초였다.
이 향초의 향을 맡으면 혼란했던 생각이 가라앉고 잠이 쏟아져 내렸다.
하지만 가끔 머리가 멍해지는 경향이 있어 그의 아버지가 금지령을 내렸던 향초이기도 했다.
제플린도 그리 즐겨 찾지는 않았지만, 레베카가 그 지경이 된 이후로는 이 향초 없이는 잠을 자지 못했다.
이게 없었더라면 자신은 미쳐버렸을지도 몰랐다.
우르르- 쾅-
등 뒤로 번쩍하고 번개가 치더니 커다란 천둥소리가 들려왔다.
제플린은 흠칫 몸을 떨며 활짝 열려 있는 커튼을 서둘러 닫았다.
그는 더듬거리며 축음기의 음악을 최대한 크게 틀었다.
음악을 저장한 마석이 빙글빙글 돌아가자 얇은 다이아몬드가 마석의 진동을 읽어냈다.
천둥소리를 지우려 일부러 평소 즐겨듣는 잔잔한 음악이 아닌 웅장한 곡을 틀었다.
오케스트라의 극적인 선율이 제플린의 고막을 두들겼다.
“한결 낫군.”
천둥이 치는 밤마다 그는 악몽을 꿨다.
처음으로 방에 갇혔던 날의 기억이 기괴한 형태로 왜곡되어 그를 밤새 괴롭혔다.
그의 아버지 자킴은 제플린이 제 마음에 들지 않는 행동을 할 때마다 그의 장난감을 모아둔 방으로 그를 데려갔다.
그리고 제플린의 눈앞에서 그가 소중히 여기는 장난감을 무참히 찢고 밟고 깨부쉈다.
‘똑똑히 봐! 나약한 인간은 아무것도 가질 자격이 없단 걸.’
한바탕 잔인한 난도질이 끝나면 자킴은 장난감의 잔해 속에 제플린을 가두었다.
밤새 소중한 것의 파편 속에서 어린 제플린은 울다 지쳐 잠들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문을 열고 그를 꺼내준 건 옥타비오였다.
‘도련님, 괜찮으십니까.’
옥타비오는 몸이 차가워진 채로 벌벌 떨고 있는 제플린을 따뜻한 목욕물에 씻기고 보송한 새 옷을 입힌 뒤 달콤한 간식을 먹여주었다.
그리고 시무룩하게 있는 그의 손에 새로운 장난감을 쥐여 주었다.
‘어차피 헌것들입니다. 버려진 것들보다 더 좋은 물건은 언제든지 구할 수 있습니다. 상심하지 마십시오.’
옥타비오의 말은 제플린에게 큰 위로였다.
그 덕분에 제플린은 자킴이 그를 가두어도 별다른 타격을 입지 않았다.
성장한 제플린은 방 안에 갇힌 시간 동안 찢어진 인형을 난도질하며 쾌감을 느꼈다.
옥타비오는 제플린에게 새로운 삶의 정의를 보여주었다.
옥타비오가 썩 좋은 사람은 아니란 걸 제플린은 알고 있었다.
옥타비오가 사냥개를 부릴 때는 그도 눈을 찌푸릴 만한 잔인한 구석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 하녀장 그레이스와 더불어 몇 안 되는 믿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옥타비오의 말을 떠올렸다.
‘어차피 새로 사면 돼.’
그래, 사람도 똑같다. 레베카도 똑같아.
제플린은 다짐하듯 중얼거리곤 이제 막 클라이맥스에 치닫는 음악을 지휘하듯 손을 휘둘렀다.
기분 좋은 허밍이 그의 입에서 절로 흘러나왔다.
잘 될 거야. 내 인생은 그렇게 계획됐어.
‘이혼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허를 찌르듯이 찾아온 기억에 제플린은 손을 멈추었다.
어제 참석한 국무 회의에서 율리안이 비릿하게 웃으며 그에게 했던 말이었다.
다들 묻고 싶어 입이 근질근질했지만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했던 화제의 물꼬를 율리안이 틀었다.
뒤이어 수많은 질문이 쏟아졌고, 제플린은 황제의 흥미로워하는 얼굴을 보다 결국 이혼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잘 되었군요. 애초에 인연이 아니었나 보죠.’
율리안의 감상평은 무례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그 자리에 모인 귀족 중 아무도 그의 무례를 짚고 넘어가는 사람이 없었다.
“아직도 고양이나 데리고 다니는 코흘리개 꼬맹이 주제에…….”
샛노란 눈을 빙글거리는 그의 옆에는 항상 검은 고양이들이 있었다.
신의 사자가 함께한다니 율리안 같은 애송이에겐 과분한 운명이었다.
황제의 앞에서도 세 마리의 고양이는 언제나 함께 동행했다.
유치하기 짝이 없는 모습인데도 그의 신성함을 더해준다며 칭송하는 꼴들에 더 배알이 뒤틀렸다.
제플린은 책상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책상 위에 쌓여 있던 서류 더미가 스르륵 하고 그의 앞으로 무너져내렸다.
그는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 올리다 멈추었다.
그의 앞으로 쏟아진 서류 중 하나가 그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제플린은 서류의 내용이 믿기지 않아 눈을 깜빡이며 서류를 집어 들었다.
채무 변제 영수증이었다.
그곳에는 데본셔가의 인장이 떡하니 찍혀 있었다.
“오벨리아가 빚을 다 갚았다고?”
전혀 기억에 없는 사실이다.
제플린은 황급히 관련 서류들을 더 뒤졌다.
날짜가 오늘자였다.
찢어지게 가난한 오벨리아가 오늘 한 번에 그 많은 돈을 다 갚은 것이다.
이자까지 남김없이 전부 다.
아마도 오늘 아침, 몽롱한 정신에 마구잡이로 도장을 찍었던 서류들 틈에 끼어 있었던 게 분명했다.
“대체…….”
캐서린이 오벨리아가에서 쫓겨났다고는 들었지만, 레베카가 없는 이상 딱히 감시할 의미가 없었다.
그래서 제플린은 오벨리아가에 또 다른 사냥개를 붙이지는 않았다.
어차피 오벨리아가는 갱생 가능성이 없었다.
최근 다나에가 부업을 해서 형편이 나아졌다고는 들었지만, 그 정도로는 빚을 갚기는커녕 이자도 제때 내지 못할 게 뻔했다.
그런데 무슨 수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