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
레베카는 트롤리에서 찻잔을 들어 입을 잠시 축이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감히 멋대로 기억을 잃다니, 괘씸하기도 하지. 제플린이 나를 다시 떠올릴 정도로 아주 인상적인 쇼를 보여줄 거야.”
“그럼 우리의 목적은 가을 무도회를 완벽하게 망치는 거겠군.”
“아니, 그건 당신의 일이야. 당신이 모두의 시선을 붙들고 있을 동안 내가 직접 서재로 잠입하려고 해.”
“당신이 직접……?”
“응. 알고 보니 내겐 한 번 본 건 잊지 않는 능력이 있었어. 나도 참, 그게 보통 사람은 가능하지 않다는 걸 칸나가 일러줘서야 알았지 뭐야. 그러니 내가 서재에 들어가는 게 가장 확실하고 안전해.”
“그건 이해하겠는데, 무슨 좋은 수라도 있는 건가? 위험한 일이면 조금 곤란한데. 당신은 이제 내 약혼녀니까.”
율리안이 능글맞게 웃어 보였다.
시원스럽게 올라가는 그의 입꼬리에 시선을 빼앗기지 않으려 레베카는 부단히 노력해야만 했다.
레베카는 찻잔의 꽃잎 무늬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괜찮아. 내게 빚을 진 사람이 있거든. 그 사람이 날 도와줄 거야.”
“그 사람을 믿어?”
“그 사람을 믿지 않아. 하지만 그 사람의 욕망을 믿어.”
매끄러운 찻잔을 느릿하게 지분거리는 레베카의 손가락을 율리안이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녀의 잘 다듬어진 손톱이 단단한 찻잔의 표면을 스칠 때마다 나는 청아한 소리가 그를 사로잡았다.
레베카의 작은 손짓 하나를 보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즐거울 수가 있다니.
지금의 자신은 마치 작은 돌멩이를 가지고 노는 게 전부였던 소년이 갑작스레 진기한 장난감을 쥐었을 때와 같았다.
율리안은 레베카라는 자극에 정신을 못 차렸다.
한참 레베카의 몸짓을 구경하던 율리안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기가 막힌 생각 하나가 떠올랐다.
“레베카. 인상적인 쇼를 보여주겠다고 했지?”
“응?”
“그 쇼를 멋지게 장식할 만한 물건이 있는데 보러 갈래?”
율리안은 대뜸 레베카의 손을 이끌었다.
레베카는 서둘러 베일을 쓰고는 그를 따라나섰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여자의 손목을 잡고 성안을 돌아다니는 공작을 발견한 고용인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곧 제국 전체에 퍼질 무수한 소문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율리안은 구석진 방 안으로 레베카를 안내했다.
그는 벽을 가리고 있는 검은 천을 거두었다.
벽에 전시되어 있는 네 점의 그림을 본 레베카의 눈이 놀라움으로 반짝였다.
“율리안! 이건…….”
“일전에 제플린을 붙들어 뒀던 게 이것 때문이었어. 그땐 한 작품밖에 완성하지 못했지만, 해외에서 바리니카가 그림을 더 완성해서 보내왔지. 참 의리 있는 선생이야.”
레베카는 찬탄하는 눈빛으로 그림을 살펴보았다.
세기에 남을 만한 걸작이었다. 그 내용 또한 충격적이었다.
이제야 율리안의 계획이 어렴풋이 짐작이 갔다.
레베카가 기특하단 얼굴로 율리안을 바라봤다.
“황제 폐하께서 아주 좋아하시겠는 걸. 잘했어. 율리안. 이거면 아주 완벽한 쇼가 될 거야.”
“엿 먹이기에도 안성맞춤이지.”
그림을 훑어내리는 레베카의 머릿속이 바삐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제 남은 건 무도회가 열리길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 * *
무더위가 한풀 꺾이고 선선한 바람이 불어왔다.
하늘은 점점 높아지고 레베카도 착실히 살을 찌워가고 있었다.
“특제 해물 파스타입니다. 신선한 문어가 잔뜩 들어갔지요.”
율리안이 보낸 공작 성의 요리사 챔프가 자랑스럽게 레베카 앞에 접시를 내려놓았다.
레베카는 접시에 담긴 문어 다리를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언제 보아도 익숙하지 않은 식재료였다.
미식가들이 즐겨 먹는 해양 생물이라는데, 일단 생김새부터가 충격적이라 입에 대고 싶지 않았다.
“레베카, 어서 먹어.”
“레베카 님. 다 드셔야 합니다.”
하지만 서늘한 눈으로 레베카를 채근하는 율리안과 칸나의 기세에 레베카는 마지못해 포크를 들었다.
모양새와 달리 맛은 훌륭했다.
레베카가 소스까지 긁어먹고 나서야 율리안과 칸나는 레베카를 놓아주었다.
레베카의 건강 상태를 알게 된 이후로 율리안은 매일같이 오벨리아 저택을 찾아왔다.
이번에는 레오도 함께 동행했다. 손님들의 잦은 방문에 헤레나와 리비아는 무척 신이 났지만 레베카는 죽을 맛이었다.
칸나까지 율리안의 기세에 합세해 레베카에게 무언가를 계속 먹였기 때문이었다.
“제발 그만해! 이러다가 굴러다니겠어.”
밥을 다 먹었으니 이제 후식 시간이라며 케이크 한 판을 들고 온 율리안에게 레베카가 소리를 질렀다.
“단언컨대, 당신이 굴러다닐 때쯤 되면 세상 모든 사람은 공이 되어 있을 거야. 가을이 오기 전까진 회복해야 한다며. 이제 슬슬 날이 시원해지고 있으니 잔말 말고 얼른 먹도록.”
칸나도 그의 말에 동조하고 나섰다.
“이자의 말에 동의하고 싶진 않지만 틀린 말이 아닙니다. 어서 드십시오.”
칸나가 손수 케이크를 떠서 레베카의 입 앞에 가져다 대었다.
레베카는 질린다는 표정으로 커다란 생크림 케이크를 바라보다 마지못해 받아먹었다.
두 사람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정말 영양이 문제였는지 삼시세끼에 간식까지 챙겨 먹고 틈틈이 들판에 산책까지 하니 몸 상태가 점점 좋아졌다.
수포는 빠른 속도로 줄어들었다.
거기에 유스타프가 만든 특제 연고까지 꾸준하게 바르니 이제 얼굴은 흉 하나 없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아니, 오히려 건조한 편이었던 피부가 촉촉하게 변하기까지 했다.
몸 군데군데 남아 있는 흉터만 옅어지면 이제 악마의 발톱의 흔적은 모두 사라지게 됐다.
그리고 수포가 사라질수록 확실히 이전보다 머리가 맑고 몸도 한층 더 가벼웠다.
“이렇게까지 베키를 살뜰하게 챙겨주시다니. 정말 감사드려요.”
다나에가 현관으로 들어오며 말했다.
다나에가 모자를 벗어들자 하녀가 달려와 그녀의 모자를 받아들었다.
살롱 사업 준비가 이제 막바지에 다다라 다나에는 요즘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그녀가 집에 붙어 있는 날이 거의 없었다.
다나에 없이 테오 혼자 저택 전체를 관리하기는 역부족이었기에 믿을 만한 하녀를 여럿 들였다.
“어머니, 일은 어쩌고 이렇게 일찍 들어오셨어요?”
“오늘 의사 선생님이 오신다고 하셨잖니. 궁금해서 도저히 가만히 못 있겠더구나.”
다나에가 빙긋 웃으며 레베카 옆에 앉았다.
그리고 레베카의 손등을 가만히 쓰다듬었다.
레베카는 다나에를 잠시 바라봤다.
단정하게 올린 머리, 그리고 활동량이 많은 다나에에게 맞춤 제작한 드레스가 무척이나 잘 어울렸다.
레베카는 다나에의 귀에서 달랑거리는 진주 귀걸이를 발견하고 숨을 죽였다.
세월을 짐작케 하는 진주 귀걸이는 외할머니의 유품이었다.
다나에는 자신의 몸의 일부인 것처럼 그 귀걸이를 항시 하고 다녔다.
레베카는 진주 귀걸이를 보고 잠시 옛 생각에 잠겼다.
이전 생에서 그녀가 기억하는 다나에의 마지막 모습이 불현듯 떠올라 레베카의 얼굴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그때의 다나에는 잔뜩 흐트러진 몰골로 백작저를 찾아왔다.
‘도, 돈을…… 조금만 더 빌려줄 수 있겠는가.’
리비아가 상한 음식을 먹고 병에 걸렸다고 했다.
다나에의 얼굴은 비교적 평온했으나 비쩍 마른 어깨가 그녀의 수치심을 보여주듯 수시로 떨렸다.
제플린에게 돈을 구걸하는 그녀의 귀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다나에가 목숨처럼 지니고 다니던 우아한 빛의 진주 귀걸이는 전당포로 팔려나간 지 오래였다.
레베카는 그 당시 느꼈던 자신의 무력함을 상기했다.
두 번 다시 다나에가 그런 식으로 비참해지는 모습은 보지 않겠노라 다짐했다.
집요한 레베카의 시선을 느낀 다나에가 고개를 돌렸다.
“왜 그렇게 빤히 보니? 내 얼굴에 뭐가 묻었어?”
“아니, 아니에요.”
레베카는 시선을 돌렸다. 돌린 시선 끝에는 율리안이 있었다.
율리안은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잠시 허둥대다가 이내 눈을 반달 모양으로 접었다.
처음에 봤던 까칠하고 냉철하던 그 모습은 언제부터인가 사라지고 그의 얼굴엔 항상 자상한 미소가 떠올랐다.
레베카는 남몰래 옅은 웃음을 지었다.
“유스타프 맥핀 씨께서 오셨습니다.”
하녀가 손님의 방문을 알렸다.
레베카는 긴장한 허리에 힘을 바짝 주었다.
오늘은 마지막 검진이 있는 날이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동안 많이 드셨겠지요?”
“당연하지. 저것 좀 보라고. 풀줄기 같던 팔목이 이제 마른 나뭇가지 정도는 되잖아. 아직 한참 멀었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성과가 난 거지?”
율리안이 레베카의 팔을 슬쩍 곁눈질하며 말했다.
유스타프는 레베카를 이리저리 살피더니 환히 웃으며 말했다.
“정말 상태가 좋아지셨습니다. 제가 뭐라 했습니까. 영양 문제였다고요.”
“그럼 이제 완치된 건가요?”
“그 전에 한번 시험해보고 싶은 게 있는데……. 레베카 님, 혹시 지병이 있으십니까? 지병이 아니더라도 알레르기 같은 것도 괜찮습니다.”
“큰 지병은 아니지만 환절기마다 코가 간지럽긴 했어요. 만성적인 염증이라고 들었던 것 같네요. 그리고 복숭아를 먹으면 몸에 두드러기가 나더군요.”
“지금이 딱 환절기인데, 요즘은 어떠십니까?”
“그러고 보니 아무렇지도 않네요? 이맘때쯤엔 휴지를 달고 살았던 것 같은데.”
유스타프가 흥분으로 고양된 목소리로 말했다.
“역시나! 혹시 여기에 복숭아가 있습니까?”
유스타프가 하녀에게 물었다.
하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서둘러 부엌에서 복숭아를 하나 씻어서 가져왔다.
유스타프는 복숭아를 레베카 앞에 불쑥 내밀었다.
“자, 드셔 보세요.”
“먹으면 두드러기가 난다잖아. 네 연구 욕심을 위해 레베카를 희생하게 할 셈인가?”
율리안이 서슬 퍼런 눈으로 유스타프를 쏘아봤다.
유스타프는 그에 굴하지 않고 레베카의 손에 복숭아를 쥐어주었다.
“괜찮을 겁니다. 복숭아가 얼마나 맛있는 과일인데요. 그걸 못 드시다니 그동안 얼마나 괴로우셨겠습니까.”
레베카는 손에 들린 복숭아를 빤히 내려다봤다.
예전엔 닿기만 해도 간지러웠는데 지금은 괜찮았다.
신선한 복숭아 향이 물씬 풍겨 오자 레베카는 조심스럽게 복숭아를 한 입 베어 물었다.
“언니! 괜찮아?”
흙투성이가 된 채로 들어오던 헤레나가 레베카의 손에 들린 복숭아를 발견하곤 입을 떡하니 벌렸다.
그녀의 옆에 선 리비아의 손에는 지칠 대로 지친 레오가 축 늘어져 있었다.
헤레나와 리비아의 넘치는 활력을 감당하지 못한 게 틀림없었다.
율리안은 신의 사자를 장난감마냥 주물럭거리는 두 소녀의 기이한 행태를 멍하니 바라봤다.
싫었더라면 진작에 도망가고도 남았을 레오인데 이상한 일이었다.
“맛있…… 맛있어요!”
그 순간 레베카가 감격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