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
제플린은 점점 진해지는 향기가 거슬러 향초의 불을 서둘러 껐다.
소리 없이 죽어가는 불씨가 마지막 연기를 피워 올렸다.
제플린은 이마를 짚었다.
아까보다 정신이 조금 더 명료해졌다.
제플린은 흩어진 지난날의 퍼즐 조각을 떨리는 손으로 맞춰 보았다.
승전 연회 때 율리안과 춤을 추던 레베카, 자신과 밤을 보내야 했던 날 계단에서 구르던 레베카, 자신이 행복해 보이냐고 묻던 레베카, 미묘한 땀 냄새가 묻어나던 레베카, 그리고 고양이.
“검은 고양이!”
제플린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가 레베카에게 이혼을 통보하러 갔던 날, 그녀는 검은 고양이를 품에 안고 다정히 말을 걸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 전날 정원에서도 레베카의 품에 고양이가 있었다.
그건 율리안이 항상 데리고 다니던 검은 고양이와 똑같이 생긴 고양이였다.
그는 율리안의 근처에 있으면 항상 코가 간지럽거나 재채기가 났던 걸 기억해 냈다.
레베카의 몸에서 땀 냄새를 맡은 날도, 정원에서도, 그리고 레베카의 방에서도 그는 비슷한 증상을 겪었다.
“말도 안 돼.”
있을 수 없는 가정이 그의 머릿속을 헤집었다.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다리가 제멋대로 움직였다.
감이 좋지 않았다.
그의 팔뚝에 소름이 우두두 솟아올랐다.
내가 그녀를 버린 게 아니라, 그녀가 스스로 도망친 거라면? 그것도 다른 남자의 품으로 도망간 거라면?
서재의 문이 거칠게 열렸다.
지나가던 하녀가 깜짝 놀라 갑자기 튀어나온 제플린을 쳐다봤다.
제플린은 하녀의 어깨를 붙잡고 흔들었다.
“칸나! 칸나는 지금 어딨어?”
레베카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았던 칸나라면 뭔가 이상한 점을 알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레베카는 그녀에게 꽤 의지하는 모습을 보였으니.
하녀는 공포에 질린 얼굴로 더듬더듬 대답했다.
“그게, 오늘 아침부터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다. 짐도 모조리 사라졌고요. 하녀장께서 그것 때문에 노발대발하셨습니다.”
“뭐라고? 그걸 내가 왜 몰랐지?”
“무슨 일이십니까.”
옥타비오가 천천히 제플린 쪽으로 다가왔다.
제플린이 옥타비오에게 소리쳤다.
“칸나가 사라진 걸 왜 보고하지 않았지?”
“보고했습니다. 상관없다고 그냥 넘어가라 하셨지 않습니까. 요즘 기억이 예전 같지 않다 하시더니 잊어버리신 모양이군요. 푹 자고 일어나시면 다시 기억력이 좋아지실 겁니다. 예로부터 수면은 만병통치약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옥타비오는 활짝 웃으며 제플린을 슬그머니 침실 쪽으로 끌었다.
제플린은 그런 그의 팔을 거칠게 뿌리쳤다.
“이혼……. 이혼 서류는 어떻게 됐어?”
“그것도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오늘 오후에 보냈습니다. 내일이나 황궁에 도착할 줄 알았는데, 어찌 된 일인지 콜린이 이혼 확정 서류를 저녁에 가져왔더군요. 어느 친절한 신사가 마차에 태워 줬다고 그랬습니다. 그렇게 빠른 마차는 태어나서 처음 본다고…….”
“거짓말. 내게 말한 적 없어!”
제플린이 옥타비오의 멱살을 잡고 흔들었다.
‘아, 이제 조금 짜증 나려고 하는군.’
옥타비오가 불쾌한 기색을 드러냈다.
그가 자신의 멱살을 잡은 건 이걸로 두 번째였다.
레베카만 없어진다면 예전처럼 그를 마음껏 주무를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또 이렇게 제 심기를 건드리고 있다.
천둥이 저택을 흔들듯 거세게 쳤다.
“으악!”
제플린은 화들짝 발작을 일으키며 옥타비오의 멱살을 잡고 있던 손을 뗐다.
그는 벌벌 떨며 머리를 두 손으로 감싸고 자리에 주저앉았다.
처음 자킴이 그를 가둔 날, 오늘처럼 거센 천둥 번개가 쳤다.
그 이후로 제플린은 병적으로 천둥소리를 무서워했다.
옥타비오는 제플린을 한심하게 내려다보다 이윽고 그의 어깨를 부드럽게 잡았다.
“자, 여기서 이렇게 있지 마시고 안락한 침실로 돌아가셔야죠. 뜨거운 물에 목욕하고 달콤한 간식을 먹으면 한결 나아지실 겁니다.”
제플린은 대답 없이 떨었다.
옥타비오는 슬슬 인내심의 한계가 오고 있다는 걸 느끼며 머리를 쓸어올렸다.
그는 주변인에게 들리지 않게 나지막한 목소리로 제플린의 귀에 대고 빠르게 속삭였다.
항상 호선을 그리던 그의 실눈이 순간 크게 떠졌다.
“머저리처럼 계속 이러고 있을 거야? 네가 가진 다른 것들마저 부숴버리기 전에 얼른 네 자리로 돌아가.”
“레…….”
“뭐?”
“레베카를 보러 가야 해. 그녀를 되찾아 와야 해!”
“악!”
제플린이 순간적으로 고개를 쳐들고 일어나는 바람에 그의 머리가 옥타비오의 코를 강타했다.
옥타비오는 코를 싸매었다.
그리고 귀청을 찢을 정도로 커다란 천둥소리 한가운데 서 있는 제플린을 멍하니 바라봤다.
제플린은 레베카의 이름을 크게 부르짖으며 달려갔다.
“제플…….”
옥타비오는 황급히 계단 밑으로 내려가는 제플린의 목덜미를 잡기 위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일말의 간격으로 그의 손은 아무것도 잡지 못한 채 허공에서 허우적거렸다.
“말을 준비해!”
제플린이 현관으로 뛰어가며 소리쳤다.
소란에 이제 막 잠에서 깬 하인들은 처음 보는 광경에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그가 울고 있었다.
바늘로 수백 번을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올 것 같지 않던 제플린 데본셔가 전 백작 부인의 이름을 부르며 울부짖고 있었다.
제플린은 현관문을 열어젖혔다. 세찬 비가 저택 내부까지 흘러들어왔다.
하지만 그는 퍼붓는 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곧장 마구간으로 향했다.
잘 다려진 그의 바지에 흙탕물이 튀었지만 제플린은 개의치 않았다.
마구간 지기는 숙소에서 잠을 청하는지 마구간에는 아무도 없었다.
제플린은 그중에서 가장 빠른 흰색 말에 올라탔다.
단잠을 방해받은 말이 크게 울어 젖히며 앞발을 치켜들었다.
제플린은 날뛰는 말 위에서 잠시 주춤하다가 이내 능숙하게 말의 고삐를 잡고 말에 박차를 가했다.
투박한 말발굽 소리가 빗소리에 섞여들었다.
곧장 대문을 통과하는 그의 등 뒤로 번개가 번쩍하고 내리쳤다.
“백작님! 데본셔 백작님!”
뒤늦게 나온 그레이스가 제플린을 목 놓아 불렀지만 그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하인들이 분주하게 난리통을 수습했다.
알리시아는 굳은 얼굴로 밖으로 나가 붙박인 듯 서 있었다.
새로 맞춘 드레스가 속절없이 비에 젖어들어 갔다.
제플린이 예쁘다고 해주었던 그 옷이었다.
그녀의 두 뺨 위로 비인지 눈물인지 모를 물방울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다 허상이었다.
레베카의 자리에 자신이 설 수 있다는 기대는 다 헛된 기대일 뿐이었다.
그저 일상의 행복을 바랐을 뿐이다.
여느 귀족 부인처럼 자상한 남편과 사랑스런 아이를 바랐을 뿐이었다.
그런데 제까짓 것한테는 그런 소원마저 사치였나 보다.
사나운 빗줄기에 눈을 제대로 뜨기 힘들 지경이었지만 알리시아는 제플린이 사라진 방향을 오랫동안 노려봤다.
옥타비오가 혀를 차며 그녀에게 우산을 씌어 주었다.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는데. 이번 장난감에는 애착이 상당히 큰가 보군. 설마 레베카와 다시 합칠 셈은 아니겠지.”
그의 말에 알리시아는 주먹을 꽉 쥐었다.
“옥타비오.”
옥타비오가 의문 어린 얼굴로 알리시아를 내려다봤다.
“새로운 레베카를 찾는다고 들었어요.”
그가 흠칫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알리시아는 일말의 표정 변화도 없이 조용히 읊조렸다.
“저번에 소개해주었던 암시장의 상인을 다시 만나게 해주세요.”
“어렵지는 않다만, 이유가 뭐지?”
“내가…… 내가 레베카가 될게요. 그가 인형을 잃어버린 걸 확인하고 돌아왔을 때 그를 위로할 새로운 인형이 되겠어요.”
알리시아는 입꼬릴 지나치게 틀어 올렸다. 여전히 그녀의 눈에서 물방울이 쏟아지고 있었기에 기괴한 표정이었다.
그녀는 울고 있었지만 웃고 있었다.
옥타비오는 잠시 알리시아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 또한 제플린이 사라진 방향으로 시선을 들어 올렸다.
“두고 보지.”
* * *
제플린은 곧장 자신의 영지 안에 있는 오벨리아의 저택으로 향했다.
그의 머릿속엔 단 한 가지 생각밖에 없었다.
레베카를 만나야만 했다.
그녀를 회유하든 억지로 끌고 오든 제 옆에 앉혀야 했다.
이제 레베카의 얼굴이 어떻게 변해 있든 상관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것이었다. 망가지더라도 제 손아귀에서 망가져야만 했다.
오벨리아 저택의 대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제플린은 대문을 통과하고 엉망으로 변한 정원을 지나 저택 앞에 섰다.
저택엔 불이 꺼져 있었다.
야심한 시각이니 당연하기도 했지만 어쩐지 간담이 서늘했다. 사람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제플린은 말에서 내려 현관문을 두드렸다.
형편없이 젖은 셔츠가 그의 맨살에 달라붙었다.
그의 바지는 진흙이 엉켜 있어 아주 엉망이었다. 누굴 만날 꼴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반쯤 이성이 나간 상태였다.
머리칼 한 올 삐져나오는 것조차 용납하지 않던 그 제플린 데본셔는 잠시 사라졌다.
“레베카! 테오 오벨리아! 다나에 오벨리아!”
아무런 대답이 들려오지 않자 제플린은 문고리를 거칠게 돌렸다.
잠겨 있는 문이 곧 부서질 정도로 흔들렸다.
“거, 뉘슈!”
얼마큼 그러고 있었을까.
투덜거리는 소리와 함께 웬 노인이 문을 열고 나왔다.
제플린은 대뜸 그의 팔을 붙들고 소리쳤다.
“레베카! 레베카 어딨어?”
“무, 무슨 짓입니까!”
“레베카 오벨리아 여기 없어?”
“오벨리아? 아아, 그분들은 일찌감치 이사 가시고, 이곳은 오늘 아침에 소유주가 바뀌었습니다.”
“뭐라고? 그럼 어디로 갔는지 말해!”
“아! 내가 어찌 압니까! 난 일개 관리인일 뿐인 걸. 거 술을 많이 마셨나 본데, 취할 거면 곱게 취하십쇼!”
“하…….”
제플린은 힘없이 손을 떨구었다.
그의 갈 곳 잃은 눈동자가 공허하게 바닥을 훑었다.
어째서 이런 일이 일어난 걸까.
관리인이 그를 딱하게 쳐다봤다.
“무슨 사정인지는 모르겠다만, 오늘 묵을 곳이 없다면 하룻밤 정도는 재워 줄 수는 있습니다. 공작님께서 당분간 재량껏 여길 관리하라고 하셨거든요.”
“공작?”
공허하던 그의 눈에 돌연 이채가 돌았다.
“예. 요하네스 공작님이요. 그분이 이곳을 사들이셨습니다.”
“요하네스…….”
제플린은 그의 벽안을 하염없이 깜빡였다.
“하……. 하, 그렇게……. 그렇게 된 거로군.”
제플린은 실소를 내뱉었다.
그의 눈이 광기로 번득였다.
관리인의 떨리는 눈과 그의 눈이 마주쳤다.
“그렇게…… 그렇게 된 거였어! 율리안 요하네스 그자가 내 레베카를 훔쳐 간 거야!”
“뭐…… 뭐라고요?”
“그래. 레베카가, 나의 레베카가 나를 떠날 리가 없지. 이게 다 율리안 그 새끼가 계획한 간계야. 그러면 모든 게 맞아떨어져. 신전을 쥐락펴락하는 인간이니 레베카를 성녀로 둔갑시키는 건 일도 아니었겠지.”
제플린은 제 두 손을 바라보고 크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