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
“왜?”
“여기에 저자가 본인이라 주장하는 이름이 적혀 있습니다.”
“뭐라고?”
퍼거슨은 벽에 붙은 블랙리스트를 바라봤다.
성 안으로 절대 들여서는 안 되는 인물들의 인상착의 목록이었다.
얼마 전에 새로 추가한 듯 선명한 잉크로 제플린 데본셔 백작의 몽타주가 그려져 있었다.
빨간 글씨로 강조까지 한 것을 보아 들여보냈다간 경을 칠 것이 분명한 인물이었다.
퍼거슨은 몽타주와 제플린을 번갈아 쳐다봤다.
비 때문에 이목구비를 알아보긴 힘들었지만 얼핏 비슷한 것 같기도 했다.
“성문을 열어! 당장!”
아직도 제플린은 밑에서 목에 핏대를 세우고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정말 귀족 나리라면 곤란했다. 성문을 열지 않았다고 보복을 받는 일이 심심찮게 있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율리안이 배는 더 갚아 주었으니 큰 걱정은 없었다.
이럴 땐 공작의 병사인 게 든든했다.
퍼거슨은 한결 사근사근한 태도로 그에게 말했다.
“흠흠. 유감스럽지만, 백작님이셔도 들어오시지 못합니다. 설령 그게 황제 폐하의 명이라도 말이지요.”
“뭐라고?”
“여기 보십시오. 제플린 데본셔 백작은 절대 성 안으로 들여보내지 말라는 공작님의 명령이 있었습니다.”
보초병은 종이를 팔랑팔랑 흔들어 보였다.
‘이 빌어먹을 자식이…….’
제플린은 이를 아득 깨물었다.
보초병의 말이 맞았다.
제국에서 자치령을 가지고 있는 세력은 두 명의 공작과 신전, 이렇게 셋뿐이었다.
북부의 변경을 지키는 라트라니스 공작과 제국의 상징과도 같은 요하네스 공작, 그리고 신전 소유의 영토를 제외한 땅들은 모두 황제의 통치권 아래에 있었다.
편의상 백작령, 남작령 등으로 부르며 그 지역에 가장 많은 영토를 가진 귀족에게 관리권을 주기는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관리인 차원에서의 권력일 뿐이었다.
귀족은 황제의 칙령에 배반한 어떤 행위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자치령 안에서 두 공작과 신전은 황제의 명령을 거절할 명분이 있었다.
그러니 율리안이 제 땅에 제플린을 들이지 않기로 결정했으면 그가 허락하기 전까진 공작령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런 제약 따위가 지금의 제플린을 막을 수는 없었다.
일단 저 안으로 들어가야만 했다.
들어가서 납치당한 레베카를 찾아야 재판을 하든지 그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었다.
“뭐야. 조용해졌네? 이제 그만 돌아가려나?”
퍼거슨이 고개를 빼꼼 내밀고 제플린을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그건 그의 잠시간의 착각이었다.
“어……. 어!”
찰스는 경악에 찬 소리를 질렀다.
제플린이 그대로 말을 몰아 성문으로 돌진했다.
“야, 이 미친…….”
쿵! 하는 육중한 소리와 함께 성문이 잠시 흔들렸다. 고통에 찬 말의 울부짖음이 들려왔다.
흰 말이 거품을 물며 옆으로 쓰러졌다.
제플린은 쓰러진 말에 발길질을 했다.
“이 쓸모없는 게!”
퍼거슨과 찰스는 멍하니 지금 사태를 바라보았다.
그가 돌로 만든 성문에 맨몸으로 돌진하리라곤 예상하지 못했던 탓이었다.
“열어! 당장 열어! 레베카! 레베카!”
제플린은 주먹으로 성문을 내리쳤다. 성문이 열릴 리가 없는 데도 그는 손이 피범벅이 될 정도로 내리쳤다.
얼마나 내리쳤을까.
손이 말을 듣지 않자 이제 그는 머리로 성문을 찍기 시작했다.
그 둔탁한 소리에 정신을 차린 퍼거슨이 외쳤다.
“그만두십시오! 셋 셀 동안 멈추지 않으면 발포하겠습니다!”
“닥쳐! 이 문이나 열어!”
제플린의 하얀 셔츠는 어느새 검붉은 피로 물들고 있었다.
피와 빗물, 그리고 눈물이 한데 뒤섞여 그의 몸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는 흐느끼며 계속해서 머리로 성문을 내리쳤다.
“레베카……. 나의 레베카…….”
“하나! 둘!…….”
찰스가 총으로 제플린을 겨냥한 채 떨어질 명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팔이 긴장으로 뻣뻣하게 굳었다.
어쨌든 그는 귀족이었으니 최대한 목숨에 지장이 가지 않게 쏴야 했다.
그때였다.
퍼거슨이 마지막 셋을 세기 전에, 저 멀리서 기사 한 명이 말을 타고 다급하게 뛰어왔다.
“멈추십시오!”
퍼거슨은 움찔하고 숫자 세기를 멈추었다.
베이츠가 다급하게 말에서 내려 보초병에게 소리쳤다. 그는 빗물에 젖어 시야를 가리는 제 금발을 쓸어올리며 말했다.
“이분은 데본셔 백작이십니다! 저희가 데려가겠으니 발포를 멈추십시오!”
“뭐, 모셔가겠다면야…….”
퍼거슨과 찰스는 눈빛을 주고받았다.
찰스가 총을 거둔 것을 확인한 베이츠는 서둘러 제플린을 뜯어말렸다.
“백작님. 백작님. 정신 차리십시오.”
“이거 놔! 레베카를 보러 가야 한다. 내 잃어버린 레베카를 되찾으러 가야 해.”
제플린에게 이제 이성 따윈 없는 듯 보였다.
베이츠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숙였다.
“그렇다면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그는 제플린의 목 뒤를 손날로 내리쳤다.
단말의 신음도 없이 제플린은 정신을 잃고 바닥에 고꾸라졌다.
“어, 저기 또 뭐가 오는데요?”
“하아……. 이번에 또 뭐야?”
찰스의 말에 퍼거슨이 고개를 들었다.
한눈에 봐도 고급스러운 하얀 마차 두 대가 유유히 이쪽을 향해오고 있었다.
대체 이 야밤에 손님이 왜 이렇게 많은지 모를 일이다.
마차가 멈춰서자 하인이 내려 커다란 검은 우산을 치켜들었다.
잔뜩 인상을 찌푸린 옥타비오가 우산 아래에 섰다.
그는 비 아래에 처참한 몰골로 쓰러져 있는 제플린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미련한 것.”
옥타비오는 혀를 한 번 쯧 차고는 베이츠에게 고갯짓했다.
베이츠는 제플린을 들쳐 엎고, 옥타비오가 타고 온 마차가 아닌 다른 마차에 제플린을 조심스럽게 뉘였다.
마차 안에 대기하고 있던 주치의가 제플린의 상태를 살폈다.
그는 백작저로 가는 내내 몽롱한 의식 사이로 레베카의 이름을 계속해서 불러댔다.
한바탕 폭풍우가 지나갔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다음 날 아침은 평화로웠다.
맑게 갠 하늘이 더없이 높고 청량했다.
아침 일찍 일어난 레베카는 잠시 산책할 요량으로 밖으로 나왔다.
문을 나선 그녀가 기지개를 켜며 푸른 하늘을 바라보았다.
크게 숨을 들이마시자 깨끗한 아침 공기가 폐부를 가득 채웠다.
레베카는 대문을 넘어 들판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아직 마르지 않은 축축한 흙이 질척하게 신발에 엉겨 붙었다.
레베카는 서둘러 치맛단을 올려 묶었다.
그리고 신발을 고이 벗어 들고 부드러운 진흙에 맨발을 디뎠다.
보드라운 촉감에 절로 웃음이 나왔다.
누군가는 더럽다고 손가락질할 수도 있었지만 발 사이로 새어 나오는 진흙에선 자유의 냄새가 났다.
즐거운 마음으로 여러 번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던 레베카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허리춤까지 제멋대로 자란 풀이 싱그러워 보여 저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손가락이 풀을 스칠 때마다 이슬이 후드득 떨어져 내렸다.
멀리서 바람이 불어왔다.
들판이 노래하기 시작했다.
레베카는 바람의 음색을 따라 부드럽게 허밍하며 언덕의 꼭대기로 향했다.
아주 높은 언덕은 아니었지만 공작령을 내려다보기엔 충분했다.
저 멀리 해안 도시 몽푀르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몽푀르 너머로는 울창한 숲과 광활한 들판이 이어져 있었다.
각종 동식물이 어우러져 사는 풍요로운 숲과 비옥한 땅을 지나면 험난한 산악지대가 펼쳐졌다.
그리고 그곳엔 각종 보석으로 유명한 광산지대가 있을 터였다.
요하네스 공작령은 여러모로 자원이 풍부한 곳이었다. 신전과 황제가 호시탐탐 노릴 만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섣불리 요하네스 공작령을 침범하지는 않았다.
신의 가호를 받는 가문을 함부로 건드렸을 때의 후폭풍은 무서운 것이었다.
필연이든 우연이든 지난 역사 동안 요하네스 공작을 적대한 세력의 결말은 언제나 처참했다.
신은 잔혹하리만치 요하네스 공작가를 아꼈다.
요하네스 공작가의 존재 자체가 곧 데프리아의 힘을 보여주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었다.
데프리아의 신앙의 중심에는 언제나 요하네스가 있었다.
요하네스 공작가가 없었더라면 데프리아교가 여기까지 올라올 수도 없었다.
레베카는 율리안이 손에 거머쥔 것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가히 신의 축복을 받은 땅이라 칭하는 게 마땅할 정도로 찬란했다.
하지만 율리안을 억죄고 있는 운명의 굴레는 저 눈부신 것들을 포기할 만큼 끔찍한 것이었다.
가슴 한편이 아려왔다.
미간을 모으던 레베카의 시선이 천천히 언덕 밑으로 향했다.
한 쌍의 여자와 남자가 이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언덕 위에는 오벨리아 저택밖에 없었기에 그들의 손님일 게 분명했다.
순간 레베카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제플린의 사냥개일까.
자신을 찾아내어 끌고 가려고 온 것일까.
겁이 났다. 제플린이라면 능히 자신을 납치할 수도 있었다.
이곳은 찾는 사람이라곤 간간이 나무 열매 따위를 주우러 오는 주민들이 전부였다.
그마저도 거의 없어 인적이 드문 곳이었다.
오벨리아 저택에서도 꽤 멀었다. 자신이 비명을 지른다 해도 아무도 듣지 못할 게 분명했다.
‘그렇게 된다면…….’
레베카는 끔찍한 상상을 이어갔다.
하지만 곧 그녀의 걱정은 이윽고 들려오는 울음 섞인 외침 속에 묻혀들었다.
“레베카 님!”
칸나였다. 칸나와 로버트가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칸나는 양손에 들고 있던 짐가방을 바닥에 급히 내팽개쳤다.
그리고 레베카를 향해 달려오기 시작했다.
레베카도 신발을 주워들고 정신없이 칸나에게 달려갔다.
미끄러운 진흙에 몇 번이고 비틀거렸지만 레베카는 멈추지 않았다.
드디어 칸나와 마주한 레베카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어올랐다.
레베카가 환한 얼굴로 칸나의 이름을 불렀다.
“칸나!”
칸나는 이제 참지 못하겠다는 듯 다짜고짜 레베카를 끌어안았다.
“이제 더 이상…… 더 이상 헤어지지 않겠다는 약속 꼭 지켜주십시오.”
레베카의 등을 감싼 칸나의 손이 형편없이 떨리고 있었다.
쥐어짜듯이 레베카를 껴안은 그녀의 포옹이 무척이나 거셌다.
칸나의 거센 포옹은 레베카와 헤어져 있는 시간 동안 그녀가 시달렸을 괴로움을 대변하는 듯했다.
“칸나, 그러다가 레베카 님이 부서져 버리겠어.”
로버트가 서글하게 웃으며 뒤를 따라왔다.
“로버트…….”
레베카는 먹먹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상처투성이인 얼굴이었지만 그래도 그는 살아 있었다.
일전에 율리안이 구해다 준 흡혈 식물에서 유스타프가 마비 독을 찾아냈다.
흡혈 식물은 사로잡은 먹잇감에 마비 독을 주입했다.
마비 독이 온몸으로 퍼진 먹잇감은 몇 시간 동안 죽지도 살지도 않은 상태가 되었다.
그렇게 흡혈 식물은 정신을 잃은 먹잇감의 신선한 피를 오랫동안 천천히 음미하며 빨아들였다.
율리안은 유스타프의 보고서를 흥미롭게 읽었다.
그는 유스타프에게 이 마비 독을 이용해 거짓 죽음을 꾸며낼 만한 약을 만들라고 지시했다.
이 독을 이용한다면 정보원이 들켰을 때 자결하지 않아도 됐기에 희생을 최소화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