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
이러한 마비 독의 효능을 율리안에게 들은 레베카는 마비 독을 첨가한 담배를 제작해 달라고 부탁했다.
덕분에 평소 골초였던 로버트가 제플린의 의심을 사지 않고 무사히 마비 독을 마실 수 있었다.
물론 위험한 일이었다.
제플린의 수하들이 독에 마비된 로버트를 화장하거나 생매장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 계획의 뒤에는 율리안이 있었다.
율리안은 적절한 순간에 로버트를 빼내어 그를 공작 성에 숨겨두었다.
‘또 빚을 졌다.’
레베카는 제게 성긴 웃음을 보이는 로버트를 바라보았다.
로버트도 이제 칸나처럼 레베카에게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인연이 되었다.
율리안이 없었더라면 자신도 로버트도 백작저를 벗어나 자유롭게 웃을 수 없었을 것이었다.
그러니 더더욱 율리안의 저주를 확실하게 풀어줘야 했다.
레베카는 결국 어제 그와 있었던 일을 깊은 곳에 묻어두기로 했다.
“이렇게 얼굴을 뵈었으니 저는 바로 떠날까 합니다.”
로버트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레베카가 아쉬운 듯 입을 벙긋거리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가족을 찾으러 가시는 거겠죠.”
“예. 꼭 찾아내겠습니다. 제 손에 묻힌 피보다 더 많은 사람을 구해내겠습니다.”
오랜 세월의 후회와 통탄은 훌륭한 장작이 되어 로버트의 결의를 불태우고 있었다.
그의 검은색 옷자락이 어쩐지 햇살만큼 눈부시게 빛나는 것 같았다.
로버트는 곧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 길을 떠났다.
레베카는 순례자처럼 묵묵히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을 잠시간 눈에 담아두었다.
그리고 로버트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쯤 칸나에게 시선을 돌렸다.
“칸나, 같이 집으로 가자. 우리 가족도 널 보면 반길 거야.”
칸나는 눈에 띄게 좋아진 레베카의 안색과 그녀의 맨발에 묻은 진흙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레베카가 저 멀리 보이는 자그마한 저택을 향해 손가락을 뻗었다.
“저길 봐. 저기가 우리 집이야.”
우리 집.
그 말을 읊조리는 레베카의 얼굴이 무척이나 밝았다.
칸나는 저도 모르게 그녀를 따라 환하게 웃었다.
* * *
한편, 제플린 데본셔는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심연으로 낙하하는 그의 눈앞으로 무수한 기억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가 기억의 편린을 향해 손을 뻗자 기억은 어느새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
기억은 그에게 다가오지 않았다. 잡히지도 않았다.
그저 묵묵히 그에게 자신을 보여줄 뿐이었다.
새하얀 눈밭에서 그보다 더 환한 미소를 짓는 어떤 소녀를.
붙박인 듯 소녀에게 시선을 돌릴 수 없는 제플린을.
구혼자들에게 둘러싸인 그녀에게 당당히 춤을 신청하자 붉게 물들던 그녀의 뺨을.
이윽고 이어지는 그녀와 제플린의 첫 춤을. 그녀의 황홀한 체취를.
처음 만난 그날처럼 하얀 눈이 내린 날에 했던 청혼을.
누구보다 화려했던 결혼식을.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처럼 아름다웠던 그의 사랑, 그의 신부를 제플린의 눈앞에 흩뿌려 놓았다.
그의 기억은 온통 한 여자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여자의 얼굴은 안개가 낀 듯 흐릿하게 보였다.
분명히 그녀와 눈을 마주치고 웃고 있는데도 그녀의 얼굴을 도무지 떠올릴 수 없었다.
하지만 제 마음이 이토록 저릿하고 애틋한 걸 보아 제플린은 그녀가 자신의 연인임을 알았다.
이목구비를 정확히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깊은 바다처럼 짙은 푸른색의 눈과 가을의 햇살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 같은 금빛의 머리칼은 똑똑하게 기억이 났다.
제플린은 손을 뻗었다.
그녀가 자신을 이 나락에서 구원해주길.
아득히 멀어져가는,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 제 연인에게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야속하게도 그의 손이 닿자 그녀는 수증기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의미를 알 수 없는 차가운 미소를 잔상처럼 남긴 채 그녀는 제플린을 이 지옥 속에 남겨두고 떠나버렸다.
그녀가 떠난 자리에 어둠이 피어났다. 그리고 어둠은 그를 삼키기 시작했다.
어둠은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탐욕스럽게 그를 혀로 핥으며 그의 몸을 점점 옥죄었다.
이윽고 어둠이 거대한 똬리를 틀어 제플린을 압박했다.
숨이 막혔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여기서 날 꺼내줘. 나를 구원해줘.’
그는 창공에서 저를 내려다보는 여자에게 애원했으나 그녀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에게 등을 보인 채로 허공에서 그녀가 그에게 속삭였다.
‘후회해?’
“허억…… 허억…….”
제플린이 눈을 번쩍 떴다.
방 안이 온통 암흑으로 가득 차 있었다.
순간 아직도 제가 꿈속에 있다고 착각할 정도로 사방이 어두웠다.
하지만 곧이어 배 위로 느껴지는 묵직한 무게 때문에 제플린은 이곳이 현실임을 깨달았다.
그는 제 배 위에 엎어져 있는 인영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여기가 어디인지. 그 전에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기억나는 건 오로지 꿈속에서 본 금발에 푸른 눈을 가진 제가 사랑하는 여인뿐이었다.
“백작님……?”
제플린이 움직이자 그의 배에서 곤히 자고 있던 이가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그녀가 달콤한 목소리로 그에게 말을 걸었다.
“백작님! 세상에나, 깨어나셨어요?”
여자는 서둘러 램프의 불을 켰다.
램프의 환한 불빛에 제플린이 눈을 찡그렸다.
차차 빛에 적응한 시야 안으로 그를 향해 진주 같은 눈물을 흘리고 있는 여자가 들어왔다.
“당신이 영영 깨어나지 않을 줄 알았어요.”
그녀는 누워 있는 그의 손을 붙잡고 엉엉 울었다.
제플린은 그녀를 찬찬히 살펴봤다.
꿀이 흐르는 것 같은 금발과 사파이어를 박아놓은 듯한 푸른색 눈동자.
그녀가 나의 연인일까.
내가 꿈속에서 간절히 손을 뻗었던 그 여인일까.
제플린은 그녀가 붙잡은 손을 빼내어 그녀의 뺨을 감싸 쥐었다. 그리고 질문했다.
“여기가 어디지? 나는…… 누구지?”
그의 물음에 그녀가 멍하니 제플린을 바라봤다. 지금 상황을 이해하려고 부단히 애를 쓰는 모양이었다.
그녀가 더듬거리며 말했다.
“백작님, 저 아, 알리시아예요. 제가 기억이 안 나시나요?”
“아. 알리시아.”
제플린은 알리시아의 이름을 몇 번이고 되뇌어봤다. 하지만 도무지 그녀와 엮인 어느 것도 기억이 나질 않았다.
꿈속의 여인은 눈앞의 여자와 느낌이 달랐던 것 같은데…….
그가 머뭇거리다 물었다.
“그럼 알리시아. 당신이 나의 연인인가?”
알리시아가 잠시 머뭇거렸다.
하지만 이윽고 알리시아는 기회를 채가듯 혼란에 빠진 제플린의 손을 다정히 잡았다.
“맞아요. 저는 당신의 부인이에요. 알리시아 데본셔 백작 부인.”
* * *
제플린이 폭우를 뚫고 레베카에게 달려간 그날.
알리시아가 안간힘을 쓰고 지켜내려던 미약한 희망이 거센 말발굽에 부서져 버렸다.
알리시아는 산산이 조각난 희망을 울면서 그러모았다.
이대로 있다간 옥타비오가 새로운 레베카를 찾아오고, 자신은 또다시 폭풍 앞의 촛불과 같은 신세가 될 게 뻔했다.
이제는 생존의 문제였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곳에 발을 붙이고 있어야 했다.
하다못해 하녀보다 못한 취급을 받는다 하더라도 이 저택에서 알리시아는 나가고 싶지 않았다.
아니, 나갈 수 없었다. 죽어서 유령이 되더라도 알리시아는 데본셔 백작 부인으로 남겠노라 결심했다.
그런 알리시아의 굳은 결심을 알았는지 옥타비오는 순순히 그녀의 청을 들어주었다.
누가 레베카와 같은 인형이 되든지 간에 제 말만 잘 듣는다면 별 상관이 없었다.
그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부숴버리고 다시 새로운 것을 제플린에게 사주면 그만이었다.
게다가 원래 있던 것을 다시 쓰는 게 좀 더 효율적인 일이었다.
어차피 알리시아는 자신의 손을 놓지 못한다는 걸 옥타비오는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알리시아를 임시 레베카로 만들기로 결정했다.
그날 밤.
제플린이 공작령의 성문에 제 머리를 깨부수고 있을 때, 알리시아는 암시장으로 향했다.
작은 마차가 그녀를 배웅하러 나왔다.
“이걸 쓰십시오.”
가면을 쓴 사내가 안대를 내밀었다. 허락된 사람 이외에는 모두 안대를 쓰고 이동해야 했다.
알리시아는 아무 말 없이 안대를 받아들였다.
험한 산길을 이동하는 듯 마차는 사정없이 덜컹거렸다.
“내리십시오.”
안대를 벗은 알리시아가 사내의 지시에 따라 마차에서 내렸다.
마차에서 벗어난 순간 알리시아는 비명을 지를 뻔했다.
거대한 동굴의 입구가 꼭 입을 벌리고 있는 괴수 같아 보였다.
처음 방문한 것이 아닌데도 그녀는 까무라치게 놀랐다.
알리시아는 이곳이 동굴이라는 걸 재차 확인한 뒤 놀라서 벌렁이는 가슴을 부여잡고 발걸음을 옮겼다.
축축한 동굴 안은 밖보다 온도가 훨씬 낮았다.
오한이 들 정도로 서늘한 기운이 몰려오자 알리시아가 로브를 여미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커다란 천막이 줄지어 늘어서 있는 광장이 나왔다.
암시장이었다.
암시장은 땅거미가 지기 시작할 때 열렸다. 그렇기에 음지의 시장은 밤이 깊어질수록 더 활기를 띠었다.
파도처럼 휘몰아치는 인파 속에서 알리시아는 기억을 더듬어 목적지로 향했다.
암시장은 황실의 인가를 받지 못한 불법 연금술 상품을 주로 취급했다.
뿐만 아니라 사람이나 희귀한 생물, 그리고 마물의 사체까지 거래되었다.
돈만 있다면 어떤 것이든 구할 수 있는 곳이었다.
“이거 오랜만입니다.”
이고르가 먼저 알리시아를 알아보고 그녀에게 다가왔다.
알리시아는 실눈을 뜨고 이고르의 안대에 그려진 흰색 장미 문양을 바라보았다.
장미 문양을 알아본 알리시아가 입을 열었다.
“물건은 준비되었겠지?”
“물론입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알리시아는 천막을 걷고 안쪽으로 들어갔다. 더운 열기와 함께 독한 약품 냄새가 훅하고 코를 찔렀다.
목욕물을 받아둔 커다란 통 앞에 신비한 분위기를 풍기는 두 명의 소녀가 서 있었다.
이고르가 비릿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 아이들이 도와드릴 겁니다.”
“효과는 확실하겠지?”
“물론 물건의 품질은 보증합니다. 다만 안약의 경우, 달마다 한 번씩은 눈에 넣으셔야 합니다.”
“부작용은?”
암시장에서 유통하는 물건은 대부분 심각한 부작용이 따랐다.
하지만 신묘한 효능에 영혼까지 팔 사람은 어딜 가나 있었다.
알리시아도 그런 사람 중 하나였다.
“실명을 할 수 있겠지요.”
다소 섬찟하게 읊조리는 그의 말에 알리시아는 움찔했다.
이고르는 알리시아의 부푼 배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소중히 품고 계신 그 아이에게 영향을 미칠 수도 있습니다.”
알리시아는 저도 모르게 배를 끌어안았다.
이고르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지난번 상품이 제 할 일을 제대로 했나 봅니다.”
그 말에 알리시아의 동그란 눈매가 치켜 올라갔다. 그녀는 금화 주머니를 이고르의 가슴팍에 던졌다.
“쓸데없는 말은 그만하고 일이나 제대로 해.”
“저야 상관없지만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주머니를 짤랑거리며 금화의 무게를 가늠하던 이고르가 물었다.
알리시아가 머뭇거림도 없이 대답했다.
“상관없어.”
알리시아는 로브를 벗어 대기하고 있는 소녀 한 명에게 던졌다. 소녀가 군소리 없이 로브를 받아들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어차피 죽은 목숨이야.”
이고르는 어깨를 으쓱 올리고는 천막 밖으로 나갔다.
알리시아는 천천히 옷을 벗고 목욕물 안으로 들어갔다. 물의 온도가 너무나 뜨거워 비명을 삼켜야 했다.
이윽고 두 명의 소녀가 달려들어 독한 약품을 알리시아의 머리에 뿌리기 시작했다.
아름답게 빛나던 그녀의 연보랏빛 머리칼이 점차 죽어갔다.
두피가 타들어 가는 고통이 엄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