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
레베카는 찬찬히 그림 속 인물을 살폈다.
그림 속의 가족은 밤하늘과 같은 새까만 머리칼과 파리한 낯빛이 닮아 있었다.
전대 공작은 율리안과 비슷한 황금색 눈동자를, 그리고 그의 어머니 공작 부인은 유리알보다 투명한 은회색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공작 부부는 위엄 있어 보였으나 어딘가 비어 있는 눈빛으로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과 달리 공작 부부 사이에 서 있는 어린 율리안은 분노로 가득 찬 눈동자를 번뜩이고 있었다.
두 손을 앞으로 단정히 모으고 있는 소년의 눈빛이 매서웠다.
그에게서 언젠가 공작가를 망쳐버리겠노라는 포부가 느껴졌다.
어린아이가 가져서는 안 될 눈빛이었다.
레베카는 애써 눈길을 돌렸다.
왠지 봐서는 안 될 것을 본 것만 같았다.
레베카는 먹먹한 심정을 감추며 말했다.
“율리안은 어머니를 많이 닮았네요.”
“그렇습니까? 보통 전대 공작님을 닮았다고들 하는데, 공작님께서 들으시면 기뻐하시겠군요.”
크로아가 빙긋 웃어 보였다. 그의 미소에서 어쩐지 씁쓸함이 느껴졌다.
어느 방문 앞에 도착하자 크로아가 은색 손잡이를 돌렸다.
문이 열리고 오후의 찬란한 햇빛이 흐르는 아름다운 응접실이 드러났다.
“이곳에서 잠시만 기다려 주시면 공작님께서 곧 오실 겁니다. 병석에서 일어나신 지 얼마 되지 않으셔서 시간이 걸릴지도 모르니 조금 기다려 주시길 바랍니다.”
그의 말에 레베카는 움찔했다.
“율리안이 아팠나요?”
“아, 심각한 건 아닙니다. 며칠 전에 비를 맞고 오셔서 감기에 걸리셨습니다. 그래서 서신에 답장을 하지 못하셨습니다. 미리 말씀을 못 드려 죄송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괜찮으시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비를 맞고 왔다고…….
그날이 분명했다. 레베카는 그동안 답신이 없던 그를 원망했던 걸 후회했다.
조금만 더 빨리 찾아올 걸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어디 마음에 들지 않으신 곳이라도…….”
그녀의 한숨에 크로아의 얼굴이 대번에 푸르죽죽해졌다.
레베카는 고개를 내저었다.
자신에게 깍듯이 대하는 크로아가 어쩐지 낯설었다.
레베카는 그가 이전 생의 자신에게 했던 것처럼, 지금의 율리안에게 하는 것처럼 스스럼없이 대해줬으면 했다.
하지만 그것 또한 욕심이겠지.
크로아에게 있어서 저는 이방인이나 다름없었다.
그것도 순진한 공작님을 홀라당 벗겨 먹을 것 같은 파렴치한 여자로 보일 것이다.
레베카는 지금 자신의 위치를 잘 알았기에 그녀도 똑같이 예의 바른 태도로 크로아를 대했다.
“아니에요. 환대에 감사합니다. 그 전에 부탁을 하나 하고 싶은데, 혹시 들어주실 수 있을까요?”
크로아가 반색하며 말했다.
“뭐든지 말씀만 하십시오.”
“유스타프 맥핀. 그자를 만나고 싶군요. 곧 연구 성과를 보고하러 올 때가 아닌가요?”
“예? 그걸 어떻게…….”
“대충 계산해 보니 이쯤일 것 같아서요. 그를 불러주세요. 제 몸 상태를 정확히 아는 이가 바로 그 사람이에요.”
“하지만 그는 식물학자이지 않습니까? 몸 상태를 보시고 싶으시다면 주치의를 불러드리겠습니다.”
“아니에요. 그자는 실력 좋은 의사이기도 하거든요.”
레베카가 빙그레 웃자 크로아가 고개를 갸웃하면서 대답했다.
“일단 알겠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오늘 방문한다는 연통을 받았으니, 오는 대로 이곳으로 보내겠습니다.”
“고마워요. 크로아. 정말로요.”
진심이 담뿍 담긴 감사였다.
이전 생에 크로아가 무심코 흘린 공작의 이야기가 없었더라면 레베카는 회귀한 이후로도 제플린과 끔찍한 결혼 생활을 이어가고 있을지도 몰랐다.
크로아는 잠시 멍하니 레베카의 상냥한 미소를 바라보았다.
단지 그의 수고를 치하하는 인사였겠지만 그는 어쩐지 레베카가 그 이상의 고마움을 말하고 있는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그럴 리 없었다.
크로아와 레베카가 만났던 건 리베르타 구휼원이 처음이었다.
그 이후로 그가 많은 일을 했긴 했지만 레베카가 자신이 한 일을 자세히 알고 있을 리 없었다.
그저 형식상의 치하이겠거니 하고 크로아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그럼 저는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필요한 게 있으시면 문밖에 대기하고 있는 하녀를 부르시면 됩니다.”
크로아는 허리 굽혀 인사하고는 다과를 내온 하녀 모두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베일을 벗고 편히 쉬라는 배려였다.
“제 주인과 달리 꽤 괜찮은 자이군요.”
칸나가 가면을 벗으며 말했다. 아무래도 율리안은 그녀에게 미운 털이 단단히 박힌 듯했다.
레베카는 베일을 잠시 벗어두곤 응접실 곳곳을 살폈다.
만발한 여름꽃으로 장식한 응접실은 쓸쓸한 공작 성의 전반적인 분위기와 다르게 따뜻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아마 사방의 통창으로 들어오는 환한 햇빛 덕분인 것 같았다.
레베카는 창문으로 다가가 유리를 통통 두들겨 봤다.
유리가 한 번 일렁이더니 다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잠시 감탄을 내뱉은 레베카는 여러 번 반복해서 창문을 두들겼다.
그녀의 눈이 호기심으로 반짝였다.
이 창문은 밖에서는 안이 보이지 않지만 안에선 밖이 보인다는, 소문으로만 듣던 마석으로 만든 유리였다.
게다가 열과 냉기를 차단하는 기능까지 있어 부르는 게 값이라 들었다.
제플린조차 기함할 만한 가격에 서재의 발코니에만 겨우 달 수 있던 유리이기도 했다.
“엄청난 부자이긴 하나 보구나.”
레베카는 데본셔가 응접실의 세 배는 될 만한 크기의 공간을 통으로 둘러싸고 있는 마석 유리를 보고 감탄했다.
“남자는 부가 다가 아닙니다.”
칸나는 응접실 곳곳을 둘러보는 레베카의 말마다 꼬투리를 잡았다.
평소 싫은 소리 한 번 하는 적 없는 칸나는 율리안이 화제로 떠오를 때마다 대번에 말투가 날카로워졌다.
그건 율리안도 마찬가지였다.
뭐, 율리안은 칸나가 저를 싫어하니 방어적인 태도로 그러는 것 같아 보였지만.
레베카는 둘을 화해시키려는 방도를 생각했다.
그때 창밖으로 누군가 현관을 향해 뛰어오는 게 보였다.
율리안이었다.
평소와 다르게 그는 앞머리를 내린 상태였다.
레베카는 편한 복장을 입은, 다소 흐트러진 그의 모습에 시선을 사로잡혔다.
가쁜 숨을 몰아쉬는 그의 물기 어린 복숭앗빛 입술과 땀으로 젖어 있는 핏대 선 목.
그리고 살짝 푼 셔츠 틈새로 얼핏 드러나는 두툼한 가슴팍과 가슴골 사이로 흘러내리는 땀방울이 레베카의 심장을 세차게 뒤흔들었다.
율리안은 소매를 걷은 뒤 하인에게 무어라 지시하기 시작했다.
그의 손등에서 팔목까지 바짝 오른 힘줄이 꿈틀거렸다.
단단한 선이 아름다웠다.
레베카는 침을 삼켰다.
그녀는 쉴 새 없이 움직이는 율리안의 입매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새삼스레 자신이 저 조각 같은 입술과 맞닿았다는 사실이 떠올라 레베카는 제 입술을 만지작거렸다.
정신없이 그를 바라보고 있는데 순간 율리안이 레베카 쪽으로 눈을 돌렸다.
율리안과 눈이 마주친 듯하자 레베카는 화들짝 놀라 창문 밑으로 몸을 숨겼다.
“레베카 님!”
칸나가 차를 들다 말고 벌떡 일어나 그녀에게 다가오려 했다.
레베카는 칸나에게 손을 내저었다.
그리고 두근거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다시 창가 의자에 앉았다.
‘숨을 이유가 없는데…….’
그저 바라본 것뿐이었다.
게다가 이 창문은 밖에선 안이 보이지 않으니 그가 제 시선을 눈치챘을 리가 없었다.
레베카는 다시 호흡을 가다듬고 고개를 들었다.
하인이 뭐라고 했는지 율리안이 호탕하게 웃고 있었다.
그녀가 좋아하는 예쁘게 접은 반달눈을 하고서 그가 눈부시게 웃었다.
레베카는 시린 눈을 깜빡였다.
그의 젊음은 이렇게 찬란한 것이었다.
문득 병상에서 힘없이 죽어갔다던 이전 생의 그가 떠올랐다.
레베카의 상기되었던 얼굴이 곧 차갑게 내려앉았다.
율리안이 입맞춤을 했던 그 순간 레베카는 그에게서 애정의 열기를 느꼈다.
레베카는 멍청이가 아니었다.
그녀는 사랑에 빠진 자의 눈빛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동안 자신에게 사랑을 갈구하던 수많은 이들의 눈빛을 질리도록 보아왔다.
율리안은 그들과 다를 바 없는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의 감정이 비록 깊은 사랑은 아닐지 몰라도 어찌 됐든 결국 그를 아프게 할 치기 어린 감정이었다.
레베카는 그와 함께 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순간 그녀의 거절에 자살로 겁박하던 어리석은 구혼자들이 떠올랐다.
하지만 곧 레베카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율리안은 그런 질 나쁜 짓을 할 인사가 아니었다.
애초에 그런 짓을 하면 레베카가 상처를 입을 걸 잘 알기에 아마 그는 생각조차 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그는 착하고 여렸다.
스스로는 세상 온갖 풍파를 겪은 것처럼 굴어도 율리안은 실상 요하네스 공작이라는, 온실에서 자란 사람이었다.
그런 그의 가슴에 못을 박을 생각을 하니 자신이 꼭 악마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해야 할 일이었다.
저주를 푸는 순간 레베카는 그를 떠나야만 했다.
아마 율리안은 잠시간 자신을 원망하겠지.
아니, 생각보다 더 오래 자신을 그리워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는 젊었다.
넘쳐흐르는 시간 동안 율리안은 결국 자신을 잊을 것이다.
그는 자신을 가슴 아픈 첫사랑의 추억 정도로만 기억할 것이었다.
그리고 율리안 본인만큼 착하고 아름다운 짝을 만나 행복한 가정을 이루겠지.
그를 닮은 귀여운 아이 여럿을 낳고 좋은 아버지가 되겠지.
레베카는 그거면 되었다고 생각했다.
물론 자신이 떠나고 난 뒤 잠시간 그가 고통스러울 수는 있었다.
하지만 그건 일시적일 뿐이다. 결국 그는 행복하게 살다 죽을 것이다.
그는 그럴 자격이 충분한 사내였다.
반대로 자신은 다시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운명이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제 복수에 율리안을 멋대로 끌어들인 것은 자신이었다.
그러니 자신은 아무 생각 말고 복수만 생각하면 된다고, 율리안의 저주를 풀기 위해 사력을 다하기만 하면 된다고 레베카는 자신을 담금질했다.
‘하지만 할 수 있을까.’
그를 볼 때마다 나쁜 짓을 한 꼬마아이처럼 조마조마해지는 이 감정을 과연 숨길 수나 있을까.
‘아니, 해야만 해.’
그에게 여지를 주지 않아야 했다.
그래야 조금이라도 그가 실연의 상처에서 빨리 빠져나올 수 있을 테니.
하지만 생각을 거듭할수록 자꾸만 자신이 없어졌다.
레베카는 다짐하듯 조용히 주먹을 그러쥐었다.
* * *
자신이 왔다는 걸 분명 알 텐데도 어쩐 일인지 율리안은 시간이 지나도 나타나지 않았다.
초조하게 그를 기다리던 레베카는 나지막한 노크 소리에 자리에서 벌떡 일었다.
문이 열리고, 크로아가 웃으며 들어왔다.
“레베카 님, 맥핀 씨가 오셨습니다.”
“아…….”
레베카의 얼굴 위로 실망이 잠시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낯을 가다듬고 말했다.
“생각보다 빨리 오셨네요.”
레베카는 번뜩이는 안경알 너머로 자신을 관찰하는 유스타프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유스타프가 얼른 그녀에게 인사를 건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