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
상큼한 과육이 그녀의 입 안을 풍족하게 채웠다. 사각거리는 식감과 신선한 과즙이 일품이었다.
레베카는 정신없이 복숭아 하나를 먹어 치웠다.
“괜찮은 거니?”
다나에가 놀란 얼굴로 레베카의 안색을 살피며 물었다.
레베카가 고개를 끄덕였다.
가려운 곳도 없고 몸에 발진이 일어나지도 않았다. 숨 쉬는 것도 이상 없었다.
“그럼 이제 병이 다 나은 거야?”
리비아가 환히 웃으며 레베카의 곁으로 폴짝 뛰어왔다.
리비아는 며칠 전에 선물 받은 복숭아를 레베카 혼자만 먹지 못해 안타까워했었다.
“언니! 그럼 이거 먹을 수 있어?”
쏜살같이 부엌을 다녀온 헤레나가 낑낑대며 커다란 잼 병을 들고 들어왔다.
잼 병에는 커다랗게 헤레나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복숭아 양이 많아 식구들 다 같이 만든 복숭아 잼이었다.
다만 레베카는 멀찌감치 구경하기만 해야 했다.
“내가 만든 잼을 먹어보고 싶다고 했었잖아.”
헤레나는 어느새 다과로 내온 스콘에 잼을 척척 발라서 레베카에게 내밀었다.
레베카는 자신의 식사를 감시하는 군단이 더 늘어난 것 같아 순간 등골이 서늘해졌다.
하지만 헤레나의 반짝거리는 눈빛에 도무지 거절을 할 수가 없어 스콘을 한 입 베어 물었다.
레베카는 헤레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정말 맛있어. 헤레나. 고마워.”
레베카가 눈부신 미소를 지었다.
헤레나는 레베카의 얼굴을 멍하니 보다가 얼굴을 붉혔다. 그리고 조용히 혼자 중얼거렸다.
“우리 언니 진짜 예쁘다…….”
“따흐흑……. 감동입니다! 정말 감동적이지 않습니까?”
그 광경을 쳐다보던 유스타프의 은회색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지금 우는 거야? 내가 아는 유스타프 맥핀이?”
율리안이 황당한 웃음을 터뜨렸다.
“네게 그런 눈물을 흘릴 감정이 남아 있는 줄은 몰랐군. 돈독 오른 미치광이 실험가에게 그 정도의 온정이 있었을 줄이야.”
유스타프는 눈 앞으로 흘러내린 은발을 살며시 뒤로 넘겼다.
그 손짓이 어이없을 정도로 수려했기에 응접실에 모인 사람들의 시선이 그에게 한데 쏠렸다.
그는 안경을 벗더니 기다란 속눈썹에 맺힌 눈물방울을 손가락으로 털어냈다.
“아, 물론 레베카 님의 가족애도 감동적이긴 하지만요, 제 말은 제 지적 능력이 감동적이지 않냐 말씀입니다.”
“뭐?”
“하. 이 천재적인 재능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정말 대단한 발견을 해낸 겁니다. 제가! 바로 이 유스타프 맥핀이 말입니다! 이 감동적인 순간을 널리 알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율리안은 그럼 그렇지, 하는 눈빛으로 유스타프를 바라봤다.
자신도 자아도취에는 일가견이 있다 생각했지만 유스타프를 따라가려면 한참 멀었다.
한참 자찬을 하던 유스타프는 불현듯 율리안에게 말했다.
“공작님. 확실히 하셔야 합니다. 특허는 무조건 제 이름으로 낼 겁니다. 공작님은 어디까지나 투자자십니다. 아시겠죠?”
“그래. 네 마음대로 해. 다만 무슨 일을 벌이려거든 내 허락은 맡고 해. 그래도 넌 요하네스 공작가 소속 연구원이니까.”
“여부가 있겠습니까!”
이미 유스타프의 머릿속엔 자신의 미래에 펼쳐진 광활한 꽃밭이 떠오른 모양이었다.
저렇게 단순한 사고방식에서 어떻게 그런 대단한 발견을 이루어 냈는지 모를 일이었다.
레베카는 그가 참 다루기 쉬운 사람이라 생각했다.
본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아 보이지만 말이다.
“그럼 유스타프 씨. 저는 이제 완전히 회복된 건가요?”
레베카의 질문에 유스타프가 환한 미소로 답했다.
“예. 아직 흉터가 남아 있긴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흉터일 뿐입니다. 레베카 님께선 이제 아주 건강하십니다.”
“당장 활동적인 일을 해도 될 만큼요?”
“당연하지요. 저 들판을 온종일 내달리셔도 좋습니다.”
레베카의 질문에 율리안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오늘 무슨 일정이 있어?”
“응. 누굴 만나기로 했거든. 아주 중요한 사람을.”
말을 마친 레베카는 복숭아 잼을 올린 스콘을 한 입 더 베어 물었다.
그녀는 헤레나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번지는 걸 보다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칸나와 시선이 마주쳤다.
칸나는 레베카의 의미를 알아들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 * *
“대체 일을 어떻게 하는 거야? 그 의자는 휴게실에 가져다 두라고 했잖니. 거기! 조심해서 옮겨!”
데본셔의 가을 무도회가 코앞으로 다가왔다.
매년 이맘때쯤엔 언제나 그랬듯이, 그레이스는 잠잘 시간까지 쪼개가며 바쁘게 움직였다.
어려운 것 하나 없었다. 오히려 그녀는 이런 부산스러움을 즐기고 있는 편이었다.
레베카가 사라지고 어수선한 저택 분위기를 바꾸는 데 이런 큰 행사만큼 좋은 것이 없었다.
게다가 그녀가 사랑해 마지않는 이 데본셔 저택이 아름답게 변해가는 걸 보는 것이야말로 인생의 큰 묘미였다.
다만 올해 데본셔의 가을 무도회에는 한 가지 변수가 있었다.
그레이스는 그 변수가 거슬려서 견딜 수가 없었다.
“아니, 그건 고급스러워 보이지 않아. 이것으로 바꾸도록 해.”
알리시아가 그레이스가 친히 고른 은촛대를 각종 보석이 잔뜩 박힌 금촛대로 바꾸라고 지시했다.
“하, 하지만…….”
알리시아의 하명을 받은 하인 하나가 그레이스의 눈치를 보았다.
그레이스의 눈썹 한쪽이 슬쩍 올라가려는 찰나, 알리시아가 하인의 뺨을 올려붙였다.
짝-
매서운 소리에 연회장을 꾸미던 분주한 손길이 일순 멈춰 들었다.
얼어붙은 정적 위로 알리시아의 앙칼진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대체 이곳의 안주인이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야? 일개 하녀장의 의견이 내 의견보다 중요하다는 거니?”
“아, 아닙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당장 바꾸도록 하겠습니다.”
“마님.”
그레이스가 조용하게 알리시아 쪽으로 미끄러지듯 걸어갔다.
그리곤 은촛대를 옮기려는 하인의 손을 막아섰다.
“연회장은 충분히 화려합니다. 여기서 장식품들까지 지나치게 화려했다가는 자칫 촌스럽다는 말을 들을 수 있습니다. 뭐, 그런 게 취향이라면 어쩔 수 없지만 말입니다.”
촌스럽다는 말에 알리시아는 습관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하지만 이내 당당히 가슴을 폈다.
‘알리시아, 오늘도 아름답네.’
의식을 찾은 제플린은 알리시아에게 지극 정성을 다했다.
그는 백작가의 사람들 모두가 입을 떡하니 벌릴 정도로 세상에서 가장 자상한 남편이 되었다.
정원을 거닐다가 제플린은 알리시아의 생각이 났다며 꽃을 꺾어왔다.
그리고 레스토랑에서 맛있는 디저트를 먹었다며 알리시아를 위해 손수 포장해 오기도 했다.
알리시아에게 불손한 고용인이 있다면 눈물이 빠지도록 혼을 내주었다.
게다가 제플린은 예전처럼 고용인들에게 매질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매사에 더욱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고용인들을 하대하지 않고 물건 취급을 하듯 대하지도 않았다.
제플린이 기억을 잃은 이후로 빛의 전당 지하의 고문실은 가장 긴 휴식기를 맞았다.
백작가의 사람들은 처음에 그런 제플린을 마치 유령이라도 보듯이 무서워했다.
또 무슨 미친 짓을 벌이려는가 싶었다.
하지만 하루가 이틀이 되고, 이틀이 며칠이 되었다.
제플린의 기억은 돌아오지 않았다.
상냥하고 신사적인 제플린에 고용인들은 차차 익숙해져 갔다.
다들 바뀐 제플린의 모습을 내심 반기는 분위기였다.
역설적이게도 제플린이 기억을 잃은 탓에 백작가에는 아슬아슬한 평화가 찾아왔다.
이런 상황에 가장 이득을 본 건 역시 알리시아였다.
제플린은 알리시아가 말하는 건 뭐든지 들어주었다.
금발의 푸른 눈을 가진 그녀가 꿈속의 여인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 모습이었다.
‘그래, 제플린이 날 백작 부인이라 인정하는 한 하녀장도 별수 없어.’
알리시아가 고고하게 고개를 쳐들었다.
“내 눈에는 그렇지 않아 보이는데 말이야. 데본셔 백작가의 위상은 작은 장식품 하나에도 깃들어 있어야 마땅하네. 그러니 내가 고른 촛대가 더 어울려.”
그레이스의 얼굴이 짜증으로 와락 구겨졌다.
“마님께서 모르셔서 그러는 모양이신데…….”
“내 남편이 내게 모든 권한을 준 걸 잊었나? 지금 감히 데본셔 백작의 명령을 무시하는 겐가?”
그레이스는 잠시간 말없이 알리시아를 훑었다.
알리시아의 금발은 샹들리에의 불빛에 비쳐 반짝거렸다.
푸른 눈동자는 자신을 향해 적개 어린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그녀의 금발과 푸른색 눈은 원래 타고난 머리와 눈동자처럼 인위적인 느낌 없이 자연스러웠다.
하지만 그레이스는 코웃음을 쳤다.
껍데기가 어찌 되었건, 알맹이는 그 천한 시골뜨기 알리시아였다.
‘분명 옥타비오가 술수를 쓴 거겠지.’
처음 알리시아가 그 꼴로 나타났을 때는 경악하다 못해 경멸스럽기까지 했다.
저렇게까지 해서 살고 싶을까. 자신이라면 수치심에 차라리 목을 매달아 죽어버렸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운이 좋게도 제플린이 기억을 잃었다.
알리시아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가증스러운 세 치 혀를 놀려 레베카의 자리를 차지했다.
알리시아가 제플린의 귀에 속삭인 이야기는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레베카라는 첫째 부인은 간악하기 그지없어 알리시아를 투기하고 괴롭혔고, 그것을 참다못한 제플린은 알리시아를 위해 레베카와 이혼했다.
그리고 레베카와 이혼이 확정되는 날 불의의 사고를 당한 제플린이 정신을 잃게 되었다.
알리시아는 자신이 무거운 몸을 이끌고 지극정성으로 제플린을 보살폈고, 기적적으로 그가 되살아났다는 거짓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지껄였다.
그레이스의 시선이 불룩하게 튀어나온 알리시아의 배를 향했다.
거의 만삭이 다 되어가는 데도 알리시아는 지치지도 않는지 그 몸을 이끌고 온 저택을 들쑤시고 다녔다.
‘배 속의 아이만 없었더라면…….’
감히 알리시아 같은 계집이 레베카의 자리를 넘볼 수도 없었을 텐데.
데본셔 백작 부인의 자리는 고귀한 자리였다.
레베카 정도는 되어야 어울린다는 말을 겨우 들을 수 있는 그런 자리였다.
그레이스는 마지막으로 보았던 레베카의 흉측했던 얼굴을 떠올리곤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다 이런 비극이 찾아왔을까.
그렇다고 마냥 손 놓고 한탄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알리시아는 영악하게 그레이스의 권한까지 야금야금 빼앗아가고 있었다.
이번 가을 무도회도 원래라면 그레이스가 도맡아 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알리시아는 몇 번 눈을 깜빡이는 걸로 제플린에게서 무도회 주관의 자격을 얻어냈다.
‘원래 집안의 큰 행사를 주관하는 건 안주인의 일이라고 알고 있네. 그동안 하녀장이 도맡아 왔던 게 이상한 일이지.’