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
“맞아. 모든 게 율리안…… 율리안 때문이야. 내 손에서 그녀가 빠져나간 건. 그녀가 내게 그런 표정을 지었던 건. 율리안 그자가 방해했기 때문에…….”
“이…… 이보시오.”
관리인은 제플린을 불렀다가 그와 눈이 다시금 마주치자 흠칫 놀라며 뒷걸음질 쳤다.
그의 얼굴엔 살기가 명백한 위험한 기운이 흐르고 있었다.
관리인은 옅은 바다처럼 푸르른 두 눈이 일순간 피로 물든 것 같은 환영을 보았다.
“죽여야지? 죽여버리겠어. 율리안 요하네스.”
그 말만 남기고 제플린은 서둘러 말에 올라탔다.
천둥이 그의 고막을 때렸지만 제플린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 * *
“하아……. 하아…….”
뜨거운 열기로 가득 찬 방 안에서 레베카와 율리안은 겨우 서로에게서 벗어났다.
둘은 말없이 바닥을 내려다봤다.
차츰 되돌아오기 시작한 이성이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파악하려 진땀을 빼고 있었다.
먼저 깨달은 건 율리안이었다.
율리안의 얼굴이 순식간에 화르륵 타올랐다.
그는 거의 자줏빛이 되어가는 자신의 얼굴을 붙잡고 입을 떡 하니 벌렸다.
“바, 방금…….”
그의 반응에 레베카도 정신을 차렸다.
결국 일을 냈구나.
언젠가 이런 일이 생길 것을 예상하지 못했던 건 아니었다.
다만 그 시기가 이를 뿐이었다.
계약 결혼을 해 부부가 되면 당연히 한 방에서 한 침대를 쓰게 될 것이었다.
그 기간 동안 혈기 왕성한 청년이 무슨 짓을 벌일 것이라는 건 자명했다.
하지만 자신이 휩쓸릴 줄은 몰랐다.
제가 거절만 했더라면 율리안은 그만두었을 텐데. 레베카는 그러지 않았다.
‘왜…….’
레베카는 그 이유를 나약해진 자신의 정신 상태로 돌렸다.
율리안의 반응을 너무 걱정한 나머지, 그의 긍정적인 반응에 그만 몸을 맡겨 버린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기로 하니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그래, 이건 순간 분위기에 휩쓸린 치기에 불과했다.
두 번 다시 이런 낭패를 보지 않도록 조심하면 괜찮다 여겼다.
레베카는 율리안의 어깨에 손을 얹고 토닥거렸다.
“그래. 우리 방금 키스했어.”
율리안의 얼굴은 이제 터지기 직전이었다.
그는 한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다른 한 손으로 레베카를 밀쳐냈다.
“그런 말을 어떻게 아무렇지 않게 해?”
“뭐, 이미 일어난 일이고, 서로 감성적이었으니 어쩔 수 없었지 뭐. 설마 이걸로 계약을 파기하려 드는 건 아니겠지?”
레베카가 짐짓 인상을 찌푸리자 율리안은 발끈했다.
감히 제 첫 키스를 가져간 여자가 내뱉는 말은 놀랍도록 뻔뻔했다.
아니, 내가 먼저 하기는 했지만…….
몇 분 전의 장면이 다시 떠오르자 율리안의 얼굴이 다시 폭발하듯 달아올랐다.
그의 눈동자도 무르익은 밀밭처럼 진한 황금빛을 분출하고 있었다.
그런 그의 반응이 재밌어서 레베카는 문득 짓궂어지고 싶었다.
그동안 허락도 없이 들이닥쳐 그녀를 당황하게 만든 걸 조금 갚아 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설마, 지금 먼저 입 맞춰 놓고 부끄러워하는 거야?”
레베카는 일부러 그의 눈앞에 얼굴을 바싹 가져다 댔다.
이제 그에게 말려들 일이 없으니 혹여나 아까와 같은 불상사가 일어난다 해도 피하면 그만이었다.
자신이 생긴 레베카는 저돌적으로 율리안에게 다가갔다.
“무, 무슨……!”
그는 레베카의 시선을 요리조리 피했다.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레베카도 집요하게 그를 따라다녔다.
그녀와 눈을 마주칠수록 율리안의 얼굴이 더욱더 뜨거워졌다.
둘의 치열한 공방은 율리안이 창틀에 몸을 기대고서야 끝났다.
레베카의 손가락이 율리안의 허리 부근을 지분거렸다.
“그쪽이 먼저 시작해 놓고 부끄러워하면 어떡하나. 응? 공작님, 어떻게 책임지실 거죠?”
“당신, 이런 사람이었어?”
“이런 사람이 뭔데?”
레베카는 몸을 가볍게 그에게 밀착시켰다.
입술이 다시 다가오자 율리안은 질색하며 그녀를 밀쳤다.
“그만해!”
“알았어. 미안.”
이제 장난은 그만하겠다는 표시로 레베카는 두 손을 들고 조금 뒤로 물러났다.
율리안은 농락당했다는 굴욕감과 방금 일어난 일에 대한 흥분감, 그리고 짓궂게 구는 레베카를 미워할 수 없다는 사실에 제정신이 아니었다.
“하! 당신, 정말…….”
“미안하다고 하잖아. 응? 율리안?”
레베카는 다시 그에게 얼굴을 바짝 들이밀었다.
그의 몸은 뜨거웠다. 아니, 자신도 뜨거웠다.
둘 사이에 퍼진 열기는 창문을 뚫고 들어온 차가운 빗줄기가 식혀줄 만한 것이 아니었다.
“이런. 다 젖어 버렸네.”
레베카는 내내 창틀에 아슬아슬하게 걸쳐 있던 율리안을 똑바로 세우고는 눈을 예쁘게 접어 보였다.
율리안은 멍하니 레베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가 고개를 다시금 레베카에게 숙이려는 찰나, 밑에서 커다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베키! 공작님 모시고 내려오렴. 식사 준비 다 되었다!”
율리안은 화들짝 놀라며 레베카에게 기울었던 몸을 똑바로 세웠다.
그는 원망하는 눈길로 레베카를 바라보았다.
“대체 내게 무슨 짓을 한 거야!”
레베카는 짐짓 무구한 척 대답했다.
“내가 무슨 짓을 했다고 그래.”
“무슨 짓을 하지 않고서야 내가 왜 당신에게…….”
그 뒷말을 차마 할 수 없다는 듯 율리안은 제 손으로 입을 막았다.
레베카는 이제 그만 골리기로 하고 율리안을 다독였다.
“그러지 말고 같이 내려가자. 우리 아버지 꽤 요리 실력이 좋으셔.”
“급한 일이 생겼다고 전해줘.”
“뭐? 잠시만…… 꺄악! 율리안!”
레베카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창문 밑을 내려다봤다.
별안간 율리안이 창문에서 뛰어내렸다.
유리창이 있었더라면 와장창 창을 깨트릴 정도의 기세였다.
이층이라고는 하지만 웬만한 사람이라면 어디 하나 부러질 만한 높이였다.
하지만 율리안은 웬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고양이처럼 안전하게 흙탕물 위에 착지하더니 집 안에다 대고 소리쳤다.
“말을 잠시 빌려 가겠습니다!”
무어라 대답이 들려오기도 전에 율리안은 제 머리색만큼이나 검은 털을 가진 말의 고삐를 잡고 마구간에서 나왔다.
말은 거세게 반항했지만 율리안이 귀에 무어라 속삭이자 이내 잠잠해졌다.
율리안은 얌전해진 말에 올라타 들판을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그는 드세게 쏟아지는 빗줄기에 귀까지 달아오른 몸을 내맡겼다.
레베카는 입을 살짝 벌린 채로 그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멍하니 서 있었다.
그가 육안으로 확인하기 힘들 정도로 멀어지자, 레베카는 조용히 벽을 타고 미끄러져 내렸다.
뒤늦게 부끄러움이 몰려왔다.
레베카는 불그스레한 뺨에 양손을 가져다 댔다.
그녀는 제가 당황하면 오히려 상대방을 놀리는 사람인지 오늘 처음 알았다.
레베카는 자신이 거침없이 했던 행동을 떠올리며 발을 동동 굴렸다.
‘이래서야 희롱하는 주정뱅이 같잖아!’
레베카는 벽에 머리를 기대고 한숨을 내쉬었다. 어이가 없었다.
율리안이 저를 어떻게 생각할지 뻔해서 끔찍한 기분이 들었다.
‘일 년은 이불을 차겠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레베카는 아직 여운이 남아 있는 입술을 만지작거렸다.
며칠 동안 그를 밀어낸 것이 허무하게도 율리안은 거리낌 없이 그녀를 안았고, 그녀에게 입을 맞췄다.
오히려 그는 세상 무엇보다 아름다운 것을 보는 것같이 자신을 바라봤다.
그의 눈에는 자신을 향한 열망이 담겨 있었다.
혹여나 제 몸에서 악취가 사라졌나 싶어 레베카는 팔뚝을 들어 냄새를 맡아봤다.
아니었다. 아무것도 변한 게 없었다.
변한 게 있다면…….
‘아니. 여전히 레베카야.’
레베카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대 앞에 앉았다.
거울 속에 장밋빛으로 뺨을 붉히고 있는 여자가 보였다.
어쩐지 이전만큼 저 여자가 끔찍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서늘한 예감이 레베카의 가슴 한켠에 자리를 잡았다.
“안 돼…….”
레베카는 왼쪽 가슴께의 레이스를 손에 꽉 쥐었다.
불안한 그녀의 손 떨림과 달리 그녀의 눈은 희망으로 빛났다.
천둥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축포가 터지는 듯했다.
* * *
“거 무지막지하게 퍼붓는구만.”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은 하늘을 보고 있던 보초병 퍼거슨이 투덜거리며 돌벽에 머리를 기대었다.
이렇게 비 오는 날에 근무를 서는 건 영 별로였다.
습기로 갑옷 안이 축축해져서 불쾌한 것도 있거니와, 비가 오는 날에는 미친 사람이 필연적으로 출몰하고는 했기 때문이었다.
비에 무슨 광기를 증폭시키는 약이라도 탔는지, 하루도 허투루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
지난번에는 나체로 성문을 통과하려던 사람을 저지하느라 진땀을 뺐다.
퍼거슨은 남자의 나체를 떠올리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기분이 나빠졌다.
그래도 다행스럽게 아직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게다가 지금 이 시간은 사람의 왕래가 거의 없는 시간대라 성벽 위에는 자신과 신참 보초 찰스 둘뿐이었다.
나머지는 인원은 교대 시간 전까지 조금 떨어진 숙소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퍼거슨은 이대로 평화롭게 시간이 흘러 자신도 얼른 푹신한 침대에 몸을 누이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찰스가 나른하게 하품을 하며 말했다.
“흐아암. 오늘은 다행히도 한가하네요. 비 오는 날엔 바싹 긴장하라고 해서 걱정했는데.”
그의 말에 퍼거슨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찰스의 입을 막았다.
“야! 한가하다는 말, 금기인 거 몰라? 그런 말을 하면 꼭…….”
그의 우려가 시작되기 무섭게 찰스가 손을 쳐들었다.
“어어……. 저기 누가 옵니다?”
“뭐라고? 이런 젠장.”
퍼거슨은 망원경을 들어 찰스가 가리키는 방향을 쳐다봤다.
웬 사내가 비에 쫄딱 젖은 채로 흰 말을 타고 달려오고 있었다.
“이 빗속에서 달려오는 속도로 봐서는 단단히 미친놈 같은데. 야, 자리 지켜!”
찰스가 투덜거리며 제자리로 돌아갔다.
퍼거슨은 미친놈이 성벽에 도달하기 전에 소리를 증폭시켜주는 마석에 대고 소리쳤다.
“신분을 밝히십시오! 여기서부터는 요하네스 공작령입니다!”
다행히 완전히 말이 통하지 않는 이는 아닌 듯싶었다.
퍼붓는 비에 눈을 겨우 뜨고 있는 사내는 말을 멈춰 세우고 크게 외쳤다.
“나는 제플린 데본셔 백작이다! 당장 율리안 요하네스를 봐야겠으니 길을 터라!”
“뭐라고?”
감히 공작님의 이름을 마구 불러대는 그의 건방진 말투에 퍼거슨의 눈썹이 씰룩거렸다.
그는 조금 날이 선 말투로 말했다.
“그럼 신분패를 제시하십시오!”
“그런 건 없다!”
“허, 이놈 봐라.”
어쩐지 오늘은 잠잠히 지나간다고 했다.
당당히 신분패 따윈 없다고 외치는 그의 태도에 퍼거슨은 머리를 싸맸다.
“그럼 돌아가서 신분패를 가지고 다시 오십시오!”
“그럴 시간 없어! 내가 문을 열라고 했잖아! 당장 문 열어!”
“와. 진짜 선배님 말씀대로 단단히 미친놈 같은데요?”
“이 새끼가. 지금 감탄할 때야?”
난감한 상황이었다.
저 치의 눈빛을 봐서 순순히 물러날 것 같지 않아 보였다.
오늘 밤도 고단하겠구나 직감하며 퍼거슨은 한숨을 짧게 내쉬었다.
그때 찰스가 그의 팔을 톡톡 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