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
“바, 방금…….”
모닥불에 장작을 밀어 넣던 소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난데없이 나타난 율리안을 바라봤다.
“분명 여기에 고양이가 있었는데? 넌 대체 누구니?”
율리안은 눈을 찌푸렸다.
뭐라 대답을 하려 했지만 목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소녀는 그를 빤히 쳐다보다가 서둘러 배낭을 열더니 물을 가져왔다.
그리고 무릎에 율리안의 머리를 뉘어 놓고 그의 입에 물을 흘려 넣었다.
율리안은 허겁지겁 목을 타고 넘어오는 생명수를 삼켰다.
“너도 그 고양이처럼 아픈가 보구나. 하지만 지금 나도 갇혀 버린 상태라 당장 의사 선생님을 모셔 올 수는 없어. 그래도 우리 아버지가 곧 구하러 오실 거니까 걱정 말아.”
메마른 목을 물로 축이자 정신이 들기 시작했다.
율리안은 조금씩 돌아오고 있는 뿌연 시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산사태라도 났는지 동굴로 보이는 이곳 입구가 돌로 단단히 막혀 있었다.
율리안은 시선을 천천히 돌려 소녀를 바라봤다.
소녀는 모닥불보다 따뜻해 보이는 색의 금발을 질끈 묶고 있었다.
율리안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너…… 넌…….”
“어, 안 돼. 말하지 마. 세상에, 몸이 왜 이렇게 차갑지?”
소녀는 천천히 율리안의 곁에 누웠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그를 껴안았다.
뺨이 보기 좋게 통통하게 차오른 소녀는 그보다 한 뼘 정도는 키가 더 컸다.
오랫동안 집을 나온 탓에 평소보다 여위었던 율리안은 소녀의 품 안에 쏙 안겨들었다.
소녀의 규칙적인 심장 소리가 들렸다.
소녀가 그에게 건네주는 온기는 그가 지금껏 받은 것 중 가장 따뜻한 것이었다.
얼어붙은 빙해가 녹듯 그의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굴러떨어졌다.
소녀가 그의 눈물을 보곤 그를 달랬다.
“걱정하지 마. 이곳 마을 사람들은 카디르교 사람이래. 위기에 구한 사람을 외면하지 않는대. 그러니 꼭 우리를 구하러 올 거야.”
소녀는 총명함이 엿보이는 푸른 눈을 뜨고 제 나이보다 어른스러운 말을 지껄였다.
하지만 무서운 건 매한가지였는지 소녀는 율리안을 품에 안은 채로 떨고 있었다.
율리안은 떨리는 소녀의 어깨를 가만히 쳐다봤다.
소녀가 자신을 위로한 것처럼 자신도 소녀를 다독이고 싶었다.
하지만 눈꺼풀이 무척 무거웠다.
율리안은 서서히 잠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그가 눈을 떴을 땐.
“공작님! 세상에나, 공작님이 정신을 차리셨어요!”
‘아…….’
율리안은 아기 천사가 뛰노는 천장화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꿈이었구나.’
그는 상체를 일으켰다.
꿈에서처럼 목 안이 바싹 메말라 있었다.
“물을…….”
“여기 있습니다!”
그를 보살피던 하인이 빠르게 그의 손에 물컵을 쥐어주었다.
율리안이 목을 축이고 있을 때 침실의 문이 거칠게 열렸다.
“공작님!”
율리안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은 크로아가 헐레벌떡 뛰어 들어왔다.
크로아가 뭐라 한바탕 떠들어댈 듯이 입술을 달싹였다.
율리안은 신음을 내며 손을 내저었다.
“조용히 해. 머리가 울려서 정신이 하나도 없으니.”
율리안은 외마디 신음을 내며 푹신한 베개 위에 누웠다.
그러나 곧 입을 꾹 다문 채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크로아의 얼굴을 발견하고 말았다.
율리안은 한숨을 길게 내쉬고 짜증스럽게 말했다.
“아, 알았어. 말해봐. 울지 말고. 간결하게 용건만.”
“공작님! 저는 정말 공작님께서 돌아가시는 줄 알았습니다. 지금껏 이렇게 아프신 적 없었잖아요.”
“내가 아팠어?”
“예. 그날 비를 쫄딱 맞고 들어오시더니 꼬박 일주일을 앓아 누우셨지 않습니까? 심장병이 아니라 감기라서 망정이지, 저는 정말 이대로 공작님이…….”
“뭐라고? 일주일?”
율리안은 이불을 발로 차듯이 헐레벌떡 몸을 일으켰다.
당황한 그의 눈동자가 크로아를 멀거니 바라봤다.
“레베카는? 그동안 레베카에게서 아무런 소식도 없었어?”
“아, 서신이 하나 왔긴 했습니다.”
“그건 언제 왔는데.”
“일주일 전이요.”
“그렇다면 내가 답신을 할 수 없는 상태라는 걸 레베카에게 알렸겠지?”
“예? 제멋대로 답장을 보냈다가 공작님께서 제게 어떤 불호령을 내리실지 알고 감히 그랬겠습니까.”
“그럼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단 말이야?”
“어…… 그러고 보니 그랬네요. 사실 공작님을 간호하느라 서신이 온 것도 잊어버리고 있었던 터라. 죄송합니다.”
“뭐라고……?”
율리안은 머리를 감싸 쥐었다.
그러니까 자신은 그때 그녀에게 입맞춤을 하고 머저리처럼 도망친 것도 모자라서 일주일 동안이나 답신도 보내지 않은 겁쟁이가 되어버렸다.
“젠장! 젠장! 젠장!”
율리안은 베개를 주먹으로 거세게 내리쳤다.
둔탁한 소리가 침실 안에 울려 퍼졌다.
크로아는 율리안의 손에서 처참히 망가지는 베개가 꼭 자신인 것처럼 느껴져서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지, 지금이라도 보낼까요?”
크로아가 조심스럽게 율리안을 올려다보았다.
저걸 쥐어박을까 생각하다 율리안은 그만두었다.
그가 아플 때 크로아가 얼마나 제정신이 아닌지 잘 알았기 때문이었다.
어릴 때는 종이에 손가락을 베이기만 해도 한 달 내내 붕대를 감고 다니게 할 정도로 크로아는 자신의 건강 상태에 유난을 떨었다.
그런데 일주일 동안 누워 있었으니 아마 크로아의 수명이 절반은 깎여 나갔겠지.
율리안은 크로아의 얼굴을 찬찬히 살피다가 혀를 찼다.
“됐어. 이제 나는 괜찮으니 너나 좀 쉬어. 얼굴 꼴이 말이 아니야.”
“아, 그런가요?”
크로아가 멋쩍게 까슬까슬하게 자란 제 턱수염을 만졌다.
그러고 보니 언제 제대로 씻었더라. 크로아는 킁킁거리며 제 몸에서 나는 냄새를 맡고는 질색을 했다.
“어이쿠. 냄새가 장난이 아니네요. 그럼 일단 목욕부터 하고 오겠습니다.”
“그래. 내 목욕물도 준비하라 이르고.”
“예.”
“레베카가 보냈다던 서신도 가져와.”
“헉! 예? 아, 네! 그래야지요. 알겠습니다.”
크로아는 낭패 어린 표정으로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문을 나서는 그의 안색이 파리했다.
‘내가 서신을…… 어디다 두었더라?’
크로아는 필사적으로 기억을 더듬었다.
서신을 찾아오지 못한다면 이번에야말로 속이 터져버린 베개 꼴이 될지도 몰랐다.
하얗게 질린 크로아와 함께 하인이 모두 나가자 율리안은 침대에서 발을 내렸다.
일주일 동안 누워 있었다는 게 정말이었는지 온몸이 찌뿌둥했다.
율리안은 커튼을 활짝 젖혔다.
여름이 찾아온 공작 성의 정원은 눈부시도록 찬란했다.
그 너머로 보이는 숲에선 새들이 정답게 지저귀고 있었다.
율리안은 멍하니 그 풍경을 바라보다가 방금 꾸었던 꿈을 뒤이어 생각했다.
한동안 꾸지 않았던 꿈이었는데 오랜만에 그를 찾아왔다.
어릴 적, 끔찍한 자신의 운명을 감당하기 싫어 가출한 적이 있었다.
며칠은 순조로웠다. 모험하는 것 같아 즐겁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를 따라 나온 레오를 발견한 율리안은 절망했다.
레오의 무념한 눈동자는 꼭 네가 신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냐고 비웃는 것 같았다.
율리안은 그런 레오에게 여덟 살 어린 소년이 내뱉을 수 있는 모든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네가 죽어버렸으면 좋겠어!’
율리안은 그때 자신이 했던 말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지금이야 그보다 더한 욕도 할 수 있었겠지만 그때는 그게 최선이었다.
조금 부끄러움이 밀려와 율리안은 이마를 문질렀다.
율리안의 욕을 가만히 듣던 레오는 율리안이 숨이 차서 헐떡이는 틈을 타 그를 떠났다.
레오의 행방이 묘연해진 그날 밤, 그는 이름 모를 마을의 허름한 여관에서 크게 아팠다.
어린 자신이 죽음을 예감할 정도로 극심한 통증이 그를 덮쳤다.
그런 그를 구해준 게 꿈 속의 그 소녀였다.
율리안은 동굴에서 소녀와 만난 뒤로도 레오와 몇 번이나 몸을 바꾸었다.
아마 목숨이 위태로우면 그렇게 되는 것 같았다.
의문스러운 건 몸을 바꾼 상대가 아버지가 아니라 어째서 자신일까 하는 점이었다.
후계자가 태어나면 후계자와 요하네스 공작은 동시에 레오에게 연결되었다.
하지만 어린 후계자는 아직 신성력이 미미하기에 완전히 레오와 연결되진 않았다.
그 때문에 레오와 말이 통하게 된 것도 율리안이 열 살이 되던 해였다.
율리안은 이름 모를 소녀를 생각했다.
고양이와 몸이 여러 번 바뀌어도 그저 묵묵히 간호해주었던 그 소녀.
얼굴도 제대로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소녀의 따뜻한 온기만큼은 생생하게 기억이 났다.
율리안이 여관에서 깨어나는 걸로 몸이 바뀌는 게 끝났다.
그리고 곧바로 공작가의 사람들이 들이닥쳐 율리안을 데려갔다.
이후로 율리안은 자신을 구해준 소녀를 찾으려고 부단히 애를 썼다.
산사태가 난 지역과 실종된 소녀에 대한 이야기를 제국 전역에 수소문했지만 찾을 수 없었다.
소녀는 마치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율리안은 레오와 말이 통하게 되자 그에게 그날에 대한 것을 이것저것 물어봤다.
하지만 레오는 항상 잘 모른다는 대답만 했다.
그가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걸 어렴풋이 깨달았지만 율리안은 캐묻지 않았다.
그날의 기억을 꺼내려는 것 자체만으로도 레오가 무척 괴로워하는 것 같았다.
‘율리안. 이제 몸은 좀 괜찮아?’
문득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 그는 뒤를 돌아보았다.
레오가 서서히 그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율리안은 그날의 꿈을 꾸었노라 이야기하지 않았다.
누구나 묻어두고 싶은 생각하기도 싫은 기억이 있기 마련이다. 그게 신의 사자라도 말이다.
율리안은 대신 빙긋 웃으며 레오의 눈높이에 맞춰 앉았다.
그가 부드럽게 말했다.
“응. 어차피 내가 죽을 리 없다는 거 너도 잘 알잖아.”
레오는 많은 말을 담은 눈동자를 깜빡였다.
여태껏 모든 요하네스 공작에게서 보았던 체념의 그림자가 순간 율리안의 얼굴 위로 드리웠다.
그건 레오가 끔찍이도 싫어하는 모습이었다.
* * *
탕- 탕- 탕-
고요한 공작 성의 사격장에 신경질적인 총소리가 연달아 들려왔다.
율리안이 쏜 총알은 모두 과녁을 빗나가 엉뚱한 곳에 박혔다.
“빌어먹을!”
율리안은 총알을 욱여넣듯이 장전하고 다시 장총을 들었다.
그의 앞을 크로아가 막아섰다.
율리안이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비켜. 쏴버리기 전에.”
“그만두세요! 이러다가 진짜 누구 하나 죽어나겠습니다. 고양이님이 맞으실 수도 있고요!”
고양이가 맞을 수 있다는 말에 율리안은 순간 움찔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의 수모를 구경이라도 하듯 고양이 몇 마리가 어느새 그의 주변에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율리안은 길게 한숨을 내쉬고 크로아에게 장총을 건넸다.
크로아가 걱정스레 말했다.
“병석에서 일어나신 지 얼마 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다가 몸 상하십니다.”
며칠 전 유례없는 폭우가 쏟아지던 날 율리안은 맨몸으로 비를 맞은 채 성으로 돌아왔다.
크로아가 아무리 그 이유를 물어봐도 그는 조개처럼 입을 꾹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방 안에서 이불을 거세게 뻥 차는 소리만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