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노을로 벌겋게 물든 응접실에는 잠시간 침묵이 흘렀다.
율리안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레베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잘 지냈어? 아팠다면서.”
“아, 이제 괜찮아. 영문도 모른 채 답신을 기다렸겠군. 미안하게 됐어.”
“조금 기다리긴 했지만 아팠다니 이해해.”
“화가 난 게 아니라면 왜 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는 거지?”
“어?”
그 말에 레베카는 율리안을 바라봤다.
그는 창문 밖으로 훔쳐본 수수한 모습과 달리 한껏 치장한 채였다.
율리안은 앞머리를 올려 반듯한 이마를 드러냈다.
그는 맵시 좋은 몸매를 여실히 보여주는 정장을 입고 있었다.
레베카는 그의 기다란 다리를 훑어보았다.
매끈한 종아리와 달리 그의 허벅지는 터질 듯한 근육을 자랑하고 있었다.
절로 침이 꿀꺽 넘어가는 장면이었다.
“아, 나를 피하는 게 아니라 내가 너무 잘생겨서 눈을 어디 둬야 할지 모르는 쪽이었나?”
“무슨!”
그의 말에 레베카는 당혹스럽게 그를 쳐다봤다.
황금색 눈동자가 빙글거리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렇다면 감상할 시간을 주지. 조금 더 훑어봐도 돼.”
율리안은 조끼에 진 주름을 펴고는 정자세로 앉았다.
그는 진심으로 레베카의 시선을 즐기는 듯했다.
레베카는 속마음을 들킨 것 같아 애써 눈을 찌푸리곤 그를 쏘아봤다.
“자신감이 너무 지나치면 독이야. 율리안.”
“자신이 있는데 숨기는 것도 이상한 일이지.”
그의 말에 황당해 하며 입을 뾰로통하게 내미는 레베카를 보고 율리안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녀의 반응을 보니 다급하게나마 꾸미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릴 때부터 어머니는 그에게 항상 이렇게 말하곤 했다.
‘율리안, 남자는 미모가 다다. 내가 네 아버지를 견디고 있는 것도 수려한 외모 때문이야. 다행스럽게도 넌 네 아버지의 아름다운 부분을 그대로 물려받았지. 그래도 경계심을 늦추지 말고 끊임없이 꾸미는 데 정진해.’
그런 말을 하며 그의 어머니는 율리안에게 손거울을 쥐어 주었다.
딱히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건 아니었는데도 율리안은 그 손거울을 항시 지니고 다녔다.
그가 이렇게 자신을 가꾸는 데 열성인 것은 어머니의 확고한 철학 때문만은 아니었다.
요하네스 공작가는 신전과 제국의 상징과 같은 가문이었다.
공식 석상에 설 일이 많았던 그는 언제 어디서나 아름다운 자태로 서 있어야만 했다.
그러니 공작새가 자신의 깃털을 다듬듯 자신을 보기 좋게 치장하는 건 그에겐 숨 쉬듯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오히려 날것 그대로의 자신을 내보이는 것이 불편했다.
게다가 레베카가 지금처럼 자신을 힐끔힐끔 훔쳐볼 수만 있다면 평생 머리부터 발끝까지 꾸민 채로 잠을 잘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레베카는 당당하게 우쭐거리는 그를 보고 있자니 계속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는 여전히 자신을 웃게 했다.
“뭐, 잘생기긴 했지.”
“어?”
솔직한 레베카의 대답에 율리안은 눈을 깜빡거렸다.
“당신, 잘생겼어. 당신이 지나갈 때마다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모두 당신만 쳐다보는 걸. 그리고 그 이점을 잘 활용하는 것 같아 보기 좋아.”
“보기…… 좋아?”
“응.”
레베카는 그 말을 마치고 호로록 차를 소리 내어 마셨다.
그리고 달아오른 얼굴을 손등으로 가리는 율리안을 힐끔 쳐다봤다.
그를 놀리고 싶은 마음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하지만 레베카는 그러지 않았다. 그와는 적당한 거리를 둬야 했다.
“그럼 이제 앞으로의 계획을 이야기해 볼까?”
레베카는 자신이 가져온 서류 가방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가방을 가져다가 자신의 앞에 놓더니 종이 두루마리를 꺼내 들었다.
율리안이 조금 맥 빠진 표정으로 두루마리를 무심히 바라봤다.
“그건 뭐지?”
레베카는 대답 대신 티 테이블에 올려진 찻잔과 접시를 트롤리에 모조리 옮겼다.
그리고 두루마리를 티 테이블에 펼쳤다. 커다란 티 테이블이 꽉 찰 정도로 큰 종이었다.
“조감도야. 내가 아는 선에서 데본셔 저택의 구조를 그려봤어. 여기 이외의 비밀통로가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게 앞으로의 계획과 상관이 있나?”
“당연히 상관있지. 데본셔 백작가의 치부를 캐내야 하니까. 여기 이곳에 반드시 잠입해야 해.”
레베카는 서재 부근을 손가락으로 톡톡 쳤다.
“제플린의 서재는 허락받은 사람 이외엔 아무도 들어갈 수가 없어. 아무리 사냥개라 해도 말이야. 그러니 이곳에 뭔가 있는 게 분명해.”
율리안은 조감도를 세세하게 살펴보았다. 완벽하진 않았지만 장인의 제자 수준은 될 만한 솜씨였다.
그는 저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을 뻔했다.
‘대체 이 여잔 못하는 게 뭐야?’
그녀는 뭘 해도 성공했을 사람이었다.
새삼 레베카를 가둬뒀던 제플린에게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때 아예 얼굴을 뭉개놨어야 했나…….’
율리안은 일전 황제의 별장에 잠입해서 제플린의 얼굴을 가격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때 자신이 너무 약하게 굴었던 것 같았다.
다음 번에는 봐주지 않겠다는 듯 율리안이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는 사이, 레베카는 이번엔 다른 종이 두루마리를 꺼내 들었다.
“이건 입구에서부터 후원까지를 그린 조감도야. 내가 매수한 사냥개들이 알려준 개구멍과 비밀통로를 표시 해뒀어. 그리고 여기, 빛의 전당. 여기가 제일 중요해.”
“빛의 전당? 아, 이곳이라면 나도 한 번 가본 적 있어. 그저 평범한 전시관인 것 같던데 뭐가 더 있나 보지?”
“이곳 지하에는 고문실이 있어.”
“뭐?”
“왜 놀라? 웬만한 귀족들은 개인 감옥이나 고문실을 가지고 있다는 걸 잘 알잖아. 근데 그게 문제가 아니야. 로버트 말로는 안쪽에 문이 하나 더 있대.”
“레베카. 오해할까 봐 미리 말하는데, 공작 성에는 고문실 그딴 거 없어. 취미도 없고.”
율리안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그의 여성 편력에 대한 소문이 퍼지면서 이상하게 그가 가학적인 취향이 있다는 이야기가 첨가되었다.
그래서 그쪽 취향의 클럽에서 그에게 은밀히 연락을 보내온 적도 있었다.
아무리 거절을 해도 끈질기게 붙었던 그 인간들을 생각하면 아직도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레베카는 긴장한 채로 자신의 반응을 기다리는 율리안을 보다가 엷게 웃었다.
“전에 말했던 것 같은데? 네가 한 떨기 백합보다 순결하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안다고. 걱정할 것 없어. 그런 이상한 오해 안 해. 그리고 네 취향 같은 거 앞으로 알아갈 일도 없어.”
“그걸 어떻게 장담…….”
“이제 본격적으로 계획을 알려줄게.”
레베카는 율리안의 말을 서둘러 끊어내었다.
율리안은 멈칫하고는 레베카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지금까진 그저 기분 탓으로 넘겼지만 이젠 확실해졌다. 레베카는 그를 피하고 있었다.
기분이 착잡하게 가라앉았다.
이유가 무엇이든 그녀가 자신을 피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심장이 꽈악 조여들었다.
‘젠장.’
가끔 그녀와 대화를 할 때면 보이지 않는 벽이 그의 앞을 가로막는 기분이 들었다.
레베카는 그가 도저히 읽어 낼 수 없는 먼 미래를 바라보는 것 같은 눈을 하곤 했다.
그리고 그 미래엔 자신이 없을 것 같다는 예감이 본능적으로 들었다.
이유를 물어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그는 경솔히 입을 열지 않았다.
기다리자.
언젠가 레베카가 스스로 그에게 알려주기 전까지 기다리자고 다짐했다.
그저 질문만으로도 사람의 마음을 부술 수도 있는 일이다.
율리안은 평생 그런 질문에 시달렸다.
모든 이의 시선이 집중되는 자리에 있다 보면 필연적으로 겪어야 하는 일이기도 했다.
잊고 싶은 기억을, 하고 싶지 않은 상념을 굳이 꺼내어보게 만드는 무례한 질문들이 매일같이 그를 찔러댔다.
그렇게 부서진 마음을 고치고 또 고치다 보니 마음이 단단히 닫혀 버렸다.
레베카도 그와 다르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기다리자고, 레베카가 자신에게 했던 것처럼 문을 두드리다 보면 언젠가 마음이 열릴 거라 그는 막연한 소망을 가졌다.
“우리 약혼하자.”
레베카가 눈을 깜빡이며 단호하게 말했다.
입에서 나오는 로맨틱한 말과는 달리 그녀는 결연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뭐……?”
“제대로 듣고 있던 거 맞아? 우리, 약혼하자고.”
“그래.”
율리안은 레베카의 손을 덥썩 잡았다. 어쩐지 놓치면 안 될 것 같았다.
레베카는 어이없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더니 그의 손에서 자신의 손을 빼내었다.
율리안은 황망한 눈으로 텅 비어 있는 제 손을 바라보았다.
“제대로 안 듣고 있었네. 잘 들어. 우리는 데본셔 백작가에서 열리는 가을 무도회에 참석해서 약혼을 발표할 거야. 그리고 몇 주 뒤에 결혼식을 올릴 거고.”
“가을 무도회?”
“그래. 데본셔 백작가는 대대로 가을마다 무도회를 열어서 빛의 전당의 전시품을 자랑하지. 주목받는 걸 즐기는 제플린이 가장 좋아하는 행사야. 그러니 그곳에 가서 모든 이목을 가로채야겠어.”
“무도회라…….”
데본셔 가을 무도회라면 율리안도 몇 번 참석한 적이 있었다.
가을 무도회는 항상 가면 무도회로 진행됐다.
때문에 귀찮은 인사들이 들러붙지 않아 그가 마음 편히 술을 즐기던 사교 행사이기도 했다.
“아. 그래서 가을까진 몸이 회복돼야 한다고 했었군.”
“맞아. 가을 무도회만큼 잠입하기 좋은 기회는 없어. 연회장 쪽에 모든 인력이 집중되거든.”
“아, 그러고 보니 데본셔 백작이 기억을 잃었다더군. 우습게도 당신과 이혼한 날 내 성문에 머리를 박으며 당신을 찾았다더라. 꼴에 머리는 좋아서 금방 나와 당신의 관계를 눈치챈 모양이야.”
“알고 있어.”
레베카가 여유롭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럴 것 같긴 했다만, 어떻게 안 거지?”
“이것도 다 당신 덕분이지. 당신이 기회를 만들어 준 덕분에 사냥개 대부분이 내 수중으로 들어왔어. 내가 백작과 안전하게 이혼한 사실이 그들의 결심을 확고하게 만든 모양이야. 아, 그렇지. 콜린이란 아이, 당신 사람이지?”
예리한 레베카의 지적에 율리안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도저히 못 당하겠군.”
“신원불명의 새로 들어온 사냥개. 완전히 제플린의 편인 것 같지도 않은데, 내 손을 잡지도 않았어. 그런데 하는 일을 보면 묘하게 내 계획을 도와주는 것 같았단 말이지. 그럼 남은 답은 뭐겠어. 율리안, 당신이지.”
“이제 조금 소름이 돋으려고 하는데. 당신에게 잘못 보이는 일은 없어야겠어.”
“잘 생각했어. 난 받은 만큼 돌려준다는 계산은 철저하게 하는 편이니까.”
“마음에 잘 새기도록 하지.”
율리안은 가슴에 X자 표시를 그으며 말했다. 이 심장이 멈출 때까지 기억하겠노라는 표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