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
회상을 끝낸 알리시아는 마치 그때의 통증이 되살아난 것 같아 눈을 질끈 감고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여기까지 오기 위해 내가 어떤 고통을 겪었는지 당신은 알까? 그러니 여기서 당신이 죽어버리면 아주 곤란해.’
알리시아는 정신을 잃고 침대에 누워 있는 제플린을 차갑게 내려다봤다.
그가 사경을 헤맨 지 벌써 며칠째였다.
알리시아는 꺼져갈 듯한 숨을 내뱉는 제플린을 쳐다봤다.
오늘도 그는 깨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자그맣게 한탄하고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랫동안 앉아 있어서 그런지 걸음걸이가 불편했다.
알리시아는 굳어 있던 허리를 두드리며 제플린의 화려한 침실을 둘러보았다.
하나만 내다 팔아도 한 달 정도는 부족함 없이 살 수 있을 만한 값비싼 장식품들이 방을 채우고 있었다.
비취로 만든 천사상을 만지작거리던 알리시아의 시선이 황금 문고리가 달린 거울 방을 향했다.
제플린이 정신을 잃은 지금, 그녀는 이 호화로운 방의 주인이나 다름없었다.
알리시아가 고개를 쳐들었다.
그녀는 레베카의 고고한 걸음걸이를 흉내 내며 침실을 가로질렀다.
이윽고 알리시아는 용맹한 황금사자의 입에 물려 있는 문고리를 잡아 끌었다.
거울의 방이 천천히 정체를 드러냈다.
눈앞에 드러난 광경에 알리시아는 놀라 잠시 입을 가렸다.
매끄럽고 왜곡 없는 거울이 사방에 걸려 있었다.
알리시아는 거울을 향해 손을 뻗었다. 서늘한 감촉이 손가락 끝을 타고 전해져 왔다.
거울 속에서 낯선 여자가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금발의 푸른 눈을 하고 있는 낯선 여자는 제플린이 그토록 사랑하는 레베카를 어설프게 따라하고 있는 자신이었다.
지금 입고 있는 옷도 레베카의 것이었다.
키가 맞지 않아 모조리 재단을 다시 해야 했지만 어찌 됐든 레베카가 가졌던 건 지금 모두 제 몫이 되었다.
썩 취향에 맞지 않는 몰골이었지만 상관없었다.
제플린이 레베카를 원하면 레베카가 되면 그만이었다.
물론 이건 일종의 도박이나 다름없었다.
정신을 차린 제플린이 레베카를 흉내 낸 자신을 보고 불같이 화를 낼 수도 있었다.
운이 나쁘다면 험한 꼴을 당한 채 이곳에 쫓겨날 수도 있겠지.
하지만 만약 그가 자신을 인정한다면?
레베카는 돌아올 리가 없었다.
레베카를 죽이려고 했던 그날 밤, 그녀가 자신에게 보여줬던 눈빛은 결코 제플린을 바라는 눈빛이 아니었다.
오히려 레베카는 지독히도 제플린을 혐오하고 있었다.
그녀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갔다.
이제 데본셔 백작 부인의 자리가 영원히 텅 비어 버렸단 걸 알리시아는 깨달았다.
비어 버린 레베카의 빈자리를 제플린은 견디지 못할 것이었다.
한심하게 제 머리를 박고 이렇게 정신을 잃은 것만 봐도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그런 그가 자신에게 백작 부인의 자리를 내어줄 수도 있지 않겠는가.
이건 탐욕 따위가 아니었다.
정당한 경쟁의 결과였다.
어차피 새로운 레베카가 필요하다면 아이를 가진 자신이 더 적합했다.
그 만약이라는 얄궂은 희망이 알리시아를 움직이게 했다.
“내 자리…….”
낯설기만 한 자신의 모습을 한껏 노려보던 알리시아는 다시 침실로 돌아갔다.
그리고 정성껏 제플린을 간호했다.
비록 자신에게 주어질 자리가 진심이 없는 자리라 해도 상관없었다.
남편이 아이를 정식으로 핏줄로 인정해주기 전까지는 식을 올렸다 하더라도 둘째 부인은 아무런 권리도 없는 정부나 다름없었다.
일처다부제를 허용할 당시 첫째 부인의 좁아질 입지를 우려한 데서 나온 법안이었다.
대부분의 첫째 부인은 고귀한 가문의 여식이었다.
첩 따위에게 내 딸의 지참금을 줄 수 없다는 힘 있는 아비들의 원성이 만들어낸 법이었다.
그러니 아비가 없는 알리시아가 아이를 낳기도 전에 제플린이 죽어버린다면 아이는 사생아가 될 뿐이었다.
백작의 지위 또한 그의 가까운 친척에게 넘어가게 된다.
“그러니 당신은 죽으면 안 돼. 반드시 살아서 나를 살려줘.”
알리시아는 약을 떠서 제플린의 입에 넣었다.
제플린은 약을 좀처럼 받아먹지 못했다.
알리시아는 자신의 입 안에 약을 머금고 그의 입 안으로 약을 흘러 넣었다.
그러기를 며칠.
마침내 그가 깨어났다.
그러나 그는 기억을 잃었다.
레베카와 자신을, 이 아름다운 데본셔 백작가를 다 잊어버렸다.
머리뼈가 거의 다 드러날 지경이었다고 했으니 뇌에 이상이 없는 게 더 이상하긴 했다.
“그럼 알리시아. 당신이 나의 연인인가?”
순진해 보일 정도로 무구한 그의 질문에 알리시아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알리시아는 잠시 숨을 멈추고 제플린을 바라보았다.
초점을 잃은 눈동자가 자신에게 대답을 갈구하고 있었다.
언제나 무심하던, 제 존재를 똑바로 바라본 적이 없던 남편의 아름다운 눈동자가 자신을 향하고 있었다.
항상 누군가로 가득 채워져 있던 그의 눈동자는 이제 텅 비어버렸다.
그 텅 빈 눈동자를 자신으로 채우고 싶었다.
알리시아는 커다란 눈망울을 부릅떴다.
이건 계시나 다름없었다. 신이 처음으로 이 알리시아의 편을 들어준 것이다.
그녀의 입술 위로 희망의 미소가 위태롭게 서렸다.
알리시아는 무언가 결심한 듯 그의 손을 단단히 잡고 말했다.
“맞아요. 제가 당신의 부인이에요. 알리시아 데본셔 백작 부인.”
* * *
“덥지 않으십니까?”
그네에 앉아 책을 읽던 레베카는 칸나의 물음에 고개를 들었다.
오히려 그렇게 묻는 칸나의 이마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레베카가 조용히 웃으며 말했다.
“칸나, 난 괜찮으니까 부채질 이제 그만해. 너도 더울 거 아니야.”
“하지만…….”
“네가 계속 그러고 있는 게 더 신경 쓰여. 누누이 말했지만 넌 이제 하녀가 아니라니까. 그러지 말고 너도 여기로 와서 앉으렴. 아버지가 만든 자몽주스가 참 시원하고 달아.”
칸나는 잠시 고민하더니 이윽고 부채를 놓고 레베카 옆에 앉았다.
감히 자신이 그녀의 옆에 나란히 앉아도 되는지 무척 망설이는 모양새였다.
레베카는 칸나에게 자몽주스가 담긴 유리컵을 건넸다. 칸나는 머뭇거리다가 이내 받아들었다.
칸나가 이 집에 온 지 벌써 일주일이 지났다. 그동안 오벨리아 저택은 완전한 여름으로 물들고 있었다.
레베카는 고개를 들어 울창한 나무를 바라봤다.
연둣빛을 띠고 있던 잎이 어느새 진한 초록색으로 변해 있었다.
그 싱그러움에 레베카가 잠시 미소를 지었다.
“제가 하겠습니다!”
단숨에 주스를 비운 칸나가 부리나케 앞으로 달려 나갔다.
빨래가 가득 든 바구니를 들고 가는 테오를 발견한 모양이었다.
멀리서 보아도 둘이 어떤 대화를 주고받는지 알 것 같았다.
혼신을 다해 사양하는 아버지와 그에 못지않게 도와주겠다며 고집을 피우는 칸나.
결국 테오가 이겼는지 칸나는 수확 없이 털레털레 레베카 쪽을 향해 걸어왔다.
하지만 곧 저택에서 헤레나와 리비아가 용수철처럼 튀어나왔다.
활발한 소녀들이 칸나의 양쪽에 매달려 놀아 달라 떼를 쓰기 시작했다.
난감한 얼굴로 칸나는 쌍둥이와 레베카를 번갈아 봤다.
레베카는 놀아도 괜찮다는 뜻으로 손을 흔들었다.
이윽고 들판으로 뛰어가는 세 사람의 웃음소리가 바람을 타고 들려왔다.
칸나는 어느새 오벨리아가에 스며들고 있었다. 그녀는 마치 예전부터 함께 했던 가족처럼 편하게 느껴졌다.
‘이제 더 이상…… 더 이상 헤어지지 않겠다는 약속 꼭 지켜주십시오.’
레베카의 등을 감싸고 있는 그녀의 손이 세차게 떨리던 게 떠올랐다.
그때만 생각하면 낯설고 그리운 감각이 레베카의 가슴을 간지럽혔다.
한동안 잊고 살아서 낯설었지만 언젠가 받은 적이 있어서 그리운, 나를 잃을까 두려워하는 걱정어린 눈빛.
그건 분명히 제플린의 것과는 다른 것이었다.
율리안도 가끔 그런 식으로 자신을 바라볼 때가 있었다.
그는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을 차마 내뱉지 못하겠다는 얼굴로 레베카를 가만히 바라보곤 했다.
율리안이 칸나와 비슷한 말을 하려 했다는 걸 레베카는 알았다.
율리안 생각에 미치자 레베카는 책을 소리 나게 탁하고 덮었다.
그러고 보니 서신을 보낸 지 일주일이 지났다.
하지만 공작가에선 아직까지 아무 소식도 들려오지 않았다.
서신을 보내자마자 무섭게 답신이 오던 옛날과 달랐다.
매일같이 오벨리아 저택을 방문하던 율리안의 발걸음은 세찬 비가 쏟아지던 그날 이후로 뚝 끊겼다.
레베카는 뚱한 얼굴로 턱을 괴었다.
지금 율리안은 그녀를 노골적으로 피하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아무래도 그날에 일어났던 사건 때문인 게 분명했다.
처음에는 레베카도 율리안을 볼 낯이 없었다.
자신이 그의 순정을 희롱하고 놀린 건 명백한 사실이었다.
그래도 이렇게 피하기만 하는 건 능사가 아니었다. 아직 그와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슬슬 결혼식 이야기도 나눠야 했다.
그래서 기껏 용기를 내어 서신을 보냈는데 답신 하나 없다니.
레베카는 열이 올랐다.
‘애초에 먼저 입을 맞춘 건 본인이면서.’
그가 그렇게 하지만 않았어도 자신이 주정뱅이처럼 그를 희롱할 일은 없었다.
하지만 또 그의 입맞춤으로 레베카가 위로를 받은 것도 사실이었다.
레베카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마냥 기다릴 수만은 없지.”
이제 상황이 달라졌다. 방 안에서 소식이 전해져 오길 초조하게 기다리지 않아도 됐다.
레베카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그럼 어디 한번 움직여 볼까.”
* * *
한편, 율리안은 기나긴 꿈을 꾸고 있었다.
아프다. 너무 아팠다. 사지가 뒤틀리고 내장이 죄다 터질 것 같은 고통이었다.
어린 소년이 감당할 만한 고통이 아니었다.
‘레오…….’
율리안은 제 목숨줄을 쥐고 있는 신의 사자를 찾았다.
그에게 심한 말을 했던 탓일까.
그를 여느 요하네스 공작들처럼 두려워하지 않았던 탓일까.
그래서 내게 이런 시련을 주는 걸까.
그 때문에 날 죽이려, 신의 심판을 내리는 걸까?
한 가지 위안이 되는 건, 저와 같은 고통을 아버지도 같이 공유하고 있을 거란 것이었다.
그 인간이 몸부림치고 있다고 생각하니 식은땀이 줄줄 흐르는 와중에도 입가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나저나 정말 아무도 찾아오지 않네.’
아무도 없는 싸늘한 여관에서 어린 율리안은 혼자 앓고 있었다..
어린아이 혼자 방에 묵으면 이상하다고 생각할 법도 한데, 여관 주인은 한 달치를 선불로 받았던 터라 율리안에게 별 관심이 없었다.
방금까진 열이 펄펄 들끓었는데 이젠 너무나 추웠다.
뼈를 에는 추위가 그를 덮쳐 왔다.
그는 낡은 이불을 얼굴까지 뒤집어쓰고 덜덜 떨었다.
이대로 죽는 걸까.
어차피 아버지가 있으니 자신은 죽어도 상관없었다.
제가 죽어도 그가 새로운 후계자를 만들어 낼 테니까.
후계자가 없는 요하네스 공작은 마음대로 죽지도 못했다.
후계는 오로지 아들만이 이을 수 있었다.
생명이 다한다 하더라도 생식 활동만 가능한 반송장 상태로 아들이 태어날 때까지 신성력 주머니 노릇을 한다고 들었다.
그러니 이 기회에 죽는 게 차라리 낫지 않을까 하고 어린 율리안은 혼미해져 가는 정신을 놓으려고 했다.
그리고 그 순간 따뜻한 공기가 그를 감싸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