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망친 백작 부인이 돌아왔다-68화 (68/232)

68.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인사 올리겠습니다. 유스타프 맥핀입니다.”

“레베카 데본……. 아니, 레베카 오벨리아입니다. 반가워요. 저번에는 본의 아니게 속이게 되어 죄송했습니다.”

“아닙니다. 사정이 있었다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지난번에 주셨던 일지는 잘 보았습니다. 정말 꼼꼼하게 정리해 주신 덕에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나저나 저를 찾으신 연유가……?”

“당신은 훌륭한 식물학자이기도 하지만 의사이기도 하죠. 저를 진찰해 주시겠어요? 언제쯤 중독 증상이 완전히 없어지는지 궁금하군요.”

“예? 제가 의사였다는 걸 어떻게…….”

유스타프는 깜짝 놀라 레베카를 멍하게 쳐다봤다.

레베카는 어떤 음흉한 속내도 없는 말간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식물학자가 되기 전, 유스타프는 의학도였다.

그는 의사 자격증까지 따고 작은 병원에서 일을 시작했으나 서비스직이나 다름없는 직업에 곧바로 흥미를 잃어버렸다.

유스타프는 무료함을 달래려 취미로 약초학을 공부했다.

그러다 식물과 사랑에 빠져버렸다.

이전 생에서 그가 악마의 발톱으로 큰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건 식물에 대한 그의 해박한 지식 때문만이 아니었다.

뛰어난 의학적 지식이 뒷받침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레베카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유스타프는 레베카를 찬찬히 살폈다.

레베카가 어디서 자신의 정보를 알게 됐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그녀의 능력이었다.

이전에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 보았던 총기는 역시 잘못 본 게 아니었다.

그녀는 율리안의 숨겨진 연인이나 하수인 따위가 아니었다. 오히려 율리안이 그쪽이라면 모를까.

‘자고로 아버지께서 줄을 잘 타는 게 성공의 비법이라고 하셨지.’

유스타프는 제가 누울 자리를 확인하고 냅다 고개를 조아렸다.

“분부만 하십시오. 어떻게 모실까요?”

* * *

“이런 자세는 어떠십니까? 이렇게는 불편하지 않으십니까?”

율리안은 레베카를 이곳저곳 살펴보는 유스타프를 뚱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그녀가 왔다기에 하인들을 들들 볶아 급하게 단장했다.

모처럼 마음에 드는 차림새를 확인하곤 율리안은 서둘러 응접실을 향했다.

하지만 그가 상상했던 자신을 환히 반겨줄 레베카는 없었다.

레베카는 율리안에게 형식적인 인사를 건넨 이후로 줄곧 유스타프하고만 대화를 나누었다.

게다가 자신을 연신 노려보는 칸나라는 저 아이 때문에 율리안은 지금 이 자리가 영 불편했다.

‘혼자 온 줄 알았더니…….’

그는 조그맣게 한숨을 쉬고는 포크로 애꿎은 케이크를 난도질했다.

그 꼴을 보고 있던 칸나가 픽하고 비웃음을 흘려 그를 발끈하게 만든 건 말할 것도 없었다.

칸나와 율리안이 신경전을 벌이는 동안 유스타프의 밝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행히 잘 회복되고 있습니다. 수포의 크기가 점점 줄어들고 있군요. 이대로라면 겨울이 오기 전에 중독에서 벗어나실 수 있을 겁니다.”

“겨울 전이요……. 혹시 가을이 오기 전까지 회복하는 건 어려울까요?”

“가능은 합니다. 다만…….”

“다만?”

“혹시 몸무게가 어떻게 되십니까?”

“아, 몸무게라면…….”

“유스타프!”

레베카가 흔쾌히 그에게 답하려는 순간 참다못한 율리안이 소리를 질렀다.

그는 레베카의 팔을 잡고 있는 유스타프의 손에 눈을 고정한 채로 말했다.

“무례하게 굴 생각이라면 네 목을 걸어야 할 거야.”

꽤 험악한 협박에도 불구하고 유스타프는 당당히 고개를 들었다.

“무례한 언사라니요. 대체 무슨 상상을 하고 계신 겁니까. 저는 의사 된 자로서 환자의 상태를 확인하려는 것뿐입니다만.”

“내가 무슨 상상을 했다고…….”

율리안의 항변에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그 시선 중에는 레베카도 있었다.

레베카와 눈을 마주친 율리안의 얼굴이 붉어졌다.

“아…….”

레베카도 살짝 홍조 띤 얼굴로 얼른 시선을 돌렸다.

유스타프는 심상치 않은 두 사람의 분위기를 읽고는 흥미롭다는 듯 입매를 끌어올렸다.

“흐응. 두 분 사이가 그렇고 그랬군요. 이렇게 된 이상 공작님이 무슨 상상을 하셨는지 매우 궁금합니다만.”

“맥핀 씨. 자꾸 그러시다간 공작 성을 나서자마자 이 세상을 떠나게 되실 수도 있습니다.”

크로아가 한쪽 눈썹을 슬쩍 올리고 유스타프에게 경고 어린 농담을 던졌다.

크로아의 기세에 유스타프는 헛기침을 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크로아는 그의 뒤통수를 노려봤다.

‘공작님은 나만 놀릴 수 있단다. 갑자기 굴러온 돌 같은 작자가 어딜 감히!’

크로아의 자세한 속내를 알지 못하는 율리안은 크로아의 충성에 깊게 탄복했다.

율리안은 오늘 그에게 포상이라도 내려줘야겠다 생각하곤 크로아를 향해 그윽한 신뢰의 눈길을 보냈다.

레베카는 율리안의 만류에도 망설임 없이 유스타프에게 몸무게를 말했다.

그러자 유스타프는 물론이고 율리안과 칸나, 그리고 크로아까지 눈을 크게 뜨고 레베카를 바라봤다.

“정말 그 정도밖에 안 되신단 말입니까? 큰일이네요. 어쩐지 회복 속도가 제 예상보다 느리다 했습니다.”

“그렇게 심각한가요?”

“자주 어지럽고 숨쉬기가 힘들지 않으셨습니까. 악마의 발톱을 복용하신 뒤로 잠이 많아지셨고요.”

“네, 맞아요. 하지만 일반적인 증상이라고 여겼는데…….”

“그게 다 기력이 약해서 그런 겁니다. 가을까지 회복하시려면 레베카 님은 지금부터 살을 찌우셔야 합니다. 영양 상태가 아주 형편없어요. 레베카 님의 몸무게는 아직 데뷔탕트도 치르지 않은 꼬마 아가씨보다 적게 나간다고요.”

“그래도 최근 들어서는 열심히 먹고 있기는 합니다만…….”

“더 많이 드셔야 합니다. 물도 자주 드세요. 제가 영양 보충에 좋은 음식을 추려 드리겠습니다.”

유스타프는 노트 한 장을 주욱 찢더니 거기에 음식을 줄지어 적기 시작했다. 간략하게 레시피를 적기도 했다.

레베카는 그의 빠른 손놀림을 보다가 따갑게 쏟아지는 시선에 고개를 들었다.

율리안과 칸나, 그리고 크로아까지 레베카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왜……. 왜들 그래?”

레베카가 큰 눈을 껌뻑이며 물었다.

제일 먼저 일어난 건 율리안이었다.

“그렇게 말랐다니. 이건 다 내 잘못이다. 유스타프, 그 음식 목록 나한테 넘겨라.”

이윽고 칸나가 질세라 유스타프에게 손을 뻗었다.

“아닙니다. 이건 제 불찰입니다. 맥핀 님, 그 종이를 제게 주십시오. 책임지고 레베카 님을 살찌우겠습니다.”

“네 고용주가 누군지 잊지 않았겠지?”

율리안이 눈웃음을 치며 유스타프의 어깨를 꾹 눌러 잡았다.

유스타프가 비명을 질렀다.

“아니, 대체 왜들 이러십니까!”

“맥핀 씨, 공작가에 허약하신 분이 많아 저도 영양 쪽으로는 일가견이 있습니다. 여기에 문어라는 해양 생물로 만든 요리를 추가하는 게 어떠신지요. 보기엔 징그럽지만 원기 회복엔 그만입니다.”

크로아까지 덩달아 나서서 유스타프의 음식 목록에 의견을 더하기 시작했다.

한바탕 소란이 일었다.

결국 유스타프가 칸나와 율리안 둘에게 똑같은 목록을 써주기로 하고 소란이 일단락되었다.

크로아의 의견도 모두 반영되었다.

크로아가 흡족한 얼굴로 음식 목록을 훑었다.

율리안이 레베카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좋아. 레베카. 지금부터 특훈이야. 당장 음식을 먹으러 가자. 하루 다섯 끼, 아니 열 끼는 먹어야겠어.”

칸나가 질세라 그의 말을 간단히 무시하고 말했다.

“레베카 님, 얼른 집으로 돌아가서 식사를 하셔야죠. 아버님께 말씀드리면 훌륭한 요리를 만들어 주실 겁니다.”

“무슨 소리야. 공작 성의 요리사가 인원이 더 많으니 여기서 먹어야 다양한 요리를 맛볼 수 있어.”

“지금 테오 오벨리아 님의 요리를 무시하시는 겁니까?”

“뭐라고? 내가 언제 그런 말을…….”

칸나와 율리안은 또다시 투닥거리기 시작했다.

레베카는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이 소란이 마냥 싫지만은 않았다.

“자자, 그만하세요. 이러다간 끝이 없겠어요. 그럼 우리 공작 성의 요리사 한 명을 오벨리아 저택으로 보내드리는 걸로 하죠. 어떠세요?”

보다 못한 크로아가 나서서 상황을 정리했다.

“그게 좋겠군요. 아직 이곳에 자주 들락거리지는 못할 것 같으니까요. 크로아 님, 감사드려요.”

크로아의 말에 레베카가 서둘러 감사를 표했다.

그녀가 수긍하자 율리안과 칸나는 조금 아쉬운 얼굴로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레베카 님이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당신이 그렇게 말한다면야…….”

레베카가 크로아에게 몰래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안도의 숨을 내쉬고 있던 크로아는 그녀의 윙크에 잠시 움찔했다.

‘생각보다 그렇게 나쁜 여자는 아닐지도…….’

아니지, 아니야.

크로아는 레베카에게 생기기 시작한 호감을 애써 몰아냈다.

저런 식으로 자신의 호감을 사려는 수작일 수도 있었다.

그래서 순진무구한 율리안에게 그랬던 것처럼 자신을 유혹하려는 음흉한 속내를 감추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크로아는 고개를 내젓고 이따금 얼빠진 얼굴로 레베카를 훔쳐보는 율리안을 바라봤다.

자신이라도 정신을 바짝 차려서 저 영악한 여자에게서 공작가를 지켜내야 했다.

그는 사명감 어린 얼굴로 허리를 꼿꼿하게 세웠다.

하지만 그의 결연한 얼굴은 곧 바람 빠진 풍선처럼 무너져 내렸다.

“그럼 이제 다들 잠시 자리를 비워주시겠어요?”

“예?”

“율리안과 단둘이 할 이야기가 있거든요.”

레베카는 율리안에게 싱그러운 미소를 보냈다.

율리안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방긋 웃으며 곧바로 모두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다들 못 들었어? 나가라고.”

“하지만 공작님!”

“나가!”

크로아가 이를 아득 깨물었다. 그리고 레베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병 때문에 예전보다 그녀의 미모가 퇴색되었는데도 율리안은 오히려 더 레베카에게 홀딱 빠진 것 같아 보였다.

과연 율리안이 레베카에게 느낀 매력은 외모뿐만이 아닌 듯했다. 그녀는 생각보다 수완이 좋은 여자였다.

‘아쉽지만 이번은 그냥 넘어가도록 하지.’

율리안은 아직 안정이 필요한 단계였다.

지나치게 그를 자극했다간 병상에서 일어난 지 얼마 안 된 그가 다시 드러누울 수도 있는 법이었다.

몸이 튼튼하기로는 제국에서 알아주는 그였지만 그래도 요하네스 공작의 핏줄이었다.

언제 어디서 심장병으로 쓰러질지 모를 일이니 지나친 자극은 금물이었다.

“하아…….”

크로아는 한숨을 남몰래 내쉬고는 칸나와 유스타프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자자, 저희는 어디 다른 데서 차나 들고 있자고요.”

칸나와 유스타프도 썩 내키지 않는 건 마찬가지였는지 레베카와 율리안을 번갈아 보았다.

하지만 그들은 결국 크로아를 따라 응접실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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