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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친 백작 부인이 돌아왔다-66화 (66/232)

66.

그리고 다음 날, 율리안은 지독한 감기에 걸려 의식을 잃을 정도로 크게 앓았다.

평소 잔병치레조차 거의 없던 그였기에 공작가에는 비상이 걸렸다.

혹시나 전대 요하네스 공작들처럼 그가 덜컥 죽어버리기라도 할까 봐 크로아는 제국에 내로라하는 의사들을 모조리 불러 모아 그를 치료하게 했다.

‘걱정 마십시오. 단순한 감기입니다.’

그 말에 잠시 안도했지만 마음이 완전히 놓이지는 않았다.

크로아는 밤낮 그를 간호하느라 살이 쏙 빠져버렸다.

오히려 의사가 크로아가 더 걱정된다며 환자 취급할 정도였다.

그렇게 애지중지 그를 돌봤는데 율리안은 고맙다는 한마디 없이 건강을 회복하자마자 대뜸 사격을 해야겠다고 말했다.

하긴 그가 자신에게 고맙다고 했다면 정신과 의사를 불러왔을 터였다.

‘하여튼, 예로부터 자식새끼 키워 봤자…….’

“크로아.”

한참을 투덜거리던 크로아는 저를 호명하는 율리안에 화들짝 놀라 고개를 쳐들었다.

혹시 속으로 욕하는 걸 입 밖으로 내뱉었나 싶어 크로아는 손으로 입을 가렸다.

율리안이 크로아에게 물었다.

“서신은? 책상 위에 없던데.”

크로아는 순간 딸꾹질을 할 뻔했다.

하인 몇 사람에게 서둘러 찾으라고 일렀건만 아직까지 소식이 없었다.

크로아가 우물쭈물하며 답을 하지 않자 대번에 율리안의 눈이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설마, 서신을 잃어버렸단 헛소리를 하는 건 아니겠지?”

“그, 그게…….”

“찾았습니다!”

한 하인이 분홍색 서신을 들고 뛰어왔다.

크로아가 환해진 얼굴로 하인의 손에서 재빨리 서신을 낚아챘다. 그리고 율리안에게 그대로 바쳤다.

“잃어버렸다니요. 여기에 있습니다.”

율리안은 뭐라고 잔소리를 퍼부으려 했지만 분홍색 편지 봉투에서 나는 은은한 향기에 멈칫했다.

그는 크로아를 잠시 노려보다 서둘러 서신을 뜯었다.

무슨 수를 썼는지 도착한 지 며칠이 지났는데도 서신 봉투엔 꽃향기가 그윽하게 묻어났다.

서신을 뜯어 본 율리안은 저도 모르게 눈썹을 치켜올렸다.

편지지엔 토끼풀의 압화가 붙여져 있었다.

화려하거나 값비싼 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율리안은 토끼풀 압화에서 한동안 눈을 떼지 못했다.

<율리안에게.

지금 우리 집 정원엔 토끼풀이 잔뜩 피었어. 덕분에 리비아와 헤레나가 팔찌에 목걸이, 그리고 화관까지 만드느라 항상 바쁜 하루를 보내고 있어.

애들이 계속 물어봐. 요하네스 공작님은 언제 오냐고. 그새 아이들과 친해졌나 보구나. 왈가닥인 내 동생들과 놀아줘서 항상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

정원에서 동생들과 놀고 있을 레베카를 떠올리자 율리안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실실 웃고 있는 율리안을 발견한 크로아가 고개를 쭉 빼 들었다.

그는 서신의 내용이 궁금했는지 까치발을 들고선 서신을 향해 기웃거렸다.

율리안이 크로아를 흘겨봤다.

그리고 이내 빠른 걸음으로 크로아의 시야에서 벗어나 숲속으로 사라졌다.

따가운 크로아의 시선이 뒤통수에 사정없이 내리꽂히는 듯했다.

율리안은 숲속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그를 발견한 고양이들이 그의 발에 엉겨 붙었다.

레오의 영향인 듯, 어릴 때부터 유독 고양이들이 그를 따랐다.

율리안도 그런 고양이의 존재가 싫지만은 않았다.

평소였다면 놀아 달라고 달려드는 꼴이 퍽 귀여워 그들과 몇 시간을 보냈겠지만 지금은 서신이 더 급했다.

율리안은 대충 고양이들을 옮겨 놓고는 나무 그루터기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불만 가득한 고양이들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서신을 마저 읽기 시작했다.

<당신이 내게 입맞춤을 하고 도망가 버리듯 사라진 그날 이후로…….>

하지만 다음 구절을 읽자마자 그는 서신 읽기를 다시금 멈춰야만 했다.

얼굴이 화르륵 달아올랐다.

사격을 하면 마음이 좀 가라앉을 줄 알았는데, 가라앉기는커녕 붉은 과녁을 볼 때마다 야생 앵두처럼 붉디붉은 레베카의 입술이 떠올랐다.

그는 밀려오는 수치심에 두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서신을 그만 읽을까도 했지만 청초한 토끼풀이 그를 자꾸만 유혹했다.

자신을 위해 토끼풀을 따고 정성스레 서신에 붙였을 레베카를 상상하니 웃음이 자꾸만 삐져나왔다.

그는 결국 유혹에 굴복하고는 옆에 고이 내려놓은 서신을 다시 손에 쥐었다.

<그날 이후로 영 마음이 편하지 않았어. 그날 내가 너무 짓궂게 군 것 같아. 정식으로 사과할게.

그리고 당신도 그날의 입맞춤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으면 좋겠어.

세상에는 많은 종류의 입맞춤이 있잖아? 그날 우리가 나누었던 그건 우정의 입맞춤이었던 걸로 하자.

서로 충동적이었지만 상황이 상황인 만큼 그럴 수밖에 없었기도 했어.

내가 조금 추태를 보였지? 하지만 당신이 내게 준 우정의 입맞춤은 큰 위로가 되었어.

고맙다는 말, 서신으로라도 전할게.

이제 나는 자유의 몸이 되었어. 모든 일이 끝난 건 아니지만 이제 우리가 숨어서 만나지 않아도 된다니 조금 기쁘다.

이제 슬슬 결혼식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아. 편한 날짜를 일러주면 내가 널 만나러 갈게. 그럼 몸 건강히.

-레베카>

‘위로가 되었다고…….’

율리안은 서신을 한 번 더 꼼꼼하게 읽었다.

그동안 그녀와 주고받은 서신은 주로 백작저를 탈출할 계략이 담긴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니 이렇게 사적인 내용을 담은 서신은 거의 처음이었다.

서신을 서너 번 더 읽은 율리안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그날 있었던 일을 단지 우정의 입맞춤으로 치부하겠다니 어이가 없었다.

어떤 우정에 그런 진한 입맞춤이 있단 말인가.

하지만 그는 곧 레베카의 의견을 따르기로 했다.

그녀와 불편한 사이가 되느니 차라리 첫 키스의 추억을 없는 셈 치는 게 더 나았다.

그는 서신을 원래대로 봉투에 곱게 접어 넣었다. 그리고 행여나 구겨질세라 안주머니에 고이 넣어두었다.

율리안은 레베카의 말을 곱씹으며 숲을 천천히 거닐었다.

결혼식은 흔한 사교 행사가 아니었다. 준비할 것이 무척 많았다.

보통 귀족 간의 결혼식은 일 년이 넘는 기간 동안 준비를 한다고 들었다.

하지만 레베카와 율리안에겐 그만큼의 시간이 없었다.

율리안은 초조해졌다.

그는 레베카와의 결혼식을 최대한 완벽하게 진행하고 싶었다.

레베카가 제플린 그 자식과의 결혼식을 떠올리지 못할 정도로 인상 깊은 결혼식을 열고 싶었다.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결혼식이 완만히 진행되려면 반드시 황제의 허락을 받아야 하는데, 그것 또한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자히드라 황제는 이미 자신을 카트린느 황녀의 부마로 점찍어 두고 있었다.

이미 사교계는 그와 카트린느 황녀의 결혼식을 기대하는 분위기였다.

그러니 자히드라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고 결혼식을 올리려면 그의 품에 뭐라도 안겨줘야 했다.

‘신전의 치부책을 너무 일찍 줘버렸나…….’

율리안은 황제에게 안겨줄 선물을 곰곰이 생각하며 정처 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어느새 울창했던 나무들이 점점 사라지고 흰 자갈이 깔린 커다란 도로가 보였다.

마차가 지나다니는 도로였다.

도로 한 중간엔 얼룩 고양이 두 마리가 놀고 있었다.

율리안은 고양이가 노는 모양새를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다가 말발굽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저 멀리 손님용 흰색 마차가 이곳을 향해 달려오는 게 보였다.

그는 서둘러 고양이 두 마리의 뒷덜미를 움켜쥐고 도로에서 피하게 했다.

고양이들이 대번에 짜증 섞인 울음소리를 내었다.

율리안은 그들을 품에 안고 달랬다.

그리고 의아한 눈으로 마차를 주시했다.

그가 알기론 오늘 공작 성을 방문하는 사람은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마차가 그의 앞을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그 순간 깨달았다.

“레베카?”

마차 안에 레베카가 있었다.

천천히 지나치는 마차의 창문 안으로 검은 베일을 쓰고 있는 레베카가 똑똑히 보였다.

율리안은 그녀가 자신의 집을 방문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아 멍하니 서 있었다.

하지만 곧 발작하듯 정신을 퍼뜩 차렸다.

“레베카가 여기에 왔다고?”

그는 더듬더듬 제 몰골을 살폈다.

지금 막 침대에서 일어난 것과 다름없는 모습이었다. 게다가 아직 오늘 입을 옷도 고르지 않은 상태였다.

“젠장!”

등 뒤로 식은땀이 주르륵 흘렀다.

그는 정신없이 성으로 뛰기 시작했다.

* * *

“어서 오십시오.”

레베카가 마차에서 내리자 크로아가 그녀를 맞았다.

문지기가 율리안의 벗이라 주장하는 이가 찾아왔다고 했을 때 그는 또 어떤 시정잡배가 수작을 부린다고만 생각했다.

종종 율리안을 만나러 담을 넘으려는 광신도가 있었다.

때문에 미리 약속을 잡지 않는 이상 그 이외의 손님은 보통 돌려보내곤 했다.

‘혹여 자신을 들여보내지 않겠다고 하신다면 들판이 노래를 부르는 곳에서 왔다고 전해 달라 하더군요.’

그 말에 크로아의 눈이 번뜩 뜨였다.

오벨리아의 저택을 들판의 노래라 부른다는 건 율리안에게 들어서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는 헐레벌떡 율리안을 찾았지만 이미 숲으로 들어가 버린 그를 단시간 내에 찾는 건 무리였다.

‘뭐, 알아서 하시겠지.’

기민한 그의 감각으로 율리안은 얼마 지나지 않아 레베카가 온 걸 알아챌 게 분명했다.

저번에 그 복잡한 시장통에서 변장한 레베카를 찾아냈듯이.

크로아는 서둘러 응접실을 화려하게 단장하라고 지시하고는 주방으로 가서 가장 좋은 다과를 준비하라 일렀다.

레베카를 대접하는 손길에 조금이라도 부족한 점이 있다면 그 시간부로 몇 명이나 소리소문없이 공작 성에서 사라질지 모르는 일이었다.

어떤 손님이 오는 건지 고용인들이 물어왔지만 그는 그저 아주 중요한 손님이라고 말할 뿐이었다.

아직 레베카와 율리안의 관계에 대해선 대외적으로 알리지 않는 편이 좋았다.

고용인 중에 세작이 숨어 있을 수도 있었고 입이 가벼운 고용인이 무심코 다른 집 하인에게 입을 놀릴 수도 있었다.

크로아의 예상이 적중했는지 레베카는 베일을 쓰고 왔다.

그 뒤를 따르는 칸나도 가면을 쓰고 있었다.

크로아는 정중한 태도로 비밀스런 두 여인을 공작 성안으로 안내했다.

레베카는 잠시 감탄하며 공작 성을 둘러보았다. 외부도 훌륭했지만 공작 성 내부는 예상보다 훨씬 더 웅장했다.

황궁보다 규모는 작았지만 그 가치만큼은 뒤지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나 발을 내디딜 때마다 어딘가 쓸쓸하고 차가운 기운이 그녀를 감쌌다.

호화로운 물건 사이사이로 살 떨리는 북풍이 휘몰아치는 것 같아 레베카는 팔을 감싸 안았다.

데본셔 백작저가 원색적인 욕망의 화려함이라면, 이곳 요하네스 공작 성은 냉철하고 스산한 화려함이 느껴졌다.

‘그래, 죽음이 느껴져.’

정갈하게 짜인 내부는 부유한 황제의 관 속을 연상하게 했다.

조금 가슴이 저려 왔다. 레베카는 이 황량한 공간에서 외로이 컸을 율리안을 상상했다.

“율리안의 가족들인가요……?”

응접실을 향하던 레베카의 발걸음이 거대한 가족화 앞에 멈춰 섰다.

앞서가던 크로아가 뒤돌아서서 그림을 바라보았다.

“예. 두 분 모두 공작님이 어렸을 적에 돌아가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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